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머니 게임의 환경도 가히 ‘혁명적’이라 불릴 만큼 급변함에 따라 자산가격이 오르는 이면에는 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따라다녔다. 가장 우려됐던 변화는 각국이 국가 차원에서 글로벌 머니 게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군사력에 바탕을 둔 두 차례 세계대전에 이어 돈을 무기로 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예상까지 나왔다.
머니 게임의 원동력인 국제 자금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왔다. 글로벌 인스티튜트에 따르면 전 세계에 흐르는 자금 규모는 금융위기 이후에는 6조 달러로 그 이전의 2조 달러에 비해 3배로 늘어났으나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10조 달러로 한 단계 더 뛴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자금 규모가 늘어난 것이 종전과 다른 점이다.
문제는 10년 넘게 지속돼 왔던 금융완화 정책의 숙취(hangover) 현상이 지난해 하반기 이후 나타남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이 출구전략 추진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면서 그동안 잠복돼 왔던 각종 리스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점이다. 가장 큰 리스크는 세계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칠 가능성이다. 세계 경제가 당면한 7가지 덫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태생적 한계인 정책 대응이 더 어렵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은 2차 오일쇼크 파장이란 ‘단선형 성격’인 데 반해 이번에는 지정학적 위험, 이상기후, 공급망 훼손, 출구전략, 경제 봉쇄조치 등과 같은 ‘다중 공선형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다중 공선형 스태그플레이션의 특징은 정책 목표에 가장 적합한 정책 수단을 가져가는 틴버겐 정리(Tinbergen’s theorem)로 경제 정책을 추진하더라도 먹히지 않는다. 각국의 출구전략 추진과 함께 빠르게 위축 국면에 들어가고 있는 글로벌 머니 게임이 앞으로 정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가 당면한 7가지 덫(stuck)에서 탈출해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 최대 현안은 ‘인플레 덫’이다. 각국의 물가가 30∼40년 만에 최고 수준이란 건 이제 예사로 보일 정도다. 선진국 국민들은 인플레이션으로 겪는 경제 고통이 하늘을 찌를 태세다. 개도국 국민들은 금융위기 이후 실업 문제로 거세게 불었던 ‘아랍의 봄’이 이번에는 인플레 문제로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최근 인플레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론적 배경이 필요하다. 인플레는 원인별로 비용 상승과 수요 견인으로, 상승 속도에 따라 마일드·캘로핑·하이퍼로, 경기와 관련해 스태그플레이션·슬로플레이션, 정책 의지와 결부돼 리플레이션·디스인플레이션, 그리고 공유 경제와 관련해 데모크라플레이션 등으로 구분된다. 코로나발 인플레가 심각한 것은 같은 통화정책 시차(1∼9년) 내에 모든 가능성이 한꺼번에 거론되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제성(preemptive)’이 생명인 통화정책에서 지난해 4월 이후 ‘쇼크’라 부를 만큼 불거진 인플레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면 지난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물가 목표선인 2%를 무려 4배를 훨씬 웃도는 9.1% 수준까지 급등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둘째, 올해 상반기 미국과 중국 경제 상황을 보면 세계 경제는 ‘저성장의 덫’에 빠지고 있다. 미국 경제는 지난 1분기 성장률이 -1.6%에 이어 2분기 성장률도 -2.1%(애틀랜타 연준 GDP 나우)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6월 Fed는 올해 미국 성장률을 지난해 12월 전망치 4.8%에서 잠재성장률 1.75%보다 낮은 1.7%로 크게 내려 잡았다.
중국 경제 상황은 더하다. 지난해 1분기 18.3%에 달했던 성장률이 올해 1분기에는 4.8%로 급락했다. 상하이를 비롯해 경제 봉쇄조치가 집중됐던 지난 2분기에는 2%에도 미치치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모든 예측기관이 올해 성장률은 목표선인 5.5%는 달성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부존 자원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그 피해가 집중되고 있는 유로 경제는 올해 2분기 성장률이 크게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의 고집으로 아베노믹스를 추진하고 있는 일본 경제도 엔저 효과가 종전만 못하다. 셋째, 경기가 침체되면 각국 중앙은행이 물가 잡기에 나서더라도 다른 정책 목표를 크게 손상시킬 확률이 높아 금리 인상 등을 쉽게 추진하지 못하는 ‘출구전략의 덫’에 빠진다. 특히 인플레 진단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는 Fed는 뒤늦게 금리 인상에 나서고 있지만 또 하나의 목표인 고용을 희생시킬 우려 때문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올해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제이슨 퍼먼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인플레이션율 1%포인트를 잡기 위해서는 실업률이 6%포인트 높아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희생률(sacrifice ratio)’을 제시했다. 한번 높아진 물가는 잡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회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다.
지난해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대로 물가 잡기에만 몰두해 왔던 각국 중앙은행은 경기와 물가, 그리고 금리 간 ‘트릴레마’ 국면에 빠져 제각각 대응하고 있다. 미국과 친미 국가들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반면 중국과 친중 국가들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내리고 있다. 대발산(great divergence)의 시작이다.
넷째, 인플레 안정에 최우선을 둔 각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림에 따라 세계 경제는 ‘빚의 덫’에 빠지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세계 빚은 2007년 113조 달러에서 올해 1분기에는 230조 달러로 2배 이상 급증했다. 세계 경제가 빚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복합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미국 Fed의 제로금리 정책에 따라 빚의 무서움을 모르고 달러 부채를 조달했던 신흥국들이 문제다. 국제 금리가 올라가는 시기에 달러 부채 만기일이 겹치기 때문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신흥국들은 2025년까지 매년 4000억 달러 이상 달러 부채 원리금을 갚아야 한다.
올해 들어 신흥국 위기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 적극 참여국을 중심으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모리스 골드스타인의 위기판단지표로 보면 취약 신흥국 74개국 중 무려 58개국이 금융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온다. 다섯째, 각국은 경기 침체와 인플레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낮아지자 다른 국가에 전가시키기 위해 자국통화 가치를 적극적으로 조절해보지만 ‘환율의 덫’에 빠져 오히려 세계 경제가 당면한 스태그플레이션을 더 미궁에 빠트릴 가능성이 높다. 벌써부터 1930년대와 같은 대공황을 우려하는 시각도 고개를 들고 있다.
각국의 자국통화 정책은 양분화돼 있다. 일본처럼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자국통화를 평가절하시키더라도 ‘마샬-러너 조건’, 즉 외화 표시 수출수요의 가격탄력성과 자국통화 표시 수입수요의 가격탄력성을 합한 것이 ‘1’을 넘지 않아 수출 증대와 경기 부양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해 물가에 시달리는 국가는 자국통화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동일한 목적으로 경쟁국도 평가절상에 뛰어들어 수입물가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반감되고 있다. 오히려 평가절상에 따른 수출 감소분을 보완할 만큼 내수가 확대되지 않아 경기를 더 침체시킬 가능성이 높다.
환율전쟁은 비협조적 게임(nonco- operative game)으로 대표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이다. 특정국의 평가절하 정책은 자국의 수출과 경기상의 어려움을, 평가절상 정책은 인플레를 경쟁국에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최근처럼 세계 경제가 어려울수록 각국은 ‘협조적 게임(cooperative game)’에 임해야 한다. 여섯째. “세계 인구는 20세기 이후 120년 동안 지속돼 온 팽창 시대가 마무리되고 감소 국면에 접어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인구구조 변화가 앞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는 보고서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구절벽의 덫’에 걸린 세계 경제에 대한 경고다.
세계 인구절벽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국가는 중국과 한국이다. 1년 전 “중국 인구가 감소됐다”는 영국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의 보도를 계기로 제기됐던 중국의 인구절벽 논쟁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해 중국의 인구증가율이 0.03%에 그쳐 사실상 정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한국 인구(내국인 기준)도 내년에는 5000만 명 선이 무너질 것으로 예측됐다.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인구가 절대적으로 감소하면 세계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는 대신 인플레이션율이 올라가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 발생한다. 인구절벽의 덫으로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 세계 인구 증가 시기에 누적돼 왔던 디스토피아 문제가 한꺼번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일곱째, 매년 초 스위스 작은 휴양 도시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 2015년부터 단골 메뉴로 다루는 유일한 과제가 세계 경제가 ‘디스토피아(dystopia)의 덫’에 걸린 문제다. 미국도 ‘우리 국민, 우리 미래(our people, our future)’라는 오바마 정부 시절에 제시됐던 미래 어젠다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디스토피아 문제를 거론했다.
1990년대 이후 각국이 디스토피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파급력이 높은 디스토피아로는 △수자원 위기 △기후변화 대응 실패 △생물학적 다양성 손실과 생태계 붕괴 등이 꼽힌다. 식량자원, 수자원, 에너지, 기후변화 등을 미국 국가정보회의(NIC)에서 2030년 가장 중요한 메가트렌드로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우려다.
디스토피아 시대에 있어서는 종전의 규범과 제도보다 정의와 도덕 등과 같은 이른바 행동주의 가치와 기본이 더 중시될 가능성이 높다. 디스토피아, 그 자체가 불확실성을 내포해 위험이 상수항(함수 y=a+bx에서 ‘a’)이 되는 2020년대에 모든 경제주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최고 덕목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머니 게임의 성패는 위험관리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위험관리를 잘하기 위해 돈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특히 최근처럼 글로벌 머니 게임이 복잡하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여건에서 각국의 통화정책 방향이 바뀌는 상황에서는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더 그렇게 해야 한다. 성공한다면 글로벌 머니 게임의 성과가 더 크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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