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세대교체 대안으로 ‘벤처캐피털’ 주목
[한경 머니 기고=이나래 EY한영 세무부문 파트너] 기업이 원활한 가업승계를 통해 장수기업(업력이 45년 이상인 기업)으로 성장하면 국가 경제에 상당히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에 따르면 30년 이상 된 국내 기업의 수는 전체의 4.3%에 불과하지만 매출액은 21.3%, 자산은 28.6%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의 업력이 쌓일수록 수출과 고용 능력, 연구개발비도 증가해 경제적 기여도 또한 높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업력이 40년 이상인 기업은 10년 미만인 기업에 비해 수출과 고용 능력은 8배, 연구개발비는 약 3배 높다고 분석됐다.

EY가 발간한 ‘기업이 시간의 시험을 견디는 방법(How businesses can stand the test of time)’ 자료에 따르면 장수기업들 중 상당수는 제품 포트폴리오의 진화, 다각화 또는 인수·합병(M&A)을 통해 변화를 효과적으로 예측하고 대응하며 생존 전략을 찾았으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전략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빠른 기술 발전과 치열한 시장 경쟁으로 인해 기업의 생존율은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등재된 영국 킹스턴대 논문에 따르면 미국 스탠더드앤푸어스(S&P)500 기업의 평균 수명은 80년 전에는 67년이었으나 최근에는 15년으로 급감했다. 혁신적인 방법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기업 성장을 담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 또한 생존과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투자하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곧 세대교체를 앞두고 있는 기업 오너들은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전략뿐만 아니라 높은 상속·증여세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기업에 있어 ‘승계’라는 주제는 또 다른 무거운 짐이다.
기업 세대교체 대안으로 ‘벤처캐피털’ 주목
새 국면을 맞이한 CVC의 위상
급변하는 글로벌 기업 환경 속에서 기업들은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위한 대안 중 하나로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orporate Venture Capital·CVC)’을 주목하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장기적인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벤처 업계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벤처투자 촉진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2021년 12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국내 일반지주회사의 CVC 설립을 허용했다.

법 개정 전에는 일반지주회사가 금융사를 보유하지 못하는 금산분리 원칙이 적용돼 CVC는 주로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창투사) 또는 신기술사업금융업자(신기사)의 독립적인 형태로 운영하거나 계열사 또는 사내부서를 통해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반지주회사가 금융사인 벤처캐피털의 주식을 제한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돼 CVC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올해 6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3년 일반지주회사 소속 CVC 현황’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제도 시행 이후 1년 반 만에 일반지주회사 소속 12개의 CVC가 운영 중이며, 총 86개 내외의 CVC가 집계됐다(창투사 51개·신기사 35개 내외).

중소벤처기업부는 오는 2027년까지 국내 벤처투자의 CVC 비중을 30% 이상으로 늘리겠다는 목표 아래 공정거래법과 CVC 규제 완화를 통한 관련 생태계 조성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중소벤처기업부는 공정거래위원회 및 관련 부처와 협력해 공정거래법 제20조에 따른 일반지주회사 CVC에 대한 외부 자금 출자 및 해외 기업 투자 규제 완화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구체적으로는 현재 펀드 결성액의 40% 이내인 외부 자금 출자를 50%까지 허용하고, 운용 자산의 20%인 해외 기업 투자를 30%까지 완화한다.

이와 별개로 올해 10월 19일부터 ‘벤처투자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순수 민간 자금으로 벤처모(母)펀드를 만들어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국내에 최초로 도입됐다. 현재는 내국법인이 벤처기업에 직접 출자하거나 중소기업창업투자조합을 통해 간접 출자하는 경우에만 투자금액의 5%에 대한 세액공제를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7월 발표한 세법개정안에 따르면 향후 민간 벤처모펀드를 통해 투자할 때에도 동일한 혜택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법인이 최근 3년간 평균치보다 투자 규모를 늘렸을 경우 증가분의 3%에 대해 추가로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즉, 법인의 과거 벤처투자 이력과 투자 규모에 따라 최대 8%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창투사 또는 신기사가 취득한 벤처기업 주식에 의한 양도차익에 대해서는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양도소득세가 면제된다.

벤처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민간 자금을 활용한 다양한 법률 개정은 기업 내부 연구·개발(R&D) 부서의 혁신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자율성, 자유로운 환경, 관습을 벗어난 사고가 가능한 공간과 실패에 대한 부담이 적은 기업문화 등의 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대형 성숙 기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CVC를 통한 벤처투자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다.

CVC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
CVC를 설립하는 기업이 증가하면서 CVC를 통해 경영을 배우고, 신사업 추진을 통한 미래 먹거리 확보에 나서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러한 CVC 사례를 대기업 오너 일가의 사익 편취, 편법 승계 또는 지배구조 강화의 수단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현행법상 CVC에 오너 일가가 직접 지분을 투자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계열사를 통한 CVC 지분 투자는 여전히 가능하다. 이로 인해 CVC는 오너 일가가 투자할 수 있는 우회 통로로 사용될 수 있으며, ‘특수관계인에 대한 투자 몰아주기’라는 우려도 따른다. 따라서 CVC가 특수관계인이 출자한 회사에 투자하거나 특수관계인에게 투자한 회사의 주식, 채권 등을 매각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규정이 도입됐다. 해당 규정에 ‘특수관계인’의 범위는 동일인이자 자연인인 기업집단의 동일인과 그 친족으로 한정돼 있다.

한편 196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CVC가 활성화된 해외 국가들은 CVC 설립 방식과 자금조달 방식을 기업 자율에 맡기고 있다. EY의 CVC 보고서 ‘어려운 시기 속 기업 성장의 원동력(A critical driver for enterprise growth in turbulent times)’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은 2000년 초 닷컴 버블과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CVC를 통해 스타트업과의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신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CVC 시장은 견고한 성장을 이루었다.

2009년 당시 미국 내 CVC 투자 건수는 432건으로, 이후 10년 동안 3234건으로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 CVC의 벤처투자 규모는 2009년 5억 달러에서 2019년 57억 달러로 약 10배 성장했으며, 이러한 추세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기업 세대교체 대안으로 ‘벤처캐피털’ 주목
지속 가능한 CVC의 성장과 안정적인 세대 이전
국내 CVC의 상당수는 2021년 말 일반지주회사의 자회사 형태로 CVC 설립을 허용한 이전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됐다. 전략적 동기나 투자사로서 스타트업 발굴보다는 모기업 납품사에 대한 투자 집행과 같은 위험회피적인 방식으로 운영된 경향이 강했다. 즉, 민간 재원으로 기업 성장을 지원하고 국내 투자 생태계를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규모 및 역량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기술력과 풍부한 경영 자원을 바탕으로 운영한다면 대기업이 상당 부분인 일반지주회사 CVC의 성격을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맞는 CVC 본연의 역할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현행 세법은 기업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경우 증여세 및 상속세를 공제하는 여러 지원책이 있다. 이러한 세제 혜택의 배경에는 장수 가문의 육성, 기업의 지속성 유지를 장려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세법 개정에서는 사업 분류를 2년 동안에 걸쳐 소분류에서 대분류까지 변경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에는 업종을 대분류 내에서 변경하는 것만으로는 기업의 성장과 지속성을 담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승계를 통해 부모세대가 장기간 이끌어 온 사업을 차세대가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급변하는 글로벌 기업 환경에서 사업을 확장하려면 CVC를 통해 신규 사업 투자로 회사를 성장시키며 신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서는 CVC를 기업의 전략적 목표에 맞게 운영하고, 이를 통해 스타트업과의 시너지를 창출하고 성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볼 때 국내도 관련 방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벤처투자의 활성화 측면에서 CVC를 가업승계에 대한 우려만으로 과도한 투자 제한 규정을 두는 것은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투자 유인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면 CVC 본연의 기능이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해외의 유사 사례 및 제도의 장단점 등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글로벌 경제 상황을 볼 때 CVC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제거해 벤처투자를 육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급변하는 글로벌 기업 환경 속에서 기업들은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위한 대안 중 하나로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orporate Venture Capital·CVC)’을 주목하고 있다.

글 이나래 EY한영 세무부문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