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바이든 정부가 은행 위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오바마 정부 시절에 마련해 놓았던 ‘단일금융법’(일명 도드-프랑크법)을 재손질하는 등 분주한 모습이다. 최근의 안정세가 ‘진정한 축복’인지, 아니면 ‘위장된 축복’이 될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은행 위기는 몇 가지 교훈을 던져준다.
첫째, 통화정책을 비롯한 모든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를 깨닫는 계기가 됐다. 지난 1년 동안 미국 중앙은행(Fed)은 거시적 차원에서 물가를 잡기 위해 말이 뛰는 겔로핑 방식으로 금리를 올려 왔다. 하지만 미시적 차원에서는 부도, 파산, 은행 위기 등의 부작용이 잇달아 노출되고 있다.
둘째, ‘그림자 금융의 무서움’도 재차 통감했다. ‘단일금융법’의 적용 대상은 자산 규모 500억 달러 이상의 모든 은행이었으나 제롬 파월 미 Fed 의장 등이 주도해 5000억 달러 이상의 대형 은행으로 한정시켰다. 2000억 달러대의 SVB, 1000억 달러대의 시그니처은행이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 이번 은행 위기의 빌미가 됐다.
셋째, ‘디지털의 양면성’을 인식하는 첫 기회도 됐다. 모든 금융사는 고객에게 편리를 준다는 명목으로 디지털화를 추진했으나 정작 예금자와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 금융위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법과 현실 간 괴리가 심할수록 대형 위기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위험관리 면에서 ‘가짜뉴스가 주는 심각성’을 알게 됐다. 심리 요인과 네트워킹 효과가 큰 금융 여건에서는 특정 위험이 발생했을 때 진위 여부를 가늠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민스키 모멘텀, 즉 어느 순간에 뱅크런이나 펀드런이 발생한다. 이때 지급준비금이나 증거금이 부족할 때는 위기로 치민다는 것을 이번 은행 위기가 여실히 보여줬다.
다섯째, ‘금융사 임직원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확인하는 기회도 됐다. SVB 사태에서 보여줬듯이 지급 준비 부족 등을 해당 금융사 임직원이 가장 빨리 알 수 있다. 예금자 보호를 위해 최후 보루 역할을 해야 할 금융사 임직원이 자신의 자산부터 판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미국 은행 위기 이후 남겨진 과제는
문제는 앞으로 Fed의 통화정책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번 은행 위기를 계기로 실물경제와 금융 시장 간 왜곡 현상이 더 심해짐에 따라 Fed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맥상에 빠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은행 위기 이후에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는 장단기 금리 간 역전 현상이다.
‘유동성 프리미엄 가설’, ‘기대 가설’, ‘분할시장 가설’에 따르면 수익률 곡선이 음(-)의 기울기(단고장저)를 나타내면 경기가 차입비용 증가로 침체 국면에 접어들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수익률 곡선이 양(+)의 기울기(단저장고)를 나타내면 투자에 유리한 환경이 지속돼 경기가 회복될 확률이 높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미국경제연구소(NBER)는 2분기 연속 성장률 추이로 경기를 판단한다. 하지만 ‘선제성(preemptive)’을 중시하는 Fed는 NBER식으로 지나간 성장률 추이로 경기를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유효성 문제가 있긴 하지만 Fed가 경기를 판단하고 예측하는 기법으로 ‘수익률 곡선 스프레드’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익률 곡선의 이론대로라면 미국 경제는 그레이트 리세션, 즉 대침체에 빠졌어야 한다. 하지만 은행 위기 이후 발표된 세계은행(WB)와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 보고서에서는 올해 미국 경제 성장률을 상향 조정했다. 종전의 경기순환이론이 무너졌다는 ‘노 랜딩’이란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로 견실하다.
실물과 금융 간 따로 노는 왜곡 현상을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정책당국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는 혼선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20년 전 Fed는 1990년대 후반 신경제 신화로 발생한 부동산 거품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으나 중국의 국채 매입으로 왜곡된 수익률 곡선을 잘못 파악해 ‘금융위기’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Fed가 왜곡된 수익률 곡선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가장 손쉽게 가져갈 수 있는 수단은 금리를 내려 정책의 민감한 단기금리를 낮추는 일이다. 은행 위기로 불거진 구성의 오류, 즉 거시적으로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과정에서 미시적으로 발생하는 파산 등을 막기 위해서도 금리를 내리거나 유동성을 공급해줘야 한다.
하지만 최근처럼 인플레가 잡히지 않는 여건에서는 ‘볼커의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 쉽지 않다. 볼커의 실수란 198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을 맞아 당시 폴 볼커 의장이 장고 끝에 금리를 올려 물가가 잡히기 시작했으나, 그 후 성급하게 피벗(pivot), 즉 금리를 내려 인플레가 재발한 사건을 말한다.
오히려 만기가 10년 이상인 장기채를 대상으로 양적긴축(QT) 규모를 늘려 장기금리를 높여주는 방안이 현실적이다. 최근 들어 Fed가 수익률곡선통제(YCC)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공화당의 반대로 바이든 정부가 디폴트 위험에 몰리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추진할 때는 상당한 난항이 따른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도 미국의 은행 위기를 계기로 잠복돼 왔던 각종 왜곡 현상이 노출되고 있다. 가장 심한 곳은 외환 시장이다. 달러인덱스가 101대일 때 지난 2월 초에는 1228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이 4월 이후에는 1320원대로 100원 정도가 높다. 그만큼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이 악화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 무역액, 시가총액 등으로 본 우리 경제의 위상은 세계 10위에 해당할 만큼 대국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에 대한 수출 비중이 40%를 웃돌 만큼 내수시장이 육성되지 않아 대외 여건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경기가 어려울 때마다 수출부터 살려야 한다는 정책당국의 인식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우리와 같이 선진국과 신흥국에 중간자 위치에 있는 국가는 대전환기에는 쏠림 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다. 외국인 자금이 좋을 때는 선진국 대우를 받아 대거 유입되다가 나쁠 때는 신흥국으로 전락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어려움이 닥친다. ‘경기 순응성’과 ‘금융 변수 변동성’이 심해진다는 의미다.
IMF가 발표한 올해 성장률을 보면 미국과 중국은 상향 조정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하향 조정했다. 종전의 경우에는 상향 조정돼야 한다. 경제패권을 놓고 다투는 미국과 중국 간 중간자 입장에서 대외 경제정책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데다 조로화를 우려할 만큼 우리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정부는 위기 극복의 지식과 경험이 풍부하다. 오바마 정부 시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각각 부통령, Fed 부의장으로 근무하면서 리먼브라더스 사태 극복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번 은행 위기의 대처 방식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위기 극복에 좋은 선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돋보인 것은 최대 난제였던 시스템 위기로 전염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도덕적 해이 방지와 자가책임의 원칙을 지킨 점이다. 리먼 사태 당시 구제금융이 오히려 도덕적 해이를 낳았던 뼈아픈 교훈을 살려 책임져야 할 금융사와 투자자의 자산은 조기에 파산시키거나 처분해 자산 손실을 막았다. 반면 예금자를 확실하게 보호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 전반적인 은행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지킬 수 있었다.
위기 대응도 바이든 대통령이 최선봉에 서서 재무부, Fe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간의 공조 체제가 잘 작동되고 있다. 시장에서도 투자심리 안정에 상징 효과가 큰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등이 적극 협조했다. 국민도 ‘금융위기’의 불명예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예금 인출을 가능한 자제했다.
앞으로 Fed의 통화정책은 물가 안정뿐만 아니라 금융 시스템 건전성 확보 등과 같은 다른 목표를 감안해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단일금융법’의 적용 대상도 100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중견 은행까지 넓히고 레버리지 비율도 축소할 방침이다. 금융사 임직원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댈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은행 위기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국내 여건을 감안해 바이든 정부의 위기 극복 방식을 참조하되, 물가만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통화정책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더는 우리 내부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Fed를 따라간다는 인상을 주는 식의 통화정책을 추진해서는 곤란하다.
우리처럼 왜곡 현상이 심할 때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은 인플레뿐만 아니라 성장률과 경상수지 같은 목표도 동시에 감안해 추진해야 한다. 우리의 투자 매력도를 잃지 않기 위한 올해 성장률 최저선은 2%다. WB, IMF, 글로벌 투자은행이 예상하는 1%대로는 안 된다. 올해 무역적자가 불가피하더라도 경상수지 흑자세는 유지해야 한다.
한국은행은 ‘인플레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관리 가능하면 인플레와 같이 가야 한다’는 유연한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번 은행 위기를 계기로 Fed가 기준금리 변경, 공개시장 조작과 같은 전통적인 통화정책 수단보다 인플레 타기팅선 상향 조정 YCC 등 제3의 통화정책 수단을 검토하기 시작한 점도 참조해야 한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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