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라스트 세션>으로 돌아온 두 노배우의 품격

인생은 유한하고, 예술은 영원하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배우로서 신구, 오영수의 삶을 바라보면 유한할 그들의 인생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의 연기를 향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게 진행 중이고,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연극 <라스트 세션>으로 돌아온 두 배우의 아름다운 연기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배우 신구·오영수 “연극은 인생, 老가 필요한 이유죠”
연극, 뮤지컬 등 공연예술 역시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이미 아시아를 넘어 이제는 미국, 유럽에서도 K-공연의 부상이 적잖이 소개되는 양상이다. K-공연예술이 질적, 양적 성장을 한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꼭 하나를 꼽아보라면 역시 배우들의 힘이 아닐까 싶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을 쓴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은 빠르게 성장한 한국 뮤지컬 시장의 비결에 대해 ‘한국 뮤지컬 배우들의 가창력’을 지목한 바 있고, 영화, 드라마 속 한국 배우들의 연기력을 극찬한 외신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우리나라 배우들이 K-문화의 한 장르이자, 유산이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그 중축에 배우 신구와 오영수가 있다.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두 사람의 인생에서 연기는 삶 그 자체였다. 소위 ‘화려하고, 주목받는’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두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더 많이 인식돼 왔고, 꽤 오래전부터 ‘노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 본인은 배우로서 어떠한 ‘경계’나 ‘한계’를 두지 않고, 그저 배우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연구하고, 또 사랑해 왔다.

특히, 연극무대는 두 사람 연기 인생의 근원이자 정수와도 같은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연극 <라스트 섹션>의 프로이트 역할로 연극무대에 돌아온 두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노배우 특유의 느긋한 여유로움과 함께 ‘후회 없이 더 잘 해내겠다’는 어떠한 결연함마저 묻어났다.

연극 <라스트 세션>은 미국의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Mark St. Germain)이 아맨드 M. 니콜라이(Armand M. Nicholi, Jr.)의 저서 <루이스 vs 프로이트(THE QUESTION OF GOD)>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으로,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을 배경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가 직접 만나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에 기반한 2인극이다.

작가는 실제로는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을 무대 위로 불러내 신과 종교에 대한 도발적인 토론을 야기한다. 20세기 무신론의 시금석으로 불리는 ‘프로이트’와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루이스’는 신에 대한 물음에서 나아가 삶의 의미와 죽음, 인간의 욕망과 고통에 대해 한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고도 재치 있는 논변을 쏟아낸다.

작품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2년간 총 775회의 롱런 공연을 기록, 2011년 오프브로드웨이 얼라이언스 최우수 신작연극상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은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20년 파크컴퍼니가 한국 초연을 선보였다. 이번 공연에는 신구·오영수가 ‘프로이트’ 역을, 이상윤·전박찬이 ‘루이스’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무엇보다 연극 <라스트 세션>은 대사 의 분량이 많을뿐더러, 다루는 언어들이 전문적이고 생소해서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는 작품이다.

실제로 오경택 연출도 이 점을 언급하며 “작품이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 또 번역극이라는 점에서 원래의 뜻이 그대로 전달될지 우려가 있었다”며 “지난 시즌에서 배우들과 함께 공부하고 분석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최대한 관객들에게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관객들과 소통을 하면 이야기가 잘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고,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고 의미있게 봐주셔서 용기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처럼 심오하고, 지적 유희가 넘치는 무대 위 두 노배우가 펼치는 연기의 품격은 어떨까. 2021년 12월 8일 서울 대학로에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그들의 말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인터뷰]배우 신구·오영수 “연극은 인생, 老가 필요한 이유죠”
신구 배우님은 2010년 초연부터 공연 시작하기 전에 이 작품은 “내 생의 기념비적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하셨던데, 어떤 의미일까요.
신구 글쎄요. 작품이 원체 무겁고 부담이 커서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초연에는) 미진하고,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연 제안이 왔을 때 그때의 아쉬운 점을 보완하자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극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은 작품이지만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재밌고, 쉽게 관극할 수 있을까’ 그 점에 방점을 두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극단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온 오영수 선생이 이번에 함께 참여해서 연기가 훨씬 풍성하고 다양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기대해주세요.

오영수 배우님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화제의 중심에 계실 때 이 작품을 제안받으셨는데, 되레 “이런 좋은 작품을 이 시기에 제안해줘서 고맙다”고 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오영수 지금까지 50년 넘게 늘 조용한 모습으로 연기자 생활을 했는데 <오징어 게임>이라는 작품으로 갑자기 제 이름이 여기저기 보이게 됐습니다. 정신적으로 심란해 자제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작품 제안이 와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선택을 잘한 거 같고, 제 나름대로 지금까지 지향한 (연기자로서의) 모습이 변치 않도록 동기를 준 것 같아 뜻 깊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작품이 안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볼 때, 제가 맡게 된 프로이트라는 인물은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지고의 경지를 생각하며 신과 종교의 대립각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로, 어떻게 보면 지구상에서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직시하려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배우의 인생을 걷는 저 역시 언젠가는 어느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해 왔는데, 그 부분이 프로이트와 같은 모습도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하며 연습하고 있습니다. 다만, 2인극으로 대사의 분량이 만만치 않은 데다 대사 내용 자체가 일상용어라기보다는 관념적이고 논리적이어서 헤쳐 나가기 상당히 힘든 부분도 있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이 조금 감퇴된 부분도 있지만 신구 선배님이 이 역을 하셨다길래 용기를 가지고 참여하게 됐습니다. 지금 바람은 (연극의) 결과가 좋았으면 하는 마음이죠.

신구 배우님은 오영수 배우님과 매우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고 지켜본 후배 배우인데, 이번에 <오징어 게임>으로 월드스타가 된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하셨고, 어떤 말씀 나누셨나요.
신구 사실 저는 국립극단 단원으로 오래 있지는 않았어요. 한 3년 정도, 그게 1970년대 초였는데 가끔 객원으로 국립단원 공연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마다 오영수 선생과 같이 공연했었어요. 제가 옆에서 지켜본 오영수 선생은 지금까지 화려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배우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단, 뒤에서 조용하게 자기 몫과 역할을 확실히 해내는 배우였죠. 그런데 이번에 <오징어 게임>에서 세계인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해지셨는데 ‘아, 자기 몫을 충실히 하고 있으면 이런 기회도 오는 구나’ 새삼 느꼈습니다. 상당히 반갑습니다.
[인터뷰]배우 신구·오영수 “연극은 인생, 老가 필요한 이유죠”
오영수 배우님은 앞서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던 찰나에 이 좋은 연극 만났다고 하셨는데 어떤 솔깃한 제안들이 있었는지, 어떻게 물리쳤는지 궁금합니다.
오영수 저도 뭐 갑자기 <오징어 게임>이란 작품을 통해서 존재 자체가 알려지다 보니 갑자기 밀려오는 파도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중심이랄까, 연기자로서 지향하는 어떤 의식의 흐름이 갑자기 혼란스러웠습니다. 정신없이 광고 등 다양한 의뢰가 들어오고, 일각에서는 “왜 연극을 선택했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앞서 말씀드렸듯 이 작품이 제게는 자제력을 가질 계기가 된 것 같고, 제가 지금껏 지향하는 것들이 흐트러지지 않게 존재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최근 두 분 외에도 이순재, 강부자 등 원로 배우들이 연극무대에 오르는 횟수가 늘었습니다. 이렇게 원로 배우들이 활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구 사실 저는 사람에게 나이란 거는 사람들이 그저 편하게 살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제도라고 생각하는데, 어제도 해가 뜨고, 내일도 해가 뜨듯이 (시간이 지난다고) 달라질 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이를 먹었으니 켜켜이 쌓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 제 나이가 몇 살인지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단,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할 때 필요한 건 건강이라 생각해요. 또 직업에 따라서는 기억력도 필요해요. 특히, 우리 직업은 기억력이 쇠퇴하면 이 일을 할 수 없거든요. 제 나름대로 기억을 활성화는 방법이 있으면 찾아서 해보는 등 노력을 하죠. 그런 게 장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무슨 일을 하시든 간에 건강을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오영수 근래에 연극의 흐름이랄까요. 사실 연극뿐 아니라 영화나 TV 드라마도 마찬가진데, 대다수 극이 인생은 빠지고, 사건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가 되다 보니 작품마다 ‘노(老)’가 빠졌어요. 인생을 이야기할 때 노가 필요한 데 말이죠. 그래서 나이 많은 분들이 무대에 자주 보이지 않은 상태로 이어진 게 좀 아쉬웠어요. 그나마 최근 노배우들이 참여하는 극이 많아지는 것은 인생을 말하는 연극이 많다는 것이라서 긍정적으로 봅니다. 우리나라도 외국처럼 나이 많은 연기자들이 더 많이 활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배우 신구·오영수 “연극은 인생, 老가 필요한 이유죠”
두 분 다 젊은 세대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계신데, 세대를 초월한 인기비결을 뭐라고 생각하시고,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연극 속 루이스 역할인 이상윤·전박찬 배우와 호흡은 어떠신지요.
신구 제가 철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이를 잊고 지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죠. 제가 나이가 많으니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배우들은 함께 작업하는 동료라고 생각해요. 나와 똑같은. 이상윤 배우와는 초연 때부터 함께해서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전박찬 배우는 이번에 새로 만났는데, 아주 기대돼요. 뭔가 보여줄 거 같습니다.

오영수 비결이 따로 있지는 않아요. 그냥 잘 듣는 편입니다. 젊은 세대와의 작업은 저에게 좋은 에너지를 줍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으면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다 보니 지금까지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윤 배우는 일단 키가 커서인지 큰 키에 제압되는 면이 있고, 전박찬 배우는 단단함이 있어요. 무대에서 만날 두 명의 루이스 모두 기대가 됩니다.

실제로 두 분은 프로이트와 루이스처럼 자신과 상대가 의견이 갈릴 때,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하시는지도 궁금해요.
신구 특별히 제 의견을 내세우는 편이 아니라 극복할 만큼의 상황이 겪어본 적이 없네요. 하지만 프로이트의 의견에는 아주 공감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루이스와 대립되는 논리가 아주 흥미로워요.
[인터뷰]배우 신구·오영수 “연극은 인생, 老가 필요한 이유죠”
오영수 상대가 왜 그런 생각을, 말을 하는지 먼저 생각해봅니다. 역지사지로 보면 간극을 줄여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해요.

두 분이 굉장히 많은 연기를 하셨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요.
오영수 저는 40대 때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을 고집했는데 결과가 아주 좋지 못했어요. 그게 응어리가 져서 쭉 지내왔는데 그게 또 기력을 쌓는 계기가 된 것도 같습니다. 지금 이 나이쯤에 다시 한 번 그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네요.

신구 다시 하고 싶은 작품을 뽑기보다는 과거 김아라 씨가 연출했던 <사로잡힌 영혼>이란 작품이 있는데, 유독 그 연극이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생생하고요.

요즘에 이런저런 볼거리들 많다 보니 연극을 안 보는 추세입니다. 그럼에도 요즘 시대에 연극을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두 분에게 연극은 어떤 의미인가요.
신구 아마 연극을 보러 오시는 관객 여러분은 연극 안에서 뭔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지침이나 방향이나 조건, 이런 것들을 좀 구체적으로 접해보자고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나이에도 연극에 집착하는 이유는 제가 처음 배우 생활을 시작할 때 연극이 그 시작이었고, 다른 매체에서 활동했지만 제 안의 DNA에는 연극이 도사리기에 그걸 떨치지 못한 채 줄곧 연극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극과 같이 생활하고자 하는데 제게 연극은 그런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는 지침서랄까요. 역사가 있는 한 아마 무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오영수 연극은 제 삶의 목적이자 의미입니다. 또한 연극은 보고 나면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잘 때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연극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관객과 함께 나누고 싶고, 관객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새해 덕담 및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신구 새해에는 모두가 일상 회복을 해서 생기를 되찾았으면 합니다.

오영수 우리 모두 하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글 김수정 기자 | 사진 김기남 기자·파크 컴퍼니 제공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