식 맛은 장맛이라고 했다. 숙성된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만 제대로 된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 현대미술의 흐름을 두고 어떤 이는 ‘너무 쉽게 그린다’고 뼈 있는 말을 건넨다. 그만큼 내용이 없다는 것. 실제로 일부 작가는 트렌드만 좇는 경향이 너무 짙어 이 같은 지적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그래서일까. 미술 시장이 크게 붐을 일으키면서 작가는 많아졌는데, 오히려 애호가의 기대감을 충족시킬만한 작가는 드물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지 모른다.작품엔 작가의 정체성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 정체성은 어느 순간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장맛처럼 인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트렌드와 적지 않은 숙고의 시간이 필요한 작가적 입장이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해 상충하는 예가 많다. 변화 속도가 빨라진 요즘은 특히 그렇다. 그러다 보니 미술품 애호 패턴이 인스턴트 식으로 치우칠 우려도 있다. 편향된 특정 트렌드만 좇다간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인 것이 미술품 투자의 길이기도 하다.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작가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통일돼 있었다. 공신력 있는 공모전의 수상 경력, 학력, 사회적 활동 이력, 메이저 화랑과의 관계, 초대된 기획전의 수준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기준이 무시되고 있다. 첫 순위는 시장의 반응이다. 곧 수요자의 선호도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작가가 얼마동안 높은 가격에 지속적으로 판매되고 있는가 하는 점만이 우선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이런 점은 자칫 수요자 입장에선 매우 용이한 기준이라고 착각할 함정을 품고 있다. 앞에서 ‘그림을 너무 쉽게 그린다’고 일침을 가한 이의 “요즘은 작가 스스로 만들어서 시장에 나오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는 뒷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작가가 본연의 창의적인 자세보다 수요자의 눈치를 먼저 보고 선호 받는 트렌드에 자신의 작품 성향을 맞춘다는 얘기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예술가 개인의 차별화된 예술관에서 나온다. 그 작가 개인의 생각이 쌓여 한 시대의 미술사가 만들어진다.결국 현명한 애호가일수록 겉에 나타난 얕은 시각적 효과보다 그 이면에 담긴 작가적 진의에 주목해야 한다. 같은 주제라도 얼마나 장고의 시간을 두고 깊이 있는 천착에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중진 작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들에겐 그 고민의 깊이를 가늠할 척도인 ‘시간성’이 간직돼 있기 때문이다.투자 개념으로 중진 작가의 작품을 선별할 때 몇 가지 요령을 살펴보자.첫째, 저평가된 작가인지 확인하자. 무수히 많은 작가 중에 시장에서 주목하는 모든 작가가 가장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주목받는 경우엔 반드시 타당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 저평가에 대한 여부는 그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 개인전 형식(초대전 여부), 어느 화랑인가, 얼마나 비중 있는 기획전에 참여했는가, 국내외 고른 활동을 보이는가, 어떤 아트페어에 초대되었는가 등. 여러 요소들을 포괄해 살피면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둘째, 진정한 독창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흔히 말하는 기획력은 작품에 있어 아이디어에 해당한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 두 요소(기획력과 아이디어)는 독창성의 발단은 될 수 있지만 뼈대는 될 수 없다. 작가적 독창성은 아이디어에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 무수한 살을 붙여 독립적인 몸체를 만들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 전에도 그려졌던 소재인 꽃이나 재료인 물감을 현재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으로 무엇을 그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리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셋째, 기본적인 성과를 얻고 있는지 확인하자. 이 부분은 보는 각도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작은 화랑보다 메이저 화랑에서 전시한 경력이 반드시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 없고,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국가적으로 공인된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성과가 반복적일 때는 얘기가 좀 다르다. 한두 번은 요행이겠지만, 반복은 실력일 가능성이 높다. 중진 작가의 경우 전시 경력이 평균 100여 회는 족히 넘는다. 그 정도면 한 작가의 지나온 이력에서 남다른 성과를 구분하기에 충분하다. 중진 작가에 대한 ‘시장에서의 비전’은 특정한 몇 점의 작품이 아니라 이러한 이력이 적절히 감안돼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넷째, 작품 가격이 적절한지 따져보자. 미술계에서도 간혹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통용된다. 속칭 “잘나가는 모 작가가 내 친군데…”라는 식이다. 지나치게 높게 산정된 자신의 작품 가격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일 수 있다. 작품 가격은 연차로 주는 연봉이라기보다는 성과급에 가깝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합리적인 성과 급여를 받듯, 작품 가격 산정에는 철저히 냉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다섯째, 현대의 동시대적 감성을 갖추고 있는지 알아보자. 나이가 많은 중진 작가라고 해서 동시대적 감성에 무뎌도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시대적 감성은 지금의 현재 시각만을 지적함이 아니라 세대를 관통한 흐름을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20대 작가에겐 2002 월드컵이 가장 큰 이슈라고 한다면 30대 작가는 88올림픽이, 40대 이후 작가는 민주화운동, 50대 이상의 작가는 새마을운동, 80세 전후의 원로 작가에겐 6·25전쟁 등이 가장 큰 감성적 충격을 안겼을 것이다. 여기에서 50~60세 작가에게 싸이월드, 혹은 아바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구태의연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때문에 중진 작가에게 있어 동시대적 감성은 적어도 좀 더 폭넓게 적용돼야 할 것이다.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작품의 소재 중 단연 으뜸은 자연이다. 그중에서도 꽃은 일반 감상자까지 쉽게 매혹시키는 힘을 지녔다. 누구나 쉽고 부담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꽃을 그린 중진 작가 두 명을 사례로 비교해 보자. 우선 ‘진달래 작가’로 이름난 김정수. 그의 진달래는 우리 정서에 가장 깊이 와 닿는 이미지인 동시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소재다. 특히 작가는 “진달래꽃은 고단했던 근대사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희생한 수많은 여인들의 열정과 영혼을 상징한다”고 강조한다. 유독 투명한 분홍빛이 탁월한 꽃잎의 색은 그만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캔버스(아사)천에 꽃잎의 바탕색을 칠해 먼저 짙은 붉은 색이 배어 나오게 한 다음에 일곱 단계의 덧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진달래 고유의 색을 얻는다고 한다. 맑고 투명하면서 깊은 분홍빛이야말로 진달래를 통해 민족적 감성을 함축해내고자 하는 작가적 의지를 대변하는 상징일 것이다. 작품 가격은 최근 개인전에서 호당 35만 원이었다.다음은 이호중 작가의 안개와 꽃이다. 최근엔 우리나라 늦가을과 겨울의 황토 벌판 풍경을 선보이고 있지만 지난 20여 년간 안개 낀 아침 풍경을 서정적으로 화폭에 담았다. 특히 그의 안개 속에 등장하는 꽃들은 진한 생명력을 자아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때문인지 풍경의 수평적 구도가 두드러지며 한없이 평화롭고 안정적이다. 안개가 미처 아침 햇살에 밀려나지 않은 꽃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원한 쉼터였던 고향의 냄새까지 느낄 수 있다. 작품 하나로 더없이 큰 평화로움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연의 정감을 모티브로 삼았기 때문은 아닐까. 작품 가격은 안개 시리즈가 호당 30만 원선, 황토 벌판 시리즈는 40만 원선이라고 한다.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