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부터 매년 국내 중견 작가의 전시를 후원해온 국립현대미술관 ‘MMCA 현대차 시리즈’가 10년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흔들리지 않던 신뢰의 시간을 돌아봤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차, 10년의 파트너십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 백년 여행기>전이 열리고 있다. 내년 2월 25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현대차 시리즈 열 번째 전시이자 마지막 전시다. 2014년 처음 시작된 ‘MMCA 현대차 시리즈’는 지난 10년간 매년 작가 한 명을 선정해 개인전을 지원해왔다.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에게 대규모 신작 구현 기회를 제공해 한국 현대미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기획됐다. 스타트를 끊은 이불을 비롯해 안규철, 김수자, 전준호·문경원, 최우람, 최정화 등 1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유명 작가의 전시가 매년 열릴 수 있었던 건 후원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메세나(Mécénat)’라는 용어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의 문화 예술 후원 활동을 말한다. 삼성은 일찍부터 리움미술관을 중심으로 메세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LG아트센터·아모레퍼시픽미술관·상상마당·롯데콘서트홀 등 익숙한 상호 역시 각 기업의 메세나 활동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기업이 후원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이유는 사회에 대한 공헌, 그리고 기업의 이미지 향상을 위해서다. 예술을 후원하는 것만큼 가성비 높은 홍보 수단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도 움직였다. 현대차는 2013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에 맞춰 후원 계약을 발표했다. 10년간 120억 원. 국립현대미술관 역대 최고 후원 금액이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18: 최정화
MMCA 현대차 시리즈 2018: 최정화
미술관 후원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현대차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후원을 택했고, 당시 현금 가치를 생각하면 120억 원이라는 금액 역시 상당한 것이었다. 단순히 금액 후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도서 발간, 해외 평론가를 초청하는 학술 세미나 개최 등에 대한 의지도 드러냈다. 기획과 전시, 글로벌 홍보까지 논스톱으로 지원해 국내 아티스트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겠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
현대차의 후원 계획 발표 이후 의외라는 반응이 다수였다. 어떤 사람들은 후원할 돈으로 차나 잘 만들라며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정몽구 회장은 임원을 대상으로 역사의식 함양을 강조하기도, 유명 학자들을 초대해 인문학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유가 있었다. ‘문화 마케팅’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특히 대기업에서 주최하는 이벤트는 내부에서 충분한 계획과 검증을 거친다. 2010년대 초 현대차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프리미엄 이미지 부재였다. 글로벌 브랜드로 발돋움하려던 현대차 입장에서는 확고한 브랜드 정체성과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없다는 것이 뼈아팠다. 해외에서 현대차는 아시아의 (제대로 발음하기도 힘든) 낯선 브랜드였다. 후발 주자였던 현대차는 품질을 따라잡기에 급급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품질 격차를 해소했다. 이후 자연스럽게 브랜딩의 필요가 생겼다. 글로벌 시장에서 차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감성과 문화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걸 느낀 것이다.
게다가 현대차는 당시 제네시스 브랜드의 독립을 고민하고 있었다(제네시스가 아직 독자 브랜드로 론칭하기 전 현대 제네시스로 불릴 때다). 2013년 11월, ‘제네시스 DH’가 발매됐다. G80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DH’는 수입차 못지않은 디자인과 성능으로 현대차도 프리미엄 라인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프리미엄 브랜드 론칭을 준비하던 현대차에 브랜드 이미지 업그레이드는 필수적이었고, 현대차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에 맞춰 통 큰 후원을 결정한 셈이다. 제네시스 브랜드의 프리미엄 이미지에 영향을 줬음은 당연한 일이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MMCA 현대차 시리즈’는 문화 예술과 기업이 만나 상생 효과를 창출한 대표적 기업 후원 사례로 꼽히며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현대차의 포지션이다. 일반적으로 스폰서 기업은 전시의 많은 부분에 간섭 아닌 간섭을 한다. 하지만 현대차는 지난 10년 동안 전시 제목에 기업 이름을 넣는 것 외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작가 선정과 전시의 모든 과정은 온전히 미술관의 결정으로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선정된 작가들은 예산 범위 안에서 가능한 최고 전시를 했고, 그 결과는 관람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기업과 미술관, 관람객 모두 윈윈(win-win)하는 좋은 선례를 남긴 셈이다.
물론 기업의 후원이 온전히 선의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금전적 후원에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목적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현대차의 장기 계약 이후 미술계의 스폰서십 분위기는 더욱 활발해졌다. 일례로 LG전자는 지난해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5년간 글로벌 파트너십을 맺은 데 이어 올해는 프리즈 서울 공식 헤드라인 파트너가 됐다. 설화수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현대차 역시 국립현대미술관 후원 이후 런던 테이트 모던, 미국 LA 카운티미술관(LACMA) 등 해외 유명 미술관과 10년 이상 장기 후원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은? 리움미술관은 여전히 서울의 핫 플레이스이며, 얼마 전에는 호암미술관이 재개관을 알리기도 했다.
예술에도 돈이 필요하다.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보티첼리 같은 이들의 걸작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기업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예술의 토양은 더욱 비옥해지는 후원의 선순환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는 내년 2월 25일까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 백년 여행기> 전시가 개최된다. ‘MMCA 현대차 시리즈’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전시다.1998년부터 현재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현실과 허구, 실재와 환영, 개인과 사회, 기억과 재현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는 정연두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20세기 초 멕시코 유카탄반도로 이주한 한인과 그 후손들의 서사를 일상적 소재로 풀어낸 작품을 선보인다.


글 이기원 칼럼니스트 |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