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김호영 인터뷰
스테디셀러 뮤지컬 <렌트>가 작품성과 흥행 모두 좋은 성적표를 거두며 국내 공연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그리고 그 인기 배경에 빼놓을 수 없는 이 사람, 배우 김호영을 최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만났다. 지난 12월 3일 뮤지컬 <렌트> 무대에서 ‘엔젤’ 김호영은 엔젤 그 자체였다. 상대역인 ‘콜린’ 윤형렬과 ‘I’ll cover you’를 속삭이고, 현란한 춤과 노래로 엔젤의 대표 넘버 ‘Today 4 U’와 ‘Seasons of love’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쏟아내는 내내 엔젤은 허구가 아닌 현실로 느껴졌다. 무대에 완벽히 몰입한 자만이 발산할 수 있는 빛과 에너지 그리고 진심이 묻어났다.실제로 김호영과 뮤지컬 <렌트>의 인연은 남다르다. 뮤지컬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La Bohême)>을 현대화한 작품으로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꿈과 열정, 사랑과 우정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을 그린다.
김호영은 2002년 <렌트>에서 의복으로 성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여장남자 (drag queen)인 ‘엔젤’ 역으로 데뷔했다. 엔젤은 가난한 예술가 친구들 사이에서 사랑과 희망을 전파하는 인물로 이 작품의 상징적인 존재다. 그는 신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캐릭터 이해와 연기, 단단한 발성으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후 김호영은 21년간 다섯 시즌에 거쳐 연기해 오며 현존 세계 최장수·최고령 엔젤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동시에 <유린타운>, <아이다>, <헤어스프레이>, <맨 오브 라만차>, <킹키부츠> 등을 통해 다양한 연기 변신과 진화를 거듭하며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구축해 왔다.
그러던 그가 돌연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이 정든 배역을 그만하겠다고 선언했다. 여러 이유를 내놓았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후배들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다는 것. 단, 그는 <렌트>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렌트>의 협력 연출이나 액팅 코치로 작품에 또다시 참여하겠다는 당찬 포부도 밝혔다. 과연, 그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작품의 주제처럼 매사 ‘오직 오늘뿐(No Day, But Today)’을 외치고, 연기하고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번 시즌을 마지막이라고 정의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 렌트 속 엔젤은 뭐랄까 풋풋하고, 젊은 에너지와 사랑스러움이 있어야 하는 역할이에요. 그런데 21년간 뮤지컬 배우를 하고, 방송 활동을 더하면서 작품 전체에서 필요한 에너지가 생기는 것도 맞지만 어떤 부분에는 그 역할로서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종의 내공이 쌓였달까요. 주민등록상 나이와 별개로 피부 나이는 괜찮으니까 더 하려면 더 할 수도 있겠는데 좋은 배우들도 많고 엔젤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배우들도 많으니 좋은 선배로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도 선배의 덕목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40대가 되면서 선배가 돼 가는 과정에서 놓을 때 놓을 줄도 알고 다른 것들을 도전하는 것도 필요하단 얘기를 해보기도 했고요.”
20년 넘게 엔젤을 연기했는데, 어떤 인물이었나요.
“사실 오디션 전까지 <렌트>라는 작품을 몰랐어요. 그저 배우가 되고자 친구랑 경험 삼아 간 오디션이었고, 너무 잘됐죠. 21년 동안 <렌트>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콜린과의 끈끈한 관계였어요. 사람과 사람으로서 ‘저 둘이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구나’. ‘아끼는구나’라는 걸 느끼게끔 해야 한다는 게 저의 주된 목적이었어요. 본의 아니게 여러 명의 콜린들을 만나서 호흡을 맞췄는데, 그때마다 엔젤로서 저의 개인적인 기량도 중요했지만 엔젤과 콜린은 함께 있음으로써 빛이 나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콜린과 ‘I’ll cover you’를 부를 때 감정선도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요.
“2020년 시즌 전까지만 해도 이 노래를 부를 때 콜린과 엔젤이 거리가 좀 있었어요. 그래서 소리도 좀 웅장하게 했고, ‘지켜줄게’라는 노래 소절에서는 제가 콜린에서 뛰어가서 안기기도 했죠. 그러다 2020년 20주년 기념 공연 때 연출님이 이 노래를 콜린과 가까이 바라보고 부르게 하셨죠. 처음에는 얼굴을 맞대고 부르니까 못 부르겠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속삭이듯 불러도 사람들은 이 감정선을 더 좋아해주시더라고요. 뭐랄까 과거에는 이 노래를 밝은 솜사탕 느낌의 사랑 노래로 표현했는데 이제는 제가 연륜이 좀 쌓이다 보니, 두 사람 간의 밀도나 친밀감을 좀 더 점도 있게 표현하게 된 것 같아요.”
실제 본인의 삶에서 콜린과 같은 존재가 있나요.
“콜린이나 엔젤 모두 결국 서로를 보완해주고, 무조건적으로 아껴주는 사람이에요. 항상 절 슈퍼스타라고 불러주시는 저희 어머니가 제게는 그런 사람이죠. 그리고 감사하게도 제 주변에 저의 엔젤과 콜린들이 참 많아요. 그중 대표적인 한 사람으로 오늘은 유난히 정선아 배우가 생각나요. <렌트>로 같이 데뷔했던) 정선아 씨가 고3, 제가 대학교 2학년에 처음 만났는데 후에 선아씨가 제 대학 후배로 들어왔어요. 생각해보면 둘이 같이 작품을 많이 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너무 친밀하고 서로에게 무조건적이고 이런 관계가 가족 이외에 또 있을까 싶어요. 저는 선아씨에게 ‘타고났다라는 말을 검색하면 네 얼굴이 뜰 것 같다’는 얘기를 해줘요. 선아씨에게 노래적인 것에 대해 물어보고, 얘기 나누고, 선아씨는 연기적인 걸 저한테 물어보곤 해요. 배우와 배우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많지 않거든요. 선아씨는 고맙게도 무조건 칭찬해주죠. 바라보는 시각이 저희 엄마가 저에게 ‘슈퍼스타’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너무 잘해’라고 말해줘요. (그런 것들이) 자만에 빠지게 하기보다는 꼼꼼하게 서로 어떤 부분들이 더 좋았는지 얘기해주면서 북돋아주는 관계죠.”
뮤지컬 배우로서의 인생을 <렌트>와 함께하면서 달라진 신념도 있나요.
“<렌트>로 데뷔하면서부터 나름 삶의 철학이 생긴 것 같아요. 데뷔작이고 이 작품이 가진 메시지가 많이 체화되다 보니 <렌트>의 영향을 받게 됐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군가는 하루하루 잃어 가기 때문에 더욱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잃어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루하루가 소중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저 역시 그 당시에는 배우로서 이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 소중하고 좋았어요. 그게 무대 위에서뿐 아니라 ‘오직 오늘 뿐’이라는 말을 대사로서 뱉다 보니 어느 순간 저도 ‘그렇지. 오직 오늘 뿐이지’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또 공교롭게 제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동기들이 저한테 호이(hoy)라는 별명을 지어줬는데 후에 알고 보니 이 호이가 스페인어로 오늘이라는 뜻이더라고요. 오늘이라는 것이 제겐 뭔가 운명처럼 맞닿은 것 같아요.”
마지막 무대에서 울지 않을 자신이 있으세요.
“처음엔 울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전미도 배우가 서프라이즈로 저희 <렌트>팀 배우, 스태프들 도시락을 보내줬어요. 그 도시락 뚜껑 위에 ‘우리의 영원한 엔젤 호이(ANGEL hoy)’라고 써 있는 걸 보자마자 느닷없이 울컥하더라고요. 그때 마지막 무대에 울지 않겠다는 걸 장담하기 어렵겠다 싶었죠(웃음).” 새해에 꼭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특정한 역할보다는 영화에 출연해보고 싶어요. 영화에서는 예능에서 보인 발랄하고 유쾌한 역할도 좋고, 혹은 정반대로 아주 어두운 이미지의 역할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배우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갖췄으면 하는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공동 작업이다 보니까 사소한 것들로 서로 감정이 상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해요.”
엔젤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천운이죠. <렌트>의 엔젤은 저희 어머니에게도 저에게도 정말 저를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이에요. 엔젤 덕에 지금까지 좋은 배우로 알려질 수 있었고, 과분한 사랑을 많이 받았죠. 특히 함께했던 선배들이 너무 좋은 선배들이셨어요. 이런 분들을 통해 어떻게 해야 좋은 선배인지 본의 아니게 스며들게 한 것도 <렌트>와 엔젤이었어요. 또 신시컴퍼니는 모르고 있는데 저 혼자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저는 <렌트>라는 작품의 한국 협력 연출로 복귀하고 싶어요. 2020년도 공연 때 처음 앤디 세뇨르 연출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더 많이 느꼈어요. 그분도 과거 엔젤 역할을 하셨어요. 그렇다 보니 저랑 작품을 하는데 통역사를 거치지 않는데도 내면을 알겠더라고요. 엔젤로서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연기 장면에서도 엔젤의 시선으로 봤을 때 이해되면서 배우들한테 풀어주고 싶은 게 있었어요. 추후에 액팅 코치처럼 배우로서는 참여하지 않지만 프로덕션 스태프로 무조건 참여해서 ‘한국 연출도 외국 연출도 둘 다 서포트해야겠다’, ‘연출부로 들어가서 이 작품을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김수정 기자 | 사진 신시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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