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윤한

삶을 온전히 지탱하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숙면이다. ‘슬리핑 사이언스’ 프로젝트로 불면증과 수면장애를 겪는 모든 사람들을 보듬어줄, 포근한 윤한의 선율.
[Interview] "잠 못 드는 이들 위해 '수면음악' 디자인했죠"
누구나 한번쯤, 잠들지 못하는 긴 밤을 보낸다. 요즘 같은 때는 열대야에 몸을 뒤척일 수도 있고, ‘월요병’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의 약 30%를 차지하는 수면은 건강과 일상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다. 유산을 겪은 아내의 불면증을 치료하고 싶었던 피아니스트 윤한이 ‘슬리핑 사이언스’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잠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깨닫았기 때문이다. 유려한 피아노 선율로 감동을 선사했던 그가 ‘숙면’이라는 기능에 충실한,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음악으로 돌아왔다.

한경 머니와는 세 번째 만남입니다.
“2019년 ‘유러피안 판타지’ 발매로 인터뷰했었죠. 그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공연이 취소되는 등 안타까운 상황들이 많았어요. 그래도 간간이 공연도 했고, 다시 회복되는 때를 준비해서 나름 열심히 곡도 쓰고 연습도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이가 태어나서 막 돌을 지나 아장아장 걷고 있고, 최근에는 1인 기획사를 설립해 홀로서기를 하는 중입니다.”

수면 유도 앨범을 내셨다고요.
“정확히는 ‘수면 음악 프로젝트’라고 하고 싶어요. 이 프로젝트의 타이틀은 ‘슬리핑 사이언스(Sleeping Science)’인데, 10곡씩 구성한 세 가지 시리즈로 구성되죠. 지난 7월 15일에는 ‘더 슬립(THE SLEEP)’이라는 첫 번째 시리즈가 발매됐어요. 8월에는 ‘더 드림(THE DREAM)’, 9월에는 ‘더 타임(THE TIME)’이 발매될 예정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계기가 있나요.
“2017년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아내가 임신을 했어요. 이듬해 9월 출산 예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아이가 잘못된 이후로 아내가 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수면에 도움이 되는 건 다 해본 것 같아요. 그래도 차도가 없으니 제가 잘할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자고 결심했죠. 처음엔 편안한 음악을 연주해줬는데,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음악이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지 궁금했고 심도 있게 연구를 시작한 거죠.”
[Interview] "잠 못 드는 이들 위해 '수면음악' 디자인했죠"
개인적으로 잠을 잘 자는 편인가요.
“저는 잘 자는 편이에요. 물론 가끔 다음 날 중요한 일이 있거나 아니면 생각이 많아지는 날에는 쉽게 잠들진 못하죠.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슬리핑 사이언스’가 제게도 굉장한 효과가 있었어요. 제가 작곡하고 연주한 곡임에도 불구하고요.(웃음) 딱히 불면증이 없어서 잘 듣진 않는데, 안마의자에 앉아 내장된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 놓으면 5분 만에 잠들더라고요.”

현대인들이 수면장애를 많이 겪다 보니 자율감각 쾌락반응(ASMR)과 수면 유도 음악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이들과 차별점이 있을까요.
“ASMR, 백색소음 혹은 클래식, 뉴에이지 음악이 릴랙스 효과가 있다는 가설은 많지만, 이론적인 근거는 부족한 편입니다. 저는 음악과 수면의 관계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수면은 다양한 학문과 연계돼 있거든요. 보통 신경과에서 다루긴 하지만, 잠자는 자세 때문에 정형외과와도 관련돼 있고, 정신과와 심리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연구를 하다 보니, 그 관계성이 점차 보이더라고요. 음악의 특정한 조성이나 형식, 박자와 같은 요소들이 잠잘 때 뇌에서 나오는 델타파나, 세로토닌 및 멜라토닌 분비에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수면을 위한 음악을 디자인한 것이죠.”

어떤 분들을 대상으로 연구하셨나요.
“첫 시작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불면증을 겪었던 제 아내였고, 점차 주변 지인들을 상대로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최대한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군을 대상으로 연구해보고 싶었어요. 기업 총수부터 일반 회사원, 운동선수, 셰프, 소믈리에, 음악가, 대학병원 교수 등 인맥을 활용했죠. 각자의 수면 패턴 정보와 음악 취향을 반영해서 개별 맞춤형 음악을 보냈는데, 98% 정도가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이 중에서 몇 가지를 추려서 모은 것이 ‘더 슬립’이에요.”
[Interview] "잠 못 드는 이들 위해 '수면음악' 디자인했죠"
그럼 비스포크 형식의 맞춤형 수면 음악도 가능하겠네요.
“‘슬리핑 사이언스’ 프로젝트를 제 개인 인스타그램에 처음 공개했을 때, 저와 아내의 사연도 함께 올리며 댓글 이벤트를 진행했어요. 잠을 못 이루는 분들이 각자의 사연을 댓글로 달아주면, 2명을 선정해서 개별 맞춤형 음악을 만들어드릴 예정이에요. 첫 시작이 제 아내의 연령과 수면 패턴, 습관, 음악 취향 등을 반영해 설계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비스포크 형식이 더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개인에게 맞춘 수면 음악 서비스 사업도 구상 중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잠에 잘 드는 편인데, 수면의 질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슬리핑 사이언스’가 수면의 질 향상에도 도움이 되나요.
“이번 음악은 감상용으로 만든 건 아니에요. 굳이 정의하자면 치료를 목적으로 만든, 잘 짜인 음악이라 할 수 있죠. 처음 제 곡을 접했을 때, 의아할 수도 있어요. 계속 같은 음만 나오거나 지루할 정도로 같은 패턴이 반복되거든요. 음악이 무의식중에 파고들어 잠에 들게만 하면 되니까요. 실제로 제 곡이 대학병원에서 수면장애를 겪는 분들에게 처방되고 있고, 환자들을 대상으로 데이터를 수집하는 중입니다. 1년 후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잠자는 동안 심박수나 호흡 등을 측정하는 수면 유도 검사를 통해 더 과학적인 입증이 가능하겠죠.”
[Interview] "잠 못 드는 이들 위해 '수면음악' 디자인했죠"
음악을 듣는 법도 따로 있을 것 같아요.
“지인들에게 곡을 드릴 때, 청취설명서도 같이 보냈어요. 이어폰과 같은 귀에 이물감을 유발하는 장치는 배제해야 해요. 볼륨도 중요합니다. 백색소음도 없는 엄청 조용한 곳이라면 가장 작은 볼륨을 추천해요. 그 후에 잠을 청하는 거죠. 단, 25분을 넘기면 안 돼요. 신경과 교수에 따르면, 억지로 잠들려고 계속 뒤척이면 몸이 이 패턴을 기억해서 만성적인 불면증으로 이어진다고 하더라고요. 25분이 지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마시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등 리프레시를 하고 다시 잠을 청해야 해요.”

마지막으로 잠 못 드는 이들을 위해 한마디 해주세요.
“의외로 불면증은 주변에 흔해요.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피곤한 사람들만 수면장애를 겪는 줄 알았는데, 제 부모님, 그리고 제 아이를 비롯해 다양한 연령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잠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렇게 흔한 현상이니, 자신이 불면증이라는 사실에 압박감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으면 한 번씩 기운을 전환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으면 해요. 저의 ‘슬리핑 사이언스’와 함께요. 많은 사람들이 이 경험으로 인해 숙면을 취한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글 이동찬 기자 | 사진 변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