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푸로산게 뉴질랜드 현지 시승

뉴질랜드 남섬에서 페라리 최초의 4도어 4인승 모델인 ‘푸로산게’를 시승하고 왔다. V12 자연흡기 엔진을 얹은 순수 혈통의 페라리지만 가족과 여행을 가기에도, 일상에서 데일리 카로 쓰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시승기] 페라리지만 괜찮아
“뉴질랜드 남섬으로 갈 겁니다.” 와인 브랜드에서 온 전화인가 했다.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페라리의 홍보 담당자였다. 그는 이틀 동안 페라리 ‘푸로산게(Purosangue)’를 타고 올 거라고 했다. 의문이 들었다. 10년 넘게 자동차를 다루는 기자로 일하면서 숱한 해외 출장을 다녔지만, 뉴질랜드는 꽤 낯선 장소였다. 천혜의 자연으로 유명한 뉴질랜드이니 정통 오프로더나 픽업 트럭의 시승행사로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초대장을 보낸 건 분명 슈퍼카 브랜드 페라리였다. 더욱이 페라리의 글로벌 미디어 테스트 드라이빙은 대부분 페라리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이뤄진다. ‘왜 하필 뉴질랜드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푸로산게는 SUV가 아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시간을 2020년께로 돌려보자. 당시 자동차 업계에서는 페라리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만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게 2022년 말 등장한 것이 페라리에서 만든 자동차 중 가장 키가 ‘껑충한’ 푸로산게였다. 국내 대부분 언론에서도 이 차를 페라리 최초의 SUV라 소개했다. 하지만 페라리에서는 고집스러울 만큼 푸로산게를 4도어 4인승 차량이라 일컫는다.
슈퍼카 브랜드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차의 형태만 본다면 푸로산게는 잘 빠진 SUV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여느 럭셔리 브랜드나 고성능 브랜드의 SUV들과 뚜렷하게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푸로산게는 동력계와 구동계, 뼈대와 디자인 등 모든 면에 페라리 스포츠카 고유의 특징이 반영돼 있다. 우선 강력한 성능의 근원인 심장은 V12 6.5L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이다. 갈수록 강화되는 배출가스 및 소음 규제 때문에 스포츠카 브랜드들조차 차츰 V12 엔진을 퇴출시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엔진 선택부터 이례적이다.
무게 배분도 인상적이다. 프런트 미드에 엔진을 달고, 리어 액슬 쪽에 8단 기어 박스를 맞물려 49대51의 이상적인 앞뒤 무게 배분을 완성했다. 이 역시 그 어떤 슈퍼카 브랜드의 SUV에서도 본 적 없는, 다분히 스포츠카다운 구성이다. 따라서 푸로산게는 슈퍼카 브랜드에서 만든 SUV라기보다는 SUV를 닮은(?) 슈퍼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오죽하면 차명도 이 차의 근간이 페라리 스포츠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순종’ 혹은 ‘혈통’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인 푸로산게라 지었을까.
뉴질랜드에서 만난 페라리 관계자는 “푸로산게는 여유로운 공간을 갖춘 전 세계 유일무이의 스포츠카”라며 “직접 타보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라 말했다.
[시승기] 페라리지만 괜찮아
완벽한 여행의 동반자
시승은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한 퀸스타운(Queenstown)에서 출발해 테 아나우(Te Anau)와 밀포드 사운드(Milford Sound)를 경유해 다시 퀸스타운으로 돌아오는 루트로 진행됐다. 장장 729km에 달하는 구간이었다. 그동안의 페라리 시승 행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스포츠카의 초고성능을 테스트하기보다는 4도어 4인승 스포츠카가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 안전성 등 푸로산게만의 매력을 중점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놀라움은 차에 오르기 전부터 시작됐다. 보통 스포츠카의 글로벌 미디어 테스트 드라이빙에서는 기자들의 여행 가방을 싣기 위한 밴을 별도로 운행한다. 하지만 페라리 관계자들은 자신 있게 푸로산게의 트렁크를 열어젖혔다. 제원표상 푸로산게의 적재 용량은 473L. 대형 세단의 트렁크와 맞먹는 크기다. 심지어 2열 시트를 접을 수도 있는데,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시트가 자동으로 접히면서 광활한 적재 공간이 드러난다. 실제 푸로산게의 트렁크는 (시트를 접지 않고도) 큼지막한 28인치 캐리어 2개와 백팩 1개를 ‘꿀꺽’ 집어삼켰다. 4인 가족의 여행 짐 정도는 거뜬히 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놀라움은 웅장한 크기 때문이었다. ‘로마’와 ‘SF90’을 닮은 날렵하고 매끈한 디자인 때문인지 작은 SUV 정도의 크기라고 생각했는데, 길이가 5m에 육박하고(4973mm) 너비는 2m가 넘는다(2028mm). 휠베이스는 한 술 더 떠 3m가 훌쩍 넘는다(3018mm). 대형 세단을 넘어 대형 SUV와 맞먹는 길이다.
긴 휠베이스는 넓은 실내 공간을 보장한다. 실제 푸로산게의 운전석에서는 여느 페라리 모델에서 느낄 수 없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최고급 가죽으로 만든 푹신한 시트에 앉으니 편안한 세단에 앉았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푸로산게에는 스포츠카답지 않은 편의 장비가 가득하다. 페라리 최초로 안드로이드 오토 및 애플 카플레이 시스템 호환 기능을 기본으로 제공하는 것은 물론, 장거리 주행의 무료함을 달래줄 부메스터(Burmester®) 3D 하이엔드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도 갖췄다. 4개의 좌석에는 모두 열선이 적용됐고, 앞좌석에는 3단계로 조절이 가능한 마사지 기능도 탑재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건, 1열과 2열에 모두 컵 홀더를 장착했다는 것. 여느 스포츠카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수납공간도 장거리 여행에 유용해 보였다.
[시승기] 페라리지만 괜찮아
가장 편안한 페라리
시동을 걸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스티어링휠 중앙 하단부에 터치식 버튼으로 이뤄진 시동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마자 맹수의 포효와 같은 강렬한 엔진 사운드가 귀를 울린다.
푸로산게의 달리기 성능은 페라리 그 자체다. 6.5L 자연흡기 12기통 엔진은 725마력의 힘을 내뿜으며 정지 상태에서 100km/h를 고작 3.3초 만에 주파한다. 최고 속도는 무려 310km/h. 액셀레이터에 발을 올리면 엄청난 속도감과 기민함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여느 페라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푸로산게는 신기할 정도로 편안하다는 것이다. 페라리의 다른 라인업과 달리 운전 시야가 넓고 시트 포지션도 높다. 특히 주행을 컴포트 모드로 설정하면 승차감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정속 주행을 하면 일반 세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행 감각을 선사할 정도다.
차체가 높은 만큼 고속 방지턱도 부드럽게 지난다. 특히 시승 코스에는 시골길이 많았다. 곳곳에 아스팔트 요철이 깔려 있었지만 푸로산게는 700마력이 넘는 스포츠카라는 점을 잊게 할 만큼 충격을 부드럽게 걸러냈다. 푸로산게에 적용한 ‘페라리 액티브 서스펜션’이 울퉁불퉁한 노면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충격을 효과적으로 걸러낸 덕분이다.
코너에서의 움직임도 인상 깊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오르드(산악 지형인 빙하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협곡 또는 만) 지역인 밀포드 사운드에는 유독 와인딩 구간이 많았다. 하지만 푸로산게는 5m에 육박한 길이와 2톤이 넘는 육중한 몸매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날쌔게 움직였다. 급격한 코너링에도 차체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운전자의 조절 없이도 자동차가 스스로 반대쪽 롤을 억제하며 차량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까닭이다. 특히 페라리 최초로 가파른 내리막에서 운전자가 설정된 속도를 초과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내리막길 제어(HDC) 기능은 매우 편리했다.
한번은 도로에서 갑작스럽게 동물이 튀어나와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푸로산게의 정교하고 날카로운 몸놀림과 강력한 브레이크 시스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실제 푸로산게의 100km/h에서 제동 거리는 32.8m에 불과하다.
[시승기] 페라리지만 괜찮아
‘회장님’의 페라리
푸로산게를 시승하러 가기 전부터 궁금했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뒷좌석이다. 페라리 최초의 4도어 4인승 자동차인 만큼 뒷좌석의 거주성이 궁금했던 것이다.
실제 접한 푸로산게는 뒷자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남달랐다. 푸로산게에는 럭셔리 차들에서 볼 수 있는 코치 도어가 적용됐다. 코치 도어는 뒷문의 경첩이 일반적인 자동차와 달리 뒤쪽에 달려 있어, 문이 마주 보고 열리는 형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양문형 냉장고처럼 차 문이 열린다. 게다가 뒤 도어는 스위치를 이용해 열고 닫는 전동식이다. 차 밖에서 도어 앞쪽 유리창 턱에 달린 작은 스위치를 당기면 뒤 도어가 부드럽게 열리며 차에 탈 사람을 맞이한다.
우아하게 들어선 푸로산게의 2열 공간은 긴 휠베이스 덕분인지 생각보다 넉넉했다. 특히 무릎 공간(레그룸)이 주먹 2개 정도로 기대 이상이다. 시트는 전동 조절 기능을 더해 좌석 각도와 위치를 조절할 수 있다.
놀라웠던 건, 뒷좌석의 승차감도 꽤 만족스러웠다는 것. 페라리 뒷좌석에 앉아 2시간 동안 숙면을 취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만큼 정숙성도 뛰어났다. 더욱이 뒷좌석 사이에는 센터 콘솔을 마련해 터치 인터페이스로 공기 조절 장치와 편의 기능을 조절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물론 거짓말 조금 보태 ‘회장님’을 모시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승기] 페라리지만 괜찮아
뉴질랜드에서 함께한 푸로산게와의 동거동락은 그 자체로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특히 주행 중 차를 멈춰 세울 일이 많았는데, 그림 같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눈과 카메라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승 내내 725마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최대 속도가 310km/h라지만 빨리 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연을 품으며 운전을 즐기는 것. 이기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만끽하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푸로산게의 진정한 ‘가치’ 아닐까. 그제야 페라리가 전 세계 기자들을 뉴질랜드로 불러 모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페라리 최초의 4도어 4인승 스포츠카 푸로산게의 매력은 주행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있지만 경치 좋은 명소에서 더욱 빛이 나는 차였다.
[시승기] 페라리지만 괜찮아
Purosangue
크기 4973 x 2023 x 1589mm
휠베이스 3018mm
엔진 형식 V12 6.5L 가솔린 자연흡기
총 배기량 6496cc
최고 출력 725마력
최대 토크 716Nm
최고 속도 310km/h



뉴질랜드=글 이승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