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TALK
마이클 투히그·클라리사 옹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재미있게 읽은 웹툰 중에 <도박 중독자의 가족>이라는 작품이 있다. 작가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야기로, 한 인간이 도박에 중독되면서(이 작품 주인공의 경우 선물 옵션, 코인을 비롯한 투자 중독)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까지 모조리 파탄 내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결과만 보면 세상 욕을 다 퍼부어도 모자랄 중독자가 실제로는 굉장히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한때 착하고 공부 잘하던 아들이었고, 좋은 금융계 직장에 다니며 얻은 노하우로 재테크를 도와주던 멋진 형제였다.
그런 그가 위험한 투자에 손을 대고, 결국 그 증상이 중독으로까지 악화돼 집안을 흔들게 된 건, 역시나 선량하기 그지없는 단 한 줄의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투자해서 돈을 불리면 가족들이 행복해질 거야.’
도박 중독은 도박을 ‘행복’과 연결시키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한다. 돈을 따야만 행복해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할 거라는 강한 확신이 그들을 점점 강한 중독의 악순환으로 내몬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인지할 수 있듯, 이 전제는 시작부터 완전히 잘못됐다. 도박으로 돈을 따서 행복해지는 결말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박은 항상 지는 게임이니까. 어쩌다 한 번 이길 수는 있어도, 수백 수천 번 슬롯머신을 당겨서(혹은 카드를 뒤집거나 무언가의 승패에 베팅해서) 결과적으로 돈을 벌 수는 없다. 일반론이 아니라, 애초에 도박성 게임들이 모두 그렇게 설계돼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커다란 카지노와 경마장과 베팅 사이트들이 대체 무엇으로 돈을 벌겠는가.
도박에 중독돼본 적 없는 ‘정상인’의 입장에서, 나는 웹툰을 보는 내내 답답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왜 모르는 거야. 어째서 그딴 행동을 계속하는 거지. 결과가 망해 가고 있다는 걸 이미 스스로도 느끼고 있으면서.
하지만 이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그것이 남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신의 결점은 못 보고 타인의 흠만 쉽게 평가하는, 속된 말로 ‘내로남불’ 식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최근에 읽은 또 다른 책 한 권 덕분이었다.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은 완벽주의의 특성을 분석하면서 그 치료법을 안내하는 인문서이자 지침서다. 완벽주의를 치료하다니, 얼핏 듣기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 노력하는 게 뭐 어때서.’
완벽주의에 매몰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누군가는 완성도에 집착하느라 밤을 새며 건강을 해치고, 누군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작조차 못 하고 도전을 회피한다. 결과는 달라도 그 바탕은 같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완벽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는 불안감. 이 복합적인 감정은 때로 사람을 기괴할 정도로 계획적인 생활로 몰아넣고, 또 어떤 때는 완전히 마비시켜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다. 이러한 설명을 읽으며 내가 평가도 손가락질도 할 수 없었던 건, 나 자신이 이러한 완벽주의자의 전형적인 예시였기 때문이다.
업무 디테일에 집착하느라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에 매달리고, 그 와중에 점심 메뉴를 결정하지 못해 30분 동안 고민만 하는 사람.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극도로 두려워하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과정에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적응적 완벽주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게임임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도박 중독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완벽이라는 게임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그것을 중단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다. ‘평소의 나’와 ‘완벽을 강요하는 나’를 분리시키고, 완벽주의 자아가 게임을 걸어오면 과감히 반박하는 것이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에서 강조하는 개선의 출발점이다.
가령 완벽한 보고서를 위해 밤을 새야 한다는 강박이 밀려오면, 이 게임에 무작정 참여하는 대신 한 발 멈춰서 내가 얻을 것과 잃을 것을 진지하게 따져보자. 만약 게임에서 이긴다면 성취감을 얻고 잘 하면 상사의 칭찬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숙면을 희생하고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장기적으로 건강을 해칠 가능성도 크다. 이 보고서 하나에 ‘그렇게까지’ 완벽해야 할 가치가 있을까.
지나친 완벽주의의 출발점은, 어쩌면 생이 유한하다는 초조함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정된 시간 안에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불안이 우리를 강박적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몰아세우며 얻은 잠깐의 성취는, 결국 게임 한 판에서 이긴 도박 중독자의 승리와 다를 게 없다.
만약 내 지인이 도박에 빠졌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에게 당장 게임을 멈추라고, 도박장 밖에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줄 소중한 경험들이 많다고 망설임 없이 조언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주의에 빠진 내게도 같은 조언을 해줘야 공평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점심에 망설임 없이 된장찌개를 먹으려 한다. 된장찌개냐, 김치찌개냐, 자장면이냐 짬뽕이냐 하는 매일의 고민에서 하루라도 해방돼보는 것이다. 한 술 뜨는 순간 ‘칼국수 먹을 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올 수도 있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저녁에 먹으면 그만인데. 고민하는 데 들어갈 시간을 아낀 김에, 밥을 먹은 뒤 좋은 봄 날씨를 느끼며 산책을 즐겨도 좋을 것 같다. 글·그림 서메리 작가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