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 7월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에서는 신형 피아트 500의 출시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웰컴 반비나(Welcome Banbina)라는 타이틀로 열린 신차 발표회는 전 세계 미디어 관계자와 몬테제이모로 피아트그룹 자동차 회장, 마르키온네 사장 등 피아트 임직원 등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막이 올랐다. ‘반비나’는 이탈리아 말로 ‘사랑스러운 아가씨’라는 뜻. 이날은 50년 전 피아트 500 올드 버전이 처음 세상에 소개된 날이기도 했다.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피아트 500(친퀘첸토)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친퀘첸토(Cinquecento)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공업화 열풍이 불던 때 생산된 주력 제품으로 이탈리아 경제 기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세계 자동차 조류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해 1975년 단종됐지만 피아트 500에 대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향수는 여전하다.폭스바겐이 비틀, BMW가 미니의 새로운 버전으로 성공을 거두자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의 핵심인 피아트는 새로운 500 개발에 착수했다. 피아트는 500을 개발하는데 있어 접근방식부터 폭스바겐, BMW와 달리했다. 신형 피아트 500은 개발단계에서부터 대중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피아트그룹 홈페이지에 ‘500 wants you’라는 코너를 개설해 소비자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직접 얻었으며, 이를 제품 개발에 적극 반영했다. 그 결과 피아트는 현대인들은 나만의 독특한 자동차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색상과 문양 등을 구매자가 원하는 색깔로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소형차로는 드물게 차체 내 7개의 에어백을 장착해 안전성을 크게 높였고 고급 자동차에 적용하는 ESP 시스템 등을 적극 도입했다. 또 올해부터 발효될 유로V의 기준을 충족, 환경 친화성을 높였다는 점도 과거와는 달라진 부분이다.피아트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공식 웹사이트(500 wants you)와 민영 방송 ‘카나레 5’를 통해 신차 발표회를 생중계했다. 신차 발표회가 TV를 통해 방영된 것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판매 성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1주일 후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유럽 전역에 ‘아가씨(반비나)’를 외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며 신형 피아트 500의 폭발적인 인기를 보도했다.이 신문은 이탈리아에서는 판매를 시작한 지 채 15일도 안 돼 무려 2만5000대가 계약될 정도로 ‘히스테리적’인 구매 현상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반년이 지난 지금 피아트 500은 아이팟과 함께 유럽 젊은이들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피아트 500은 유럽 22개국 출신의 자동차 저널리스트들이 뽑은 ‘2008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자동차 업계에서는 피아트 500의 이 같은 성공이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하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이탈리아 자동차는 영국 독일 프랑스와 함께 유럽 자동차 산업을 이끄는 선두 주자였다. 그러나 잦은 고장과 애프터서비스 부실로 세계 자동차 흐름에 뒤떨어지면서 이탈리아 자동차는 세계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현재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은 피아트그룹의 비중이 80%를 차지한다. 어찌 보면 피아트의 역사가 바로 이탈리아 자동차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피아트는 1899년 이탈리아인 파라조 브레첼라시오가 북부 토리노에 ‘파브리카 이탈리아 오토모빌 토리노(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라는 회사를 설립한데서 시작했다. 브레첼라시오는 창업 당시부터 ‘자동차는 부자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철학이 투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롤스로이스, 벤츠 등이 고가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과 달리 피아트는 초창기부터 대중에게 사랑받는 자동차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때마침 제1,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피아트는 엄청난 돈을 벌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1969년에는 란시아와 페라리 등 자국 내 대형 자동차 업체를 하나 둘씩 인수해 이탈리아 자동차 생산의 90%를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유럽 전역을 휩쓴 과격 노동운동의 여파로 피아트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단행한 브랜드 통합은 피아트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내몰았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피아트는 이탈리아에서도 시장점유율이 50% 아래로 떨어지는 등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했으며 급기야 2000년에 들어서는 점유율이 20%대로 급락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피아트가 조만간 공중 분해될 것이며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파산)’은 시간문제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굴지의 자동차는 이제 과거의 호랑이에 불과할 뿐이었다.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현 최고경영자(CEO)인 세르지오 마르치오네다. 카를로스 곤의 닛산 재건 프로그램과 비견될 정도의 강력한 구조조정과 원가 절감을 단행해 지난 2006년 피아트그룹은 3억8000만 달러의 흑자 기업으로 변신했다. 최근 미국 자동차의 자존심인 제너럴모터스(GM)나 포드의 인수 대상자로 피아트가 오르내리고 있는 것만 봐도 격세지감이 느껴진다.피아트그룹이 생산하는 자동차 브랜드는 피아트를 비롯해 슈퍼카인 페라리, 마세라티, 트럭 브랜드인 이베코, 경차 브랜드인 랜시아, 스포츠카 계통의 알파로메오 등 6가지다. 이 중 페라리와 마세라티는 지난해부터 국내 판매가 재개됐다. 페라리의 경우 F-1 기술이 대거 장착된 F430과 F430 스파이더를 비롯해 599GTB 피오라노, 612 스카글리에티 등 4종류의 차량이 판매되고 있다. 이 중 599GTB 피오라노는 엔초 페라리 다음으로 출력이 높은 V12 엔진이 탑재돼 있으며 배기량이 5999cc에 이른다. 최고 출력은 8400rpm이며 최대 토크는 5600rpm에서 62kg.m까지 나온다.마세라티 계열에서는 럭셔리 스포츠 세단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콰트로포르테 오토매티카와 콰트로포르테 스포츠 GT 등 2종류가 판매되고 있다. 이 중 콰트로포르테 스포츠 GT는 페라리 F-1 팀이 설계에 깊숙이 관여해 제작됐으며 최고 속도는 시속 275km이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5.2초 만에 도달한다.마세라티의 국내 판매를 담당하고 있는 FMK는 올해 2억1000만 원짜리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를 들여올 계획이다. 이 차에는 4.2리터 8기통 엔진이 장착돼 405마력의 힘을 발휘하며 전방과 후방의 무게중심 비율을 49 대 51로 배정해 운전자의 의도에 따라 차량이 주행력을 선보이게 설계됐다. 최대 마력은 7100rpm이고 4750rpm에서 최대 47kg·m의 토크를 발휘한다. 최고 시속 285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걸리는 시간은 5.2초다.최근에는 피아트의 한국 시장 진출설도 제기되고 있는 등 관련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피아트 자동차는 가격이 저렴한 경차 위주로 라인업이 구성돼 있어 국내에 수입될 경우 BMW 미니, 폭스바겐 뉴비틀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 업계에 따르면 모 자전거 생산 업체와 중견 D, C, H그룹 등이 중국에 있는 피아트 아시아 태평양 본부로부터 수입 판매를 제의받았으며 이 중 2~3곳 정도가 수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피아트가 국내 들어올 경우 가장 유력한 모델로는 피아트 500과 중소형 세단 리네아, 브라보, 푼토, 판다, 리네아 등이다. 이 밖에 유럽 패션 리더들이 즐겨 타는 고급 세단 알파로메오도 국내 진출을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있다.피아트 계열 외의 이탈리아 자동차 브랜드는 람보르기니가 있다. 람보르기니의 공식 딜러인 참존모터스는 현재 가야르도 슈퍼레제라, 가야르도 쿠페, 가야르도 스파이더와 무르시엘라고 LP640, 무르시엘라고 LP640 로드스터 등을 시판하고 있다.이탈리아 자동차의 가장 큰 매력을 말하라면 감각적인 디자인에 다양한 컬러를 꼽을 수 있다. 알파로메오는 외부 그릴부터가 일반 자동차와 뚜렷이 구분된다.내부 인테리어도 마찬가지다. 피아트 계열의 자동차 대부분은 운전자 좌석을 파격적으로 설계해 20~30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 자동차는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 자동차 디자인에 커다란 모티브를 제공해 왔다. 이탈리아의 대표적 자동차 디자인 업체인 이탈디자인은 대우차 에스페로, 라노스, 레간자 등을 디자인했고 이탈리아 낳은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주지아로는 현대 포니를 비롯해 대우 칼로스, 라세티의 디자인을 전담했다.그동안 이탈리아 자동차의 단점으로 지적돼 온 엔진 출력과 애프터서비스 등도 확실하게 업그레이드됐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특히 피아트는 혼다자동차의 성공으로 최근 국내 수입 차 시장에서 2000만~3000만 원 차량의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을 매우 고무적으로 해석한다. 다만 대부분의 자동차들이 소형으로 구성돼 있어 수익성이 크지 않다는 점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시장에서 진출에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점, 자동차 기준 대부분이 유럽식에 맞춰져 있어 북미식인 우리나라 기준에 맞는 차를 얼마나 생산할지는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송창섭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