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연령을 뜻하는 최빈사망연령이 100세에 이른 시점을 100세 시대라 한다. 현재 한국인의 최빈사망연령은 88세로 추정되며, 2025년에는 90세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100세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중인 셈이다.
수명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마냥 좋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늘어난 수명만큼 노후 준비에 따르는 부담도 커지기 때문이다. 금리가 높았던 시절에는 그나마 나았다. 예·적금과 같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만 따박따박 저축하면 노후자금을 불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저금리가 장기화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늘어난 수명만큼 부족해진 노후자금을 보충하려면 예·적금만으로는 어렵고 투자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직장인의 대표적인 노후생활비 재원이라고 할 수 있는 퇴직연금을 살펴보자. 2020년 현재 255조5000억 원이나 되는 퇴직연금 적립금 중 89.3%(228조1000억 원)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맡겨져 있고,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된 자금은 10.7%(27조4000억 원)에 불과하다. 저축 금액에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연금저축도 마찬가지다. 2020년 현재 151조7000억 원에 이르는 적립금 중 72.3%(109조7000억 원)는 보험, 11.6%(17조6000억 원)는 신탁에 맡겨져 있다. 펀드에 투자된 돈은 겨우 12.5%(18조9000억 원)에 불과하다.
이카루스에게 배우는 연금자산 관리
아무래도 연금은 노후생활비 재원이므로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을 안전하다고 할지는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스신화의 이카루스 이야기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카루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섬을 통치하던 미노스왕의 명을 받아 미로로 된 궁전을 만든다. 그리고 미궁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누설해서 아들과 함께 자신이 만든 미궁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모아서 밀랍으로 붙여서 날개를 두 쌍 만든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이 한 쌍씩 나눠 갖는다. 다이달로스는 이카루스에게 날개를 달아주며 “너무 높이 날아서 태양 가까이 가면 밀랍이 녹아 내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하늘을 나는 즐거움에 아버지의 간곡한 당부를 잊어버린 이카루스가 태양 가까이 날아오른다. 그러자 깃털을 접착하고 있던 밀랍이 녹아내려 떨어져 죽는다.
이카루스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너무 높게 날아서도 안 되지만, 너무 낮게 날아서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 미궁이 있던 크레타섬에서 탈출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카루스가 높이 나는 것이 무섭다고 해수면 가까이서 비행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바다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날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이달로스가 이카루스에게 한 당부는 연금자산을 운용하는 데도 참조할 만하다. 이카루스에게는 태양까지 높이 날아 오르는 것만큼이나 해수면 근처를 낮게 나는 것도 위험하다. 적정한 고도를 유지하며 안전하게 비행하다가 반대편 해안에 안전하게 착륙해야 한다. 연금자산의 운용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고수익을 추구하다가 노후자금을 큰 손실을 입어서도 안 되지만, 지금 같은 초저금리 상황에서 연금자산 관리로 원리금보장형 상품만 고집할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연금을 원리금보장형 상품에서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옮기는 머니무브가 시작되고 있다. 이는 퇴직연금과 연금저축을 합친 사적연금의 펀드 순자산총액(NAV)를 보면 알 수 있다. 2015년에 17조2000억 원이었던 순자산이 2020년에는 35조8000억 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해서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늘어난 수명과 낮은 금리에 대응하려면 저축에서 투자로 은퇴자산의 서식지를 옮겨야 한다. 이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투자 역량이 뛰어나고 경험도 필요하다. 투자 경험과 역량을 갖췄다고 해도 바쁜 직장인들이 연금자산 관리에 얼마나 시간을 쏟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투자 경험이 일천하다 해서, 투자관리를 할 역량이 안 되고 시간이 모자란다고 해서 은퇴자산을 모두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맡겨 둬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연금가입자가 투자 과정에 일일이 개입한다고 해서 투자 성과가 더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분위기에 휩쓸러 투자를 망칠 때도 많다. 그보다는 투자 과정을 심플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금융상품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이 같은 금융상품으로 타깃데이트펀드(Target Date Fund, TDF)가 있다.
생애주기에 맞춰 자율주행하는 TDF
타깃데이트펀드는 우리말로 ‘목표 시점 펀드’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말보다는 영문 머리 글자를 따서 TDF라고 부른다. TDF는 투자자의 목표 시점(target date)에 맞춰 펀드 내 자산 비중을 자동으로 조정해주는 금융상품이다. 최근 2년 사이 TDF 순자산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18년만 해도 1조3730억 원이어던 TDF 순자산이 2020년에 5조2314억 원으로 증가했다. 2년 사이 순자산이 4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같은 기간 펀드 수도 53개에서 107개로 2배 늘어났다.
그러면 TDF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품인지 살펴보자. TDF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TDF는 생애 설계 금융상품이다. TDF는 연금 가입자를 위한 금융상품이다. 연금 가입자만 TDF 가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퇴직연금이나 개인연금 가입자가 자산을 운용하는 데 최적화된 금융상품이라는 뜻이다. 연금 가입자가 은퇴할 것으로 예상하는 연도까지 노후자금을 축적하고, 은퇴 이후에는 이를 인출해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가입자의 생애 전반에 걸친 자산관리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서 TDF를 ‘생애 설계 금융상품’ 또는 ‘라이프사이클 펀드(Life Cycle Fund)’라고 한다. 둘째, TDF는 장기 투자 상품이다. 노후자금 축적에서부터 인출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히 긴 기간이다. TDF는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연금자산을 맡아 운용한다는 점에서 초장기 금융상품이다. 자산 운용에 있어서도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기적으로 위험해 보여도 장기적인 수익을 얻기 위해 감내해야 할 것이 있고, 반대로 단기적으로 안전해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
연금은 노후생활비 재원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고수익만 추구할 수는 없다. 그러다 큰 손실을 당하면 안정적인 노후 생활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자산을 운용해서도 안 된다. 장기간 물가상승률이나 임금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수익을 내면 구매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TDF는 장기적으로 투자원금 손실을 방지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 위험에서 연금자산을 보호하는 절충적인 금융상품이다. 상반되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면 자산 배분이 필요하다. 여기서 TDF의 세 번째 특징이 나온다.
셋째, TDF는 글로벌 자산 배분을 한다. 연금자산을 다양한 국가와 자산에 분산투자 해서 호황기에는 수익을 창출하고, 조정기에는 리스크를 관리한다. 흔히 투자에 성공하려면 기가 막힌 종목을 고르거나 절묘한 타이밍에 사고팔아야 한다고 한다.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투자자들은 종목을 잘못 골랐거나 타이밍이 나빴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이런 생각에는 반론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자산 배분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산 배분의 중요성을 강조한 연구는 그동안 많이 있었는데, 게리 브린슨 등이 1974년부터 1983년 사이에 91개 대규모 연기금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브린슨 등은 이 연구에서 각 연금의 분기 총 수익률 변동을 자산 배분, 시장 예측, 증권 선택의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파악했다. 연구 결과 자산 배분이 포트폴리오 운용 성과에 91.5%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고, 증권 선택(2.7%)과 시장 예측(1.8%)의 영향은 아주 미미했다.
넷째, TDF는 자동으로 펀드 내 자산 편입 비중을 조정한다. 자산배분형 펀드는 자산 편입 비중을 일정하게 유지하느냐, 수시로 변경하느냐에 따라 둘로 구분한다. 먼저 투자 기간 내내 정해진 자산 비중을 유지하는 밸런스 펀드(balanced fund)가 있다. 한편 자산배분형 펀드 중에는 시장 상황에 따라 펀드매니저가 자산 편입 비중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것도 있다. 시장 상황이 좋아 보이면 주식 비중을 늘리고, 그렇지 않을 때는 줄이는 식이다. 펀드매니저의 운용 역량에 따라 수익률의 변동 폭이 커질 수 있다. 시장 예측이 맞으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 TDF도 투자 기간 동안 자산 비중을 조정한다. 하지만 시장 예측에 따라 임의로 비중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펀드에서 미리 정해 둔 자산 비중 조절 계획에 따른다. 이때 자산 편입 비중을 누가 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먼저 연금 가입자가 직접 조정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연금 가입자 입장에서 펀드를 해지하고 다시 가입하기가 상당히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전환 시기를 선택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TDF 가입자는 이 같은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가입자가 예상 은퇴 시기에 맞춰 목표 시점을 선택하면 펀드가 알아서 자산 비중을 조절해준다. 이때 자산 비중 조절은 펀드에서 미리 정한 경로를 따라 투자 기간 초기에는 주식 비중을 높게 유지하다가 목표일이 다가올수록 낮춰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식 비중을 차츰 낮춰가는 자산 배분 곡선이 비행기가 착륙하는 경로를 닮았다고 해서 글라이드 패스(glide path)라고 한다.
TDF로 퇴직연금 관리하기
좋은 금융상품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안성맞춤일 수는 없다. 그러면 TDF는 누구에게 적합할까. 퇴직연금 가입자가 금융상품을 선택할 때 살펴야 할 사항을 알아보자. 먼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본다. 은행 정기예금, 보험사의 이율보증보험(GIC), 증권사의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금리 수준에 만족하는가. 그렇다면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적립금을 맡기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투자 상품을 관리할 역량이 되는지 살펴야 한다. 스스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자산 배분을 하고, 정기적으로 자산 비중을 재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 살펴야 한다. 포트폴리오 관리 경험과 역량만 충분하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연금자산을 관리할 만한 시간 여유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를 대신해줄 수 있는 금융상품을 골라야 한다.
자산 배분과 리밸런싱을 대신해주는 금융상품을 자산배분형 펀드라고 한다. 증권사의 랩어카운트와 보험사의 MP 보험도 여기에 해당한다. 자산배분형 금융상품은 투자 기간 내내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비중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밸런스 펀드도 있지만, 시장 상황에 따라 자산 비중을 변경하는 상품도 있다. 만약 퇴직연금 가입자가 초기에는 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을 높게 가져가다가 은퇴 시점이 다가올수록 그 비중을 줄이고 싶다면 TDF를 선택하면 된다. 만약 이카루스가 예전에도 자주 하늘을 날아봤거나, 날개의 재질과 사용 방법을 제대로 익혔더라면 어땠을까. 그게 아니라면 다이달로스가 경험이 부족한 아들에게 오늘날 항공기에서 사용하는 자동항법장치를 달아줬다면, 어땠을까. 이카루스는 태양과 해수면으로부터 떨어져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적정한 고도를 유지하면서 비행하다가 반대편 해안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연금 운용도 마찬가지다. 투자 경험도 많고, 역량이 충분하고, 시간 여유도 있다면, 연금 가입자가 직접 시장 상황에 맞춰 연금자산을 적재적소에 배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금 가입자 중에는 경험도, 역량도, 시간도 부족한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비행기의 자동항법장치처럼 연금자산을 운용하도록 도와주는 TDF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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