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가족의 구조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전통적인 가족관에서 벗어나 ‘느슨한 연대’가 주목받고 있다. 이 달라진 사회구조 속에서 신탁은 그 느슨해진 틈을 채워줄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느슨해진 가족연대, 신탁으로 채운다
2022년 통계청 사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결혼을 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동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65%로 과거 10년 전에 비해 20% 이상 증가했다. 여성가족부의 설문조사 항목인 ‘혈연이나 혼인관계가 아니더라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다’라는 물음에 국민의 70%가 ‘그렇다’고 답한 사실은 기존의 혈연·혼인 중심의 법과 제도들은 현재의 다양해진 가족의 형태를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과거 한국에서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으로 직장 내 구성원들 간 가족 이상의 끈끈함을 요구해 왔다. 혼인에 기반한 전통적인 가족의 형성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을 더욱 강하게 결속시켰다. 구성원 서로에게 책임을 부여하면서 어떤 관계보다 단단한 관계를 유지하는 근간이 됐고, 우리는 이 긴밀한 유대관계에 피로를 느낀다.

느슨한 연대, 관계의 다양함
‘느슨한 연대(weak ties)’는 잡아맨 끈이나 줄 따위가 늘어나서 헐겁다는 뜻의 ‘느슨하다’는 말과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연대’가 결합된 단어다. 친밀감은 유지하지만 관계 속의 강한 책임은 피하겠다는 태도에서 파생된 말로 ‘따로 또 같이’쯤으로 표현할 수 있다.

2000년대 초 한국에서 혼인하지 않고 ‘함께 생활하는’ 커플들이 늘어나면서 그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북유럽 사람들의 유연한 라이프스타일을 다룬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연연하지 않고 탄력적이며 개방적인 형태의 가족을 구성하는 모습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게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볼 수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중립 혹은 관계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것에 가깝다.

70대 초반의 여성 A씨는 20년 전 이혼했다. A씨는 슬하에 2명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이혼 후 연락하지 않고 지내면서 정서적으로는 단절돼 있다. 다수의 상업용 부동산과 단독주택을 보유하고 있어 생활은 넉넉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평소 봉사와 기부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데, 최근 발병한 질환으로 한 달에 한 번 수도권의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서 봉사활동의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70대 후반의 남성 B씨는 일찍이 배우자와 사별했다.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자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30년 공무원 생활 후 퇴직해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생활하기에 경제적으로 큰 불편함이 없다.

A씨와 B씨는 10년째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같이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법적인 결합, 즉 혼인을 생각했다. 하지만 혼인으로 인해 발생할 현실적 어려움을 생각해보니 머리가 아득했다. 먼저 자녀들을 설득하는 일에서부터 함께 생활하기 전 형성된 각자의 재산에 대한 관리와 사용까지 생각할수록 엄두가 나지 않아 현재까지 생활동반자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A씨는 현재의 관계에서도 불편함 없이 만족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혼인에 의한 가족이 아닌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 고민이 깊어진다. 특히 재산 관리와 상속 그리고 건강이 악화됐을 때, 동반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됐을 때 홀로 남은 자신의 삶에 대한 정리는 누가 도와줄 수 있고, 또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센터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다. 막연한 불안함에 싸인 A씨를 위한 솔루션에는 무엇이 있을까.

평안한 노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 ‘신탁’

현재 A씨는 B씨와 생활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서로 독립돼 있다. 지금은 지방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A씨는 부동산을 모두 처분하고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수도권의 시니어타운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다. 본인의 건강관리를 위해 수준 높은 의료기관의 서비스를 받기 원하며, 사후 자신의 재산은 혈연관계의 자녀가 아닌 B씨에게 상속하고, 의미 있는 일에 쓰일 수 있도록 기부하고 싶다.
느슨해진 가족연대, 신탁으로 채운다
A씨의 뜻을 실현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금융기관과 신탁 계약을 맺고 신탁을 설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당장 매도가 어려운 부동산은 부동산 형태로 신탁하고 금융기관의 도움을 받아 신탁 내에서 처분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한다. 이때 부동산 매각 후 유동화할 현금 자산을 넣을 수 있는 금전 신탁바구니를 함께 준비한다. 금전은 자신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경우 언제든지 손쉽게 쓸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탁은 개인별 맞춤 솔루션을 제공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다. 나를 위한 지급 기능을 탑재해 나의 노후 케어를 위해 충분히 쓰일 수 있도록 하고 B씨에게도 상속될 수 있도록 신탁을 설계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A씨가 생전 소소하게 실천하던 기부는 신탁을 통한 유산기부로 통 크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의료기관과 유산기부 약정 후 제공되는 예우 서비스를 활용해 의료기관과 연계된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생을 정리하고, 장례를 준비하며 더 나아가 봉안 시설까지 미리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신탁을 설정해 체계적인 시스템의 프로세스를 만들어 두는 것은 평안한 노후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부수적으로 A씨의 경우 지금처럼 의사 표현 능력이 있을 때, 본인이 사무를 처리하기 어려워졌을 때를 대비해 재산과 신상 보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후견인에게 위탁해 계약하는 ‘임의후견계약’을 준비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 최윤정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