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진 서강대 교수·<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 저자
“버리다 보면 삶이 가벼워지고, 인생에 중심이 생깁니다. 사람은 항상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이크로파 물리학계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꼽히는 학자인 동시에 끊이지 않는 관심사로 수많은 수식어를 갖고 있는 이기진 서강대 교수. 본업인 물리학 외에도 요리, 그림, 글, 컬렉션 등 다양한 취미를 추구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가수 씨엘(CL, 본명 이채린) 아빠, 그림 그리는 물리학자, 진기한 물건을 모으는 컬렉터 등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를 수식하는 단어는 끝이 없다. 여기에 조만간 영화배우라는 수식어도 하나 더 추가될 예정이다. 이 교수는 “연구가 마음처럼 되지 않고 삐끗거리면 그것만큼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다”면서 자신의 본업이 어디까지나 ‘물리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본캐(본캐릭터)와 부캐(부캐릭터, 또 다른 자아) 사이에서 행복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파리지엥 물리학자’ 이 교수를 만나봤다.최근 책 <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를 출간하셨습니다. 원고 작업 기간은 얼마나 걸리셨나요.
“3~4년에 걸쳐서 조금씩 썼어요. 처음부터 마감일을 정해두고 쓴 책이 아니다 보니, 여러 감정과 이야기가 다양하게 들어간 책이 나온 것 같습니다. 특히 즐거울 때마다 글을 썼어요. 원고 마감일이 정해진 칼럼을 쓰게 되면 억지로 짜내서 쓰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책을 쓸 때만큼은 그런 고통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원하는 시간에 쓰다 보니, 행복하게 썼다는 느낌이 들어요. 책을 보는 분들도 부담 없는 마음으로 읽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이번 책에는 파리와 요리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이 담겼는데, 교수님에게 요리는 어떤 의미인가요.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매개체가 요리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치우는 과정까지가 하나의 ‘멋’인 것 같아요. 서로가 마치 연극 무대를 꾸미는 것처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자리’를 요리가 만들어줍니다. 저는 레스토랑에 가서 완성된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요리를 완성하는 걸 선호하죠. 그과정에 즐거움이 있거든요. 요리를 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향신료를 자랑하기도 하고, 서로의 요리 지식을 나누며 아는 체를 하는 것도 재밌어요.”
딸들과 서로 요리를 해주는 에피소드가 눈에 띄던데, 평소 가족끼리 자주 해먹는 요리가 있나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채린(씨엘)이 집에 방문해 파스타를 많이 해주죠. 제가 가장 잘하는 게 파스타예요. 특히 볼로네제는 제가 외국 친구로부터 정통으로 배웠어요. 이탈리아 볼로냐에 가서 직접 먹어보기도 했고요. 그것만큼은 자신있게 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정작 딸들은 요즘 많이 바쁘다 보니 주로 배달 음식을 시켜먹더라고요.(웃음)”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도 교수님이 직접 그리셨던데요. 그림에는 어떤 매력을 느끼셨나요.
“글을 쓸 때는 손과 머리가 움직이지만, 그림은 마음이 움직여야 해요. 자신이 그리고 싶은 방향대로 마음껏 그리면 되는 거니까요. 저는 정식 화가도 아니고, 그저 즐거워서 그릴 뿐이라 아무 부담이 없다는 점이 좋습니다. 잘 그려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림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보기 나름이니까요.”
요리, 그림, 글, 컬렉션 등 다양한 취미를 갖고 계신데요. 그중 가장 잘하고 싶은 부캐는 무엇인가요.
“요즘 느끼는 것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거예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글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거든요. 그림은 즐거워서 그렸고, 물리학은 직업이니까 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글에 대해서는 항상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잘 못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이 있다면요.
“하나 있습니다. 사실 제가 <글로리 데이(가제)>라는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게 됐어요. 서울 서촌에서 일어나는 러브 스토리를 담은 영화인데요. 지금 콘티 작업이 끝났고, 출연 계약을 맺은 상태예요. 제 역할은 갤러리 주인으로, 연극배우 서지숙 씨의 상대역입니다. 제 둘째 딸 친구 중에 연극영화과 출신이 있는데요. 지금은 그 친구에게 연기 수업을 받고 있어요. 제가 연기는 처음이다 보니, 우선 대사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3명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만나 꾸준히 연습하고 있죠. 원래는 8월 15일부터 영화 촬영이 시작됐어야 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때문에 촬영 일정이 좀 미뤄졌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영화감독과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출연하게 됐죠. 이 영화 출연을 계기로 단역 배우로라도 활동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이 영화를 발판으로 다른 작품에서 불러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딸 씨엘 씨와 서로의 작업물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편인가요.
“저희는 서로의 작업물에 대해 어떤 코멘트도 안 해줍니다. 딸의 새 앨범이 나오면 축하한다는 이야기 정도만 건네지, 그 외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안 합니다. ‘이 노래 좋더라’ 정도의 이야기는 하지만, 그런 얘기도 사실 빈말이잖아요. 제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기도 하고, 잔소리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저 딸이 행복하게 살면 저도 좋은 거고, 자기 나름대로의 삶이 있는 거니까 존중하는 거예요. 본인의 앞길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본인이에요.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책의 말미에 “파리에서 살아본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내가 간직하는 가장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프랑스 파리에서 보냈던 젊은 날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값어치가 생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빛이 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억이라, 그런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게 제 삶의 굉장한 행복이죠. 남들에게 디테일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때 파리에 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무모하게 도전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큰 가치로 남게 됐거든요. 당시 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파리로 떠나겠다는 제 결정을 반대했거든요.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해야 할 나이였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기였어요. 심지어 결혼을 한 뒤에 전세금을 빼서 파리로 떠나겠다고 한 것이었으니, 어른들 입장에서는 ‘얘가 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나’라는 걱정을 하셨겠죠.”
파리에서의 젊은 날이 불안정하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불안정했죠. 월급을 많이 받는 직장에 몸을 담았던 것도 아니고, 당시 채린이는 불과 한 살이었거든요. 서울로 돌아간다고 해도 머물 아파트가 없었습니다. 그저 불확실한 미래만 있었던 거죠. 파리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월급이 나오긴 했지만 많이 불안정했어요. 그래도 저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돈은 좀 못 벌고 불안하면 어때요. 더 잘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때로 돌아가도 매일 걱정만 하면서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는 하겠죠. 뭐가 되든 되겠죠.”
책에 “인생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뭔가를 버려야 한다”는 내용도 나오던데요. 교수님의 삶에서 가장 크게 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참 어려운 건데요. 중요한 걸 판단하고 버릴 건 버려야 합니다. 중요한 삶의 기술이죠. 욕심부리다 보면 끝이 없잖아요. 분명한 것은 제가 지금도 계속 버리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오늘 하고 싶은 일 8가지 중 6개를 버리고 2개 정도만 남기는 거죠. 그렇게 정했다면, 주변에서 술 마시러 가자고 제의해도 절대 안 갑니다. 저만의 길에서 안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놀고 싶어도 일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하는 거고요. 버리다 보면 삶이 가벼워지고, 인생에 중심이 생깁니다. 사람은 항상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딘가에 집착하다 보면 무거워지잖아요. 사람들은 이런 제 이야기를 ‘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전 그게 좋습니다. 집착에는 끝이 없어요. 딸들의 삶에 잔소리하지 않는 것도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물리학자 이기진 교수님도 궁금한데요. 젊은 시절부터 연구에 대한 집념도 상당하셨던 것 같습니다.
“연구는 제 직업이에요. 월급을 받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해요. 연구가 마음처럼 되지 않고 삐끗거리면 그것만큼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더라고요. 만약 ‘너 다른 사람보다 논문이 잘 안 나온다’는 얘기가 나오면, 저는 다른 데 가야 합니다. 제가 가장 잘 소화해야 하는 직업적인 영역만큼은 제대로 유지해야 하는 거죠. 그 영역이 삐끗하면 모든 것이 망가져요. 정체성, 자존감 등 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달려 있습니다. 사실 그림은 안 그려도 되고, 다른 취미도 안 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어요. 하지만 논문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밤잠 못 자고 항상 생각하는 게 바로 저의 본업이에요. 스트레스가 없는 본업은 없는 것 같아요. 보통 ‘업을 즐기라’는 이야기도 하는데, 죽어라고 해야 하는 게 자신의 업이라고 생각해요.”
물리학자라는 진로는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첫 선택은 얼떨결에 했죠. 제 아버지가 물리학자였던 영향도 좀 있었고요. 제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격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고, 물건을 파는 장사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달리 할 수 있는 게 물리학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물리학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학자의 모습으로 남고 싶으신가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쭉 가고 싶어요. 앞으로 더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은퇴할 때까지 열심히 일해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몇 년 안에 잘된다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하다 보면 잘될 수도 있는 거죠. 단기적인 목표는 지금 연구하고 있는 비채혈 혈당측정 장치 개발에 성공하는 거예요.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글 정초원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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