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석유패권 전쟁 '점입가경'
글로벌 석유패권 전쟁이 뜨겁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 모임인 OPEC플러스(OPEC+) 23개국의 감산 결정에 미국과 주요 7개국(G7) 등 소비자 카르텔의 대결 양상이 점입가경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열사(熱砂)의 나라다. 그런데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사우디가 건설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스마트 도시인 네옴(NEOM) 시티를 2029년 동계 아시안게임 개최지로 선정했다.

네옴 시티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추진하는 미래 도시를 말한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 북서부 홍해 인근 2만6500㎢ 부지(서울 면적의 44배)에 무려 5000억 달러(약 640조 원)를 들여 100% 친환경 도시를 건설해 새로운 발전의 도약으로 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네옴 시티 건설은 석유에 의존해 온 경제를 첨단 제조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비전 2030’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새로운 미래’라는 뜻의 네옴 시티는 길이 170㎞에 달하는 자급자족형 직선도시 ‘더 라인’, 바다 위에 떠 있는 팔각형 첨단 산업 단지 ‘옥사곤’, 대규모 친환경 산악 관광 단지 ‘트로제나’로 구성된다. 1차 완공 목표는 2025년으로 도시에 필요한 주택·항만·철도·에너지 시설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해발 1500∼2600m 고원에 위치한 트로제나는 겨울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사우디는 트로제나에 인공호수, 호텔, 스키, 리조트 등을 건설할 계획이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OPEC와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 모임인 OPEC+ 23개국은 10월 5일 전체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오는 11월부터 석유 생산량을 하루 평균 200만 배럴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하루 생산량(2700만 배럴)을 13.5% 줄이겠다는 것이다. 200만 배럴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2년 만에 가장 큰 감산 폭으로 전 세계 공급량의 2%에 해당한다.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은 “이번 감산은 서방의 금리 인상과 세계 경제의 경기 침체 조짐에 따른 선제적 대응”이라고 밝혔다. 수하일 알 마즈루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에너지 장관도 “OPEC+의 이번 결정은 2008년과 같은 석유 값 폭락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제 에너지 전문가들도 대부분 OPEC+의 이번 감산 결정이 최근 서방을 비롯한 각국의 경기 침체 우려로 추락한 국제 유가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국제 유가는 6월만 해도 배럴당 130달러까지 치솟았지만 최근 들어 경기 침체 우려에 따라 배럴당 80~90달러 선까지 추락했다. 이 때문에 OPEC+는 회원국들의 수입이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제 유가를 배럴당 100달러 안팎으로 유지하기 위해 감산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우디로서는 네옴 시티 건설을 비롯해 무함마드 왕세자의 ‘비전 2030’ 계획을 추진하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규모 감산을 통한 고유가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우디는 정부 수입의 75%, 국내총생산(GDP)의 45%를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대규모 감산 결정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승부수’라고 볼 수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9월 27일 전통적으로 국왕이 맡아 온 직책인 총리에 취임하면서 공식적인 국가수반이 됐다. 올해 86세 고령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사우디 국왕은 자신의 아들인 무함마드 왕세자를 총리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내각 인사 칙령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왕위를 승계하는 준비에 들어갔다. 총리는 사우디 국왕이 겸임하는 국가수반의 직책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 왕국을 대표해 외국을 방문하고 사우디가 주최하는 정상회담을 주재하는 등 살만 국왕이 총리로서 하던 업무를 수행한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8년 10월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왔다. 당시 카슈끄지는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실종됐었다. 이후 카슈끄지의 훼손된 시신이 사우디 총영사 관저에서 발견됐고, 터키 수사당국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경호원 등이 암살 작전을 벌인 것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양국 관계를 고려해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의혹을 묵살했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선 경선 때 무함마드 왕세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무함마드 왕세자를 ‘살인자’ 취급하면서 계속 문제를 제기해 왔다. 이 때문에 무함마드 왕세자는 그동안 외국 방문을 자제하는 등 외교 활동에 전면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대규모 감산은 무함마드 왕세자로선 총리 취임 이후 내린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입장에선 비전 2030 계획을 실현시키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명운뿐만 아니라 사우디의 미래를 위해서도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가 앞으로 최소한 2030년까지 국제 사회에서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국제 석유 시장에서 자체적인 생산량 조절을 통해 전체 수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산유국)’의 지위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사우디는 그동안 석유를 무기로 국제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글로벌 석유패권 전쟁 '점입가경'
고유가에 러시아 제재 ‘흔들’…
미, 추가 조치 검토


러시아가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서방은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 조치를 취해 왔다. 특히 서방은 러시아의 전비로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대폭 줄여 왔다. 유럽연합(EU)은 올 연말까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의 90%를 줄일 예정이다.

미국은 이미 지난 3월부터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수입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 캐나다 등도 러시아로부터 석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거나 금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석유 수급과 관련해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 유가는 고공행진을 보였고, 물가는 폭등했다. 따라서 미국 등 서방은 사우디 등에 대폭 증산을 요청했다. 특히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7월 사우디를 방문해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나 주먹인사까지 나누는 등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인권 탄압을 눈감아줬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폭등을 막기 위해 증산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로부터 대규모 증산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다. 실제로 OPEC+는 8월 회의에서 9월부터 석유 생산량을 하루 10만 배럴 증산하는 데 합의했다. 10만 배럴은 OPEC+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의 생산량 증산이었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면죄부만을 준 셈이 됐다.
글로벌 석유패권 전쟁 '점입가경'
더욱 중요한 점은 러시아 경제가 고유가 덕분에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도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러시아 경제개발부에 따르면 올해 에너지 수출 흑자 전망치는 3375억 달러(443조 원)로 지난해 2442억 달러(321조 원)에 비해 38% 증가한 것이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산 가스와 석유 수입을 중단하거나 줄였지만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수출 금액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특히 석유 수출의 경우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산 수입을 줄이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오히려 수입을 늘렸다. 게다가 배럴당 100달러 안팎의 고유가 덕분에 러시아의 석유 수출에 대한 수입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러자 미국은 러시아가 고유가로 벌어들인 오일 머니를 전쟁비용으로 충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특단의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석유를 소비하는 서방 국가들이 힘을 합쳐 러시아산 석유 가격상한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미국 등 G7은 9월 러시아산 석유에 대한 가격상한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도 10월 가격이 일정 수준을 넘는 러시아산 석유를 유럽 기업들이 제3국으로 운송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가격상한제에 합의했다. 이는 G7이 합의한 러시아산 석유 가격상한제를 EU 회원국들 전체에 적용하는 조치다. 이에 따라 서방 국가들의 석유 소비자 카르텔이 구축됐다.

하지만 사우디는 서방 국가들의 러시아산 석유 가격상한제에 상당한 거부감을 보여 왔다. 석유 가격상한제는 에너지 소비자들이 힘을 합쳐 석유 가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조치다. 반면 사우디 등 에너지 생산자들은 석유 가격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특히 사우디는 서방 국가들이 석유 가격상한제를 다른 산유국들에 적용해 압박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해 왔다.

국제 컨설팅 업체인 에너지 애스팩트의 암리타 센 석유부문 수석분석가는 “사우디는 서방 국가들의 러시아산 석유 가격상한제를 실효성의 유무를 떠나 위험한 선례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무함마드 왕세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규모 감산 요청을 수용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OPEC+의 책임 있는 국가들이 사려 깊고 균형감 있게 감산을 결정했다”면서 “감산 결정은 적어도 미국이 석유 시장에서 야기한 혼란에 대해 균형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반면 미국 정부는 푸틴 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사우디에 분노하고 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감산 결정으로 OPEC+가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비난했다. 서방 전문가들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미국 정부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면서 “사우디의 의도는 러시아와의 에너지 동맹을 통해 미국의 석유 패권을 견제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세계 2위와 3위 산유국으로 두 국가의 석유 생산량은 전 세계의 25%나 된다. 사우디는 미국의 우방이고 러시아는 사우디의 경쟁국인 이란의 우방이지만, 사우디와 러시아는 국제 석유 시장의 수급을 조절해 유가를 통제하기 위해 협력해야 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사우디와 러시아가 석유 생산국 카르텔을 구축한 셈이다.

미국의 입장에선 OPEC+의 대규모 감산 결정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특히 오는 11월 8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은 유가 폭등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11월부터 전략비축유(SPR) 1000만 배럴을 추가 방출하고, 단기에 미국 내 석유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추가적인 조치를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미국 정부는 휘발유, 디젤 등 석유 관련 제품의 전면적인 수출 통제도 검토하고 있다. 이와 함께 매장량 기준 세계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일부 완화할 방침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 의회에선 미군과 미사일 방어(MD) 체계를 철수하는 내용의 법안과 석유 생산 수출 카르텔 금지(NOPEC) 법안 등 사우디에 대한 보복 조치들이 거론되고 있다.

이처럼 미국 등 서방과 사우디, 러시아 등 OPEC+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글로벌 석유패권 전쟁에 돌입했다. 이번 석유 소비자와 생산자 카르텔 간의 대결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 국제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글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사진 한경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