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명 작가 <부서진 여름>

서늘한 것에 손이 가는 지금. 올여름 휴가에는 미스터리 스릴러 한 권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등 굵직한 소설을 집필했던 이정명 작가의 신작 <부서진 여름>은 한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거짓과 오해들을 그리며 진짜 범인이 누군지 궁금하게 만든다.
부서진 여름, 이정명 지음, 은행나무, 2021년 4월
부서진 여름, 이정명 지음, 은행나무, 2021년 4월
이제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멋진 여름휴가를 계획했다. ‘휴가’는 정말 소중하고 1년 중 가장 큰 이벤트였다. 계획이 산산조각 난 건 다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500명이 넘어서면서였다.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시간이기에 그래도 멋지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이전에는 제주도 같은 국내 여행을 계획했다면 이젠 국내 여행에서 호캉스로, 호캉스에서 캠핑, 캠핑에서 집으로 규모가 점점 작아지면서 혼자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무언가로 바뀌었다. 열심히 개인 방역을 하고 일을 했던,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나에게 미안하기 때문에 더 잘 보내고 싶다.

계획했던 것들에 대한 부재보다 사람에 대한 부재는 남아 있는 사람을 힘겹게 한다. 직접 경험해본 게 아니기에 그 고통에 온전히 동감하긴 어렵지만, 어렴풋한 마음만 이해할 뿐이다. 특히나 내가 의지했던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건 나에게 어느 한 부분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아닐까. 그것이 내 생에 완벽한 날 일어난다면 정말 끔직한 악몽일 수 있다.

<부서진 여름>은 동명의 TV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등으로 화제가 된 소설가 이정명의 신작이다. 이번 작품은 전자책 독서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 연재하면서 책으로 출간됐다. 등장인물별로 나눠진 챕터에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치밀한 복선, 예상을 뒤엎는 반전과 분명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현실감이 돋보인다.

소설은 주인공인 미술가 이한조가 사람들에게 각인된 완벽한 날로 시작한다. 그는 아내 해리의 내조 덕분에 미술 시장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한조와 해리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화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해질녘에는 강둑을 걷는, 단조롭지만 누가 봐도 행복한 부부였다. 그렇게 여름 축하파티를 연 다음 날, 아내가 쓴 40여 쪽의 <나에 관한 너의 비밀>로 인해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조와 해리가 과거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었던 해리의 언니, 지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부터 소설은 부서진 두 집안을 보여준다. 사랑과 증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살아남은, 그날에 머물러 있는 이들의 행적을 쫓는다.

독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누가 지수를 죽였는가’에 몰입하게 한다. 그녀의 죽음에는 “애도 되지 못한 죽음, 파묻힌 진실, 뒤얽힌 이해관계와 자기애, 감춰진 위선과 죄”(258쪽)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지수의 죽음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활용해 등장인물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고구마 100만 개쯤 먹고 사이다를 들이킬 즈음 다시 등장하는 복선들은 소설이 나에게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가”라고 묻기도 한다.

해리가 작성한 소설은 한조에게 “부끄럽고 부도덕한 과거를 대면할 용기가 없음을. 지금까지 미루어 왔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것을”(25쪽) 알려주는 도구였다. 소설 말미에 해리와 한조가 만나 대화하는 장면은 왜곡된 사실이 두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사실과 마주하면서 두 사람이 또 어떤 거짓말을 하게 될지 긴장에 긴장을 더한다.

해리의 복수는 사랑에서 시작한다. 해리와 지수가 살았던 화려한 하워드 주택과 한조가 살았던 초라한 멜컴 주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었다. 한조와 그의 형 수인, 그리고 아버지 진만은 그들이 하워드 주택의 관리인임을, 두 집안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논리에 따라 경계를 잘 지켜야 함을 재차 강조했다.

그런데 한조가 지수를, 지수가 수인을, 수인은 제3의 다른 인물을 마음에 품으면서 경계가 깨져버린다. 지수가 죽던 날, 해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수 뒤를 쫓는 한 남자였다. 범인의 얼굴이 기억나진 않지만, 진만이 지목되면서 의심이 시작된다. 지수를 동경하던 해리는 복수를 해야 했다. 자신이 본 것과 진만 사이에 아무 연관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린 해리는 함부로 언니의 물건을 만지고 돌려주지 않은 경찰과 여론이 좋지 않아 빠르게 수사를 마무리한 것 모두 성에 차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로 다시 여행을 하며, 해리는 “거짓과 비밀이 뚜렷해”(273쪽)졌다고 믿었다. 후에 해리는 ‘수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한조는 해리의 소설을 통해 ‘사랑’을 의심한다.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그림, <오필리아: 여름> 속 여인이 지수였음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머물러 있었음을 직감했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햄릿>에 등장하는 비극의 여주인공 오필리아는 ‘버림받은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비극 속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한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년)의 작품을 비롯해 수없이 재창조 되는 오필리아. 한조가 <오필리아: 여름>으로 재현하는 것 또한 자기에 대한 사랑 혹은 지수를 향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하워드 주택은 사랑과 복수, 착각과 오해로 채워졌다. 삶이라는 게 하워드 주택처럼 착각과 오해로 채워졌는지도 모른다. 착각과 오해는 고통을 부르기도 하지만 이로 인한 거짓은 오래갈 수 없다. 거짓말은 지금 당장의 불행을 모면하기 위해 만들기도 하지만,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기도 한다. 코로나19도 ‘이 시기만 잘 견디면’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가 지속될수록 지치기만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이런 미스터리 스릴러에 도전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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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서윤 독서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