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스리랑카, 때묻지 않은 꿈의 여행지
경제위기에 봉착한 스리랑카. 코로나19로 스리랑카 국내총생산(GDP)의 12%를 차지하던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고,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최근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그 원인이라 한다. 학창 시절, 내게 스리랑카는 ‘행복한 나라의 상징’이었다. 가난하지만 때 묻지 않은 자연과 만족하는 삶이 있는 인도양의 섬나라는 꼭 가보리라 다짐하던 꿈의 여행지였다.
글 사진 김민수 여행작가
다시 스리랑카, 때묻지 않은 꿈의 여행지
시간이 흐른 후, 변치 않는 설렘으로 만나본 스리랑카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8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자연유산을 보유한 '인도양의 진주', 마주치는 곳곳에서 태양처럼 빛나던 스리랑카인들의 환한 미소가 불현듯 그리워졌다.
우리나라 3분의 2 정도의 면적을 가진 스리랑카에는 2200만 명의 사람이 산다. 인구의 70%가 불교 신도지만 힌두교와 이슬람, 기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다민족 국가다. 이런 다양성의 정신은 국기에 여실히 담겨 있는데, 오렌지색은 타밀족, 초록은 무슬림, 갈색은 버거족, 사자는 싱할라족, 그리고 보리수 잎은 불교를 뜻한다.
적도와 인접한 스리랑카는 열대성 몬순기후로 대부분 날이 덥고 습하다. 물론 지역과 고도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비교적 건기에 속하는 12월에서 3월 사이가 여행하기에 좋다.
다시 스리랑카, 때묻지 않은 꿈의 여행지
공존의 섬, 슬레이브아일랜드
콜롬보는 스리랑카의 최대 도시이자 여행의 시작점이다. 또한 나라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살고 있는 상업과 금융, 관광의 중심지다. 이곳 콜롬보에서 절대 빠뜨리지 말아야 할 명소가 바로 슬레이브아일랜드(Slave Island)다.
스리랑카는 16세기 초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차례대로 받아 왔다. 슬레이브아일랜드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의해 강제 이주해 온 아프리카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이다. 거리에는 전통 가옥과 유럽풍의 낡은 건물이 기막힌 조합으로 남아 있다. 폐르시아, 네덜란드의 건축물이 나란한 도로 뒤로는 모스크(이슬람사원)와 힌두교사원이 서 있고 사찰과 교회 또한 한 블록에서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슬레이브아일랜드는 스리랑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싱할라족을 포함해 타밀족, 스리랑카 말레이족과 기타 소수민족이 공동체를 이루며 그들의 언어가 고루 사용되는 대표적 다문화 지역으로 존재한다.
슬레이브아일랜드에는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오랜 기차역이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아치, 목공 장식, 금속 설치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는 차 무역의 한 축으로 번성했지만, 현재는 주로 출퇴근 기차가 다닌다.
4~5시가 되면 일을 마친 노동자들 무리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맘때 할랄푸드점 앞에 긴 줄이 늘어지는가 하면 기차역의 플랫폼도 인파로 채워져 인종적·종교적 긴장감조차 없는 ‘공존의 섬’을 만들어낸다.
다시 스리랑카, 때묻지 않은 꿈의 여행지
세계 8대 불가사의, 시기리야
5세기, 아버지 다투세나왕을 죽이고 왕이 된 카시야퍄는 동생의 보복이 두려워 거대한 바위 위에 요새를 구축하고 20년간 머물렀다. 밀림 속에 우뚝 솟아있는 높이 370m, 넓이 1만3884.2m2의 화강암 덩어리가 시기리야(Sigiriya)다.
정갈한 연못과 정원을 지나고 돌계단에 이어 바위에 간당하게 붙은 철계단을 따라 오르면 ‘거울의 벽(mirror wall)'이라 불리는 암벽에서 여인의 자태를 소재로 한 20여 점의 프레스코화를 만나게 된다. 욕망과 두려움의 미묘한 조합이 탄생시킨 1500년 전의 그림은 스리랑카의 가장 오래된 회화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철계단이 잠시 멈춰 서는 중간 테라스에는 사자의 커다란 두 앞발이 놓여 있다. '사자의 문', 비로소 요새로 가는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에 매달려 내려다보는 열대 정글의 경치는 아찔한 만큼 경이적이다. 시선의 끝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멀고 아득하다.
시기리야 일대는 이미 기원전 3세기부터 승려들이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요새로 변모한 정상에는 왕국과 정원, 수조, 그리고 부속 건물들이 세워졌다. 카시야퍄왕은 결국 인도에서 돌아온 동생 목갈라나에게 쫓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시기리야는 불교 사원으로 환원됐다가 역사의 이면으로 묻히게 된다. 지금도 정상부에는 저수지와 건축물, 그리고 왕궁터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인에 의해 발굴된 시기리아는 1982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다시 스리랑카, 때묻지 않은 꿈의 여행지
인도양의 영원한 보석, 갈레
스리랑카의 최남단 항구 도시다. 오래전 갈레(Galle)는 페르시아인, 아랍인,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중국인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던 남부 아시아의 최대 무역항이었다.
16세기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된 후 그들의 건축술로 요새화 됐으며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들어 온 이후에는 남부 아시아의 전략기지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스리랑카 현지인들은 갈레를 ‘골’이라 발음한다. 식민 시대의 역사가 남긴 거리, 성곽, 등대, 교회, 성당, 교도소, 우체국, 옛 청사들은 세계유산의 소중한 자원이 됐다.
단단히 쌓아 올린 요새는 아름다운 도시를 품고 있지만, 또 다른 한쪽으로는 하늘만큼이나 드넓은 인도양이 펼쳐져 있다. 관광객들은 플로그록(frogrock)으로 불리는 측벽 위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레게머리의 현지인들은 서핑과 다이빙을 즐긴다.
갈레의 거리는 박물관이자 갤러리다. 독특한 색감과 디자인을 가진 카페, 식당, 부티크, 기념품 상점 사이로 보석을 가공하는 공방도 있다. 각 나라에서 온 예술가, 작가, 사진가, 디자이너들이 골목을 채워 가는 중이다. 다양한 유적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네덜란드 빈티지라 불리는 낮은 건물들을 따라 격자 패턴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다시 스리랑카, 때묻지 않은 꿈의 여행지
낭만의 정점, 스리랑카 기차여행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 칭송했다. 영국 BBC에 의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50' 중 하나로 선정됐으며, 2019년 론리플래닛은 '방문해야 할 여행지 1위'로 인도양의 섬나라를 꼽았다.
대개의 여행자들은 단지 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스리랑카의 깊은 속살을 들여다보고 기억하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기차는 불편하고 느리지만 그래서 여정은 더욱 낭만적이다. 에어컨이 딸린 1등 칸이나 좌석이 없는 3등 칸의 차창으로도 아름다운 경치는 공평하게 펼쳐진다. 기차는 마을과 초원을 지나고 끝점을 알 수 없는 고원의 녹차밭 사이를 달려간다. 여행객의 일부는 아예 개방된 기차의 문턱에 걸터앉아 반쯤 몸을 내어놓고 바람과 시선의 자유를 만끽한다.
스리랑카 레일웨이는 고산지대에서 콜롬보까지의 차와 커피를 수송하기 위해 19세기 영국 식민 시대에 건설됐다. 그래서 기차는 '리틀 잉글랜드’라 불리는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 엘라(Ella) 등의 홍차 도시 등을 지난다. 그중에서도 최후의 수도 캔디에서 스리랑카 최대의 홍차 산지인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까지 가는 여정은 가장 인기가 있다. 시속 23km로 달리는 기차 덕분에 경유하는 역의 모습과 손 흔드는 사람들의 얼굴까지 또렷하게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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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루왈라와 벤토타
베루왈라(Beruwala)는 스리랑카 최초의 무슬림 정착지다. 현재는 해변을 따라 고급 리조트와 호텔이 늘어서 있는 스리랑카 서부 황금 해안의 중심 휴양지다. 벤토타(Bentota)는 베루왈라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스리랑카인들의 꾸밈없는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열대 과일과 생선이 풍요로운 시장을 돌아보거나 철길을 따라 산책하는 여유를 즐길 수 있다. 강물 위를 달리며 진기한 수상동물을 만나고 원시의 맹글로브 숲을 탐험하는 리버사파리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체험 프로그램이다.

히카두아
콜롬보에서 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갈레를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서 유난히 아름다운 해변을 만나게 된다. 해양스포츠의 천국이라 불리는 히카두아(Hikkaduwa)다. 이곳에는 최고급에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까지 다양한 숙박시설이 즐비하다. 아침과 저녁에는 인근 바다에서 잡은 생선로이 거리에 번개시장이 생겨나기도 한다.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노을이 아름다운 이곳에 집을 얻고 한 달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글 사진 김민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