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선생이 뉴욕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50주년이 됐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과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
뉴욕 작업실에서 점화를 작업 중인 김환기 작가.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사진 제공
뉴욕 작업실에서 점화를 작업 중인 김환기 작가.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사진 제공
“구구삼정(鳩鳩森亭)에 나오면 하늘도 보고 물소리도 듣고 불란서 붉은 술에 대서양 농어(弄魚)에 인생을 쉬어가는데 어쩌다 사랑이 병이 되어 노래는 못 부르고 목쉰 소리 끝일 줄 모르는가.”

김환기가 미국 뉴욕의 병원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말을 할 수 없어 수화로 이야기했고, 이를 기록했다. 이 수화를 나누고 3일 뒤 그는 뉴욕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1963년 록펠러 재단의 기금으로 뉴욕에 자리를 마련한 지 10년 만이었다. 목과 허리 통증이 심했던 그는 큰 수술을 받은 뒤 뇌사 상태에 빠져 사망했다. 비록 조국을 떠나 파리와 뉴욕에서 주로 생활했지만, 정작 그의 그림은 가장 한국적이기도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너무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파리에서의 삶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두어 폭 팔아서 구라파 여행을 3년 할 수 있다든지 한 폭 팔아서 그 흔해 빠진 고급 차와 바꿀 수 있다든지 한다면야 나도 먹고사는 사람인지라 팔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러나 어디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인사가 있기를 바라겠는가.” _1955년 일기

1950년대 중반, 한국은 이제 막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 재건에 주력하던 시기였다. 당시 한국은 1인당 GDP 100달러도 언감생심이던 최빈국이었다. 김환기는 1956년 이미 파리로 건너가 3년을 그곳에서 활동했다. 당시 파리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였기에 그는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했다. 3년 동안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지만, 아시아 최빈국에서 온 작가의 작품이 온전히 평가받기에 파리의 벽은 높았다. 실제로 그는 파리의 갤러리 관계자와 만나면서 “후진국 작가라고 대접을 안 하는 것 같아”라며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경제적 여유라도 있었다면 파리에서 조금 더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겠지만, 이 부부는 경제적으로도 이미 최악의 상황이었다. 자신을 홀대했던 갤러리를 찾아가 작품을 팔고 나서야 다시 한국에 돌아갈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다시 교수직을 맡았지만, 홍대 재단과 이런저런 갈등 끝에 지칠 대로 지친 그는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여한다. 브라질로 떠나기 전 미국 록펠러 재단이 한국 예술에 관심이 많은 데다 기금을 준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잠깐 다시 뉴욕행을 생각했다. 어차피 브라질로 가려면 미국을 거쳐야 하니 돌아오는 길에 뉴욕에 잠깐 들러볼 생각이었다. 상파울루에 도착한 후 그의 생각은 더욱 구체화됐다. 세계 미술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유럽 회화는 예전보다 에너지가 떨어져 있었지만, 미국의 추상회화는 상대적으로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뉴욕이 새로운 미술의 중심지임은 확실했다. 그는 그길로 계속 뉴욕에 머무르게 된다.
‘매화와 항아리’, 1957.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매화와 항아리’, 1957.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뉴욕에서의 삶
“태양처럼 찬란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항상 뜨거운 것을 잃지 않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_1963년 일기

뉴욕 생활은 파리보다는 나았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는 갤러리스트들이 있었고, 록펠러 재단의 기금도 있었다. 물론 파리보다 나을 뿐, 가난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뉴욕에서도 초기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64년 뉴욕 아시아 하우스 갤러리에서 치른 첫 개인전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최근 작품 30여 점을 전시했으나 ‘아시아적 영향의 흔적이 없다’거나 ‘작품이 안료 속에 갇힌 것 같다’는 정도의 반응이 전부였다. 물론 이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었으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김환기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한 미국인에게 보편타당하게 다가갈 수 있는 미술적 언어가 필요했다. 이후 그가 찾은 방법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점화’다. 점화는 화면 전체에 점을 배열하고, 칸을 치고, 다시 반복해 점을 찍어 화면을 구성하는 김환기만의 독자적 화풍이다. 대표적 작품은 한국 현대미술 최고가를 기록한 ‘우주’(1971),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같은 작품이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김환기의 점화는 아트 딜러들이 먼저 알아봤다. 그간 그를 찾아온 것은 소규모 갤러리였는데, 뉴욕의 메인 갤러리 중 한 곳인 포인덱스터 갤러리가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며 작업실로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아름답고 격이 높은 추상 세계’라며 1개월간 전시를 제안했고, 김환기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전시 이후 <뉴욕타임스> 등 메이저 매체의 취재도 계속됐다.

“김환기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정신을 가라앉히는 서정성에 있다. 이 작품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그 무엇을 발견할 것이며, 그 새로움은 작품에서 느끼는 어떤 사상이나 아이디어를 뒷받침해줄 것이다.” _<아트 뉴스> 1971년 9월호

“그의 독창성은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불규칙한 둥근 점을 둘러싼 작은 정사각형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무궁무진해 보인다.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난해한가 같은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만의 방식과 시각으로 가장 매력적인 전시회를 열었으니.” _<뉴욕타임스> 1971년 10월 2일자


뉴욕에 온 지 8년 만에 처음 받은 전시평이자 대단한 호평이었다. 같은 시기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도 <김환기 근작전>이 열려 좋은 평가를 얻었다. 작품이 좋은 가격에 팔리기 시작했고, 그를 평생 동안 따라다니던 경제적 곤궁도 어느 정도 해결됐다. 몇 년 더 미국에 있으면 더 큰 성취를 맛볼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병마가 그를 조금씩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김환기는 신장이 약 185cm로 상당한 장신이었다. 게다가 움직이면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고정한 상태에서 작업할 일이 많았다. 심지어 대작을 고집하다 보니 하루 10시간 이상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목 디스크는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그런데도 진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미국의 민간 의료보험료가 너무 비싸서 가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목 디스크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다음 날 새벽 병상에서 떨어지며 머리를 크게 다쳐 이후 깨어나지 못했다.
향년 61세. 아쉽고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10년 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위해 떠났던 그는 이후 한국에 들르지 못한 채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이 평소 좋아했던 뉴욕주의 한 묘지에 안장되었다. 부인 김향안 여사는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다”는 말로 슬픔을 대신했다.
‘봄의 소리 4-I-1966’, 1966.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봄의 소리 4-I-1966’, 1966.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유니버스 5-IV-71 #200’, 1971.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유니버스 5-IV-71 #200’, 1971.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죽음 이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김환기 사후 국내에서는 다양한 회고전이 열렸고, 그제야 언론과 일반 대중도 김환기의 인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88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7년에 열린 ‘제1회 화랑협회 경매’는 한국 최초의 옥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매에서도 김환기의 ‘새’는 최고가인 4000만 원에 낙찰되며 이후 펼쳐질 한국 미술의 르네상스를 예견케 했다. 부인 김향안 여사는 서울 부암동 산마루에 3년에 걸쳐 주변 땅을 조금씩 사모아 1992년 환기미술관을 건립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 가격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김환기의 점화 시리즈는 2016년 63억 원(노란색 전면점화), 2018년 85억 원(붉은색 전면점화), 2019년 131억 원(우주) 등 한국 미술품 최고가를 고쳐 써왔다.
김환기는 뉴욕에 머무는 동안 한국의 동료들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스스로 ‘친구들, 그것도 죽어버린 친구들,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점화를 그렸다’고 할 만큼. 김환기의 작품에 대한 세계의 인정은 단색화로 명명되는 동료 및 후배 작가, 그리고 현재 세계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러 한국 아티스트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김환기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술을 보는 우리의 시야를 넓혔다는 데 있다. 김환기의 작품을 직접 본 사람들은 한 폭의 미술 작품이 삶에 대한 철학이자 사상,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음에 놀라곤 한다. 그 순간을 관람자에게 전달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김환기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는 미술관 오픈 준비가 한창이다. 특이하게도 물 위에 떠 있는 플로팅 뮤지엄(Floating Museum)이 콘셉트다. 올해 상반기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환기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는 미술관 오픈 준비가 한창이다. 특이하게도 물 위에 떠 있는 플로팅 뮤지엄(Floating Museum)이 콘셉트다. 올해 상반기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글 이기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