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시코쿠는 일본 본토를 이루는 4개의 섬 중 가장 작다. 우리나라 경북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도쿠시마현, 가가와현, 에히메현, 고치현으로 구성된 시코쿠에 1200년 역사의 불교 성지 순례길이 있다. 바로 ‘시코쿠 헨로미치’다. 88개 절을 돌아오는 총 1200km의 이 길은 일본의 존경받는 고승 중위 한 명이며 '히라가나'를 창시한 홍법대사(쿠가이)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진다.

여행을 위한 시간은 언제나 넉넉하지는 않다. '시코쿠 헨로미치'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순례길의 풀코스를 걷기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걷기 여행자들에게 마지막 14개의 사찰을 돌아오는 가가와현 108km의 순례길을 제안한다. 종교적 의식이나 바람을 위한 묵직한 도전은 아닐지라도 일주일 정도 순례길을 걸으며 재충전의 시간과 트레킹의 묘미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가마타마 우동의 진수’ 야마고에 우동'
다카마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달려간 곳은 우동가게다. 당연히 우동을 먹기 위해서다. 가가와현은 일본에서 가장 작은 현이지만 무려 800~900개에 달하는 우동가게가 성업 중이다. 일명 사누키현으로 불리는 가가와현은 우동택시와 영화 <우동>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거리는 물론 휑한 시골길이나 논밭 사이에서도 우동을 먹기 위해 늘어선 줄을 볼 수 있다.
사누키 우동은 일본을 대표하는 우동이며 면발이 비교적 굵고 쫄깃쫄깃한 식감을 특징으로 한다. '야마고에우동'은 3대째 가업으로 이어진 우동가게로 아침 9시부터 장사를 시작해 오후 1시 30분이면 문을 닫는다. 일요일은 휴무일이다. 그런데도 하루 우동 판매량이 무려 1800그릇에 달한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이곳 사람들은 우동은 먹는데도 등급이 있고 말한다. 국물이 있는 '가케우동'으로 시작한 초보자가 '가마타마우동'을 거쳐 '가마아게우동'(우동 삶은 물에 담겨져 나온 면을 쯔유에 찍어 먹는)을 즐길 때즈음에야 고수의 경지라 칭한다는 것.
야마고에우동의 주력 우동은 날달걀과 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 '가마타마우동'이다. 굳이 레벨로 따진다면 중급 수준이지만 맛이 있다. 특유의 졸깃한 면발은 차치하더라도 날달걀과 간장과의 조화가 어찌나 탁월한지 입안 가득 느껴지는 부드러운 맛에 젓가락을 뜰 때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다. 야마고에우동은 면의 양을 4단계로 선택해 먹을 수 있다. 우동 투어 여행자나 소인의 경우 1다마(玉數: 면 타래의 기본 규격을 뜻함) ,여성은 2다마, 남성은 3다마, 대식가는 4다마를 선택하면 무난하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간장 아이이크림 한 입 하실래요?" 고토히라 신사거리
고토히라(金刀比羅)는 다카마츠역에서 기차로 약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온천마을이다. 고토히라역에서 고토히라궁으로 가는 길 양옆으로는 우동가게, 기념품가게, 카페와 료칸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우리나라 유명사찰의 주변과도 흡사한 분위기로 한눈에 봐도 관광지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특히 관심이 간 것은 우동학교와 간장 아이스크림이었다.
고토히라 우동학교는 면의 배합 비율과 반죽을 배우고 직접 우동을 만들어 먹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일본인은 물론 외국인 여행자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다. 가마타마소프토라 불리는 간장아이스크림은 한 면에 잘게 다진 파를 토핑한 후 간장을 뿌려 먹는다. 파격적인 비주얼, 하지만 맛에 대한 의구심은 한입 녹여 물었을 때 부드럽게 사라진다. 간장의 풍미와 아이스림과의 절묘한 앙상블 때문이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액운을 막아 주세요, 곤피라상" 고토히라궁
‘곤피라’는 바다의 신으로 그를 모시고 있는 고토히라궁(金刀比羅宮)은 '곤피라상'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신사거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궁까지는 785계단, 정상인 오쿠신사까지는 약 1368개의 계단이 놓여 있다. 많은 참배객이 가파을 계단을 오르는 까닭은 곤피라가 건강과 액을 다스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토히라 궁내 입구에는 하얀 파라솔 아래 5곳의 노점이 자리하고 있다. 신사에 공적이 있거나 축제 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가문의 여성 5명에게만 허가된 일종의 혜택으로 많게는 무려 30대에 걸쳐 특권을 누려 오고 있다고 한다. 본궁은 높이와 걸맞은 시원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토히라정 시가지와 사누키평야의 탁 트인 모습은 적어도 785계단에 올라선 탐방객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선물이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진헌종의 총본산’ 젠츠지
본격적인 순례길의 시작이다. 카가와현 젠츠지(善通寺)가 오헨로미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찰로 평가받는 것은 홍법대사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오헨로미치 75번째 사찰 젠츠지는 홍법대사의 3대 영적(霊跡: 정신의 발자취가 있는 사찰)으로 꼽히며 진헌종의 총본산이다. 젠츠지는 면적이 4만5000㎡에 이르는 대형 사찰로 동, 서의 사원으로 나뉘어 있다.
홍법대사가 태어난 어영당(御影堂·대사당)은 서쪽 사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그 안쪽 전각에는 대사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직접 그렸다고 전해지는 메히키다이시(瞬目大師: 가마쿠라 시대, 쓰치미카도 천황에게 하사받은 존호) 자화상이 안치돼 있다고 한다. 탄생원으로도 불리는 서원에는 어영당 외에도 홍법대사의 유물이 전시된 보물관, 성령정(聖霊殿), 호마당(護摩堂) 등도 들어서 있다.
납경소는 오헨로 순례의 인증이 이뤄지는 곳이다. 납경장에 도장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나 88개 사찰명이 인쇄된 하쿠이(흰옷)나 족자에 인증을 받기도 한다.
가람(伽藍)은 동쪽 서원을 일컫는다. 젠츠지를 상징하는 43m 높이의 5층탑이 그곳에 있다. 몇 번의 화재로 소실됐던 5층탑은 그때마다 재건됐고 현재의 탑은 메이지 35년(1902년) 축조됐다. 젠츠지의 너른 마당에는 1000년 수령의 녹나무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홍법대사의 유년기와 함께했다는 녹나무는 일본 국가 천연기념물로 보존되고 있다. 경내는 낙엽 하나 없을 정도로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다. 긴 빗자루를 든 관리인은 마치 수도를 하듯 사찰 바닥을 고르고 또 고른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사찰 순례는 절차에 따라 이뤄진다. 가장 먼저 사찰의 대문인 산문에 서서 본당을 향해 한 번 절을 하고 우물에서 입과 손을 씻는다. 그리고 본당 앞으로 가서 종을 한 번 친 후 향과 촛불을 켜고, 인적사항과 소원을 적어 납찰상자에 새전과 함께 넣는다. 그런 다음 합장과 독경을 한다. 다시 대사당에서 합장과 독경을 하고는 납경소에서 인증을 받고 본당을 향해 일배 후 절을 떠난다.
76번째사찰 곤조지는 젠츠지에서 4~5km 떨어져 있다. 길은 젠츠지 시의 너른 들판과 마을들을 지난다. 한국은 이미 초겨울에 접어들었지만 가가와현은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됐다. 한적함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걸음이 익숙해지면 눈에 보이는 일상도 다정하게 다가올 것이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아이를 점지해주는’ 곤조지
곤조지(金倉寺)는 서기 774년에 와케도젠(和氣道善)이 창건했다.. 창건 초기에는 도젠사(道善寺)라 했으나 10세기경부터 다이고 천황의 칙령으로 지역명을 따서 곤조지란 이름을 갖게 된다.
곤조지는 가리제모(귀자모신·鬼子母神)를 모시는 사찰이다. 가리제모는 '오카루텐상'이란 애칭으로도 불리는데 아기의 탄생과 양육을 관장하며 여성을 수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곤조지에서는 매달 순산기원 행사가 세 차례씩 열린다.
오헨로 순례에 나선 사람 중 반 이상은 일본의 연로한 세대다. 그들은 전세 버스를 이용 이동을 하고 각 사찰에 내려 의식을 행한다. 또한 개인 차량을 이용 사찰을 방문하는 가족들도 적지 않다. '오헨로상'이라 하는 도보 순례자들은 대게 한두 명씩 움직이는데 그중에는 외국인들도 많다. 한번 마주친 오헨로상들은 순례길에서 또다시 만나게 된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뽕나무 설화’의 도류지
도류지(道隆寺)에는 창건 설화가 전해진다. 원래 절터는 뽕나무밭이었다. 높은 키의 뽕나무가 밤마다 빛을 발하자 영주 와케미치타카(和氣道隆)는 그 빛을 향해 활을 쐈다. 그러자 여인의 비명이 들려 확인해보니 유모가 화살에 맞아 죽어 있었다. 와케미치타카는 이를 애도해 당을 세우고 뽕나무로 약사불을 만들어 안치하니 이것이 도류지의 기원이다. 입구 인왕문(仁王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본당이 나타난다. 경내에는 총 255구의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세토대교를 한눈에’ 고쇼지
오헨로의 순례자들에겐 전통으로 내려오는 복장이 있다. 스게가사(삿갓)를 쓰고 '하쿠이'로 불리는 흰 적삼을 입는다. ‘하쿠이’는 번뇌를 벗어난 맑은 모습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사(와게사)를 목에 걸치고 즈다부크로(가방)을 어깨에 둘러메며 양손에 각각 염주와 콘코즈에(지팡이)를 든다. 꼭 의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불교 신자인 일본인들은 대개 복장을 갖추며 외국인들도 가끔 그를 따른다.
고쇼지(郷照寺)는 757년 왕인박사의 후손으로 전해지는 교키대사(行基)가 창건했다. 우타츠쵸의 남쪽, 아오노산 기슭에 있는 고쇼지는 우타츠마을과 세토대교를 펼쳐 놓은 근사한 조망권을 가지고 있다. 대사당 지하에 1만 구의 관음보살상을 모신 것으로 유명하며 진언종과 시종의 2개의 법문이 공존하는 시코쿠 유일의 절이다.
또한 고쇼지는 액막이 사찰로도 알려져 있는데 홍법대사가 42세 때 이곳을 찾아 직접 본인의 동상을 세워 병마를 물리치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전해진다.
[김민수 여행작가]1200년 역사의 불교 순례길 ‘시코쿠 헨로미치’
오헨로를 걷는 이방인들에 사찰은 다른 나라의 종교며 문화일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사찰과 그 사이를 걸으며 트레일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헨로 순례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건함에 빠져 든다. 길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에 접근하게 한다.

글 ·사진 김민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