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슬럼프>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주인공들은 환자가 아플 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아프다.

[컬처 인사이드]
사진=JTBC
사진=JTBC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여성이 그 가운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비척거리며 길을 걷더니 횡단보도 한가운데 주저앉는다. 급성 담낭염이 발작한 대학병원의 임상강사 남하늘은 덤프트럭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데도 도무지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머릿속으로 멈추지 않는 생각을 굴린다. “평범했던 일상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3분,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는 담배를 태우고, 누군가는 수학 문제를 하나쯤 풀며, 또 누군가는 행복을 느낄 때,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

작은 얼굴을 절반쯤 가리는 캡을 쓴 젊은 여성이 백랍같이 말라붙은 입술을 한 채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엄마가 잠시 손을 놓은 사이 비칠비칠 도로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아예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 앞으로 질주한다. “그날 횡단보도에서 차가 오는데도 제가 안 피하니까 엄마가 놀라셨나 봐요. 하지만 그건 그냥 그 순간뿐이었어요. 저는 정말로 죽으려 한 적은 없다고요.” 우울증에 걸려 보호병동에 입원한 간호사 정다은은 담당의사에게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역설한다. “우울증을 앓고 계신 분들 중에 급격하게 자살 충동이 심해졌을 경우, 기억도 왜곡해서 인지하고 있거나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닥터 슬럼프>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의사 또는 간호사, 우리가 아플 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대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프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일상이라는 것은 매일 변하지 않는 어떤 일들이 되풀이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래된 동요 속의 가사처럼 둥근 해가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닦고 세수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아침식사를 하고 등원을 하거나 등교를 하거나 출근을 하거나 그런 사람들을 배웅하는 삶. 매일 되풀이되기 때문에 영원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일상이 드라마의 주요한 소재로 부상하고 있다.

사실 이 일상의 드라마틱한 부상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드라마의 단골 소재들은 일상과는 거리가 먼 자극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상은 변함없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니만큼 어지간해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마치 공기나 물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데도 그 고마움이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처럼. 일상은 희박해질 리 없이 안전하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상이 드라마의 소재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고’ 절대 ‘사라질 리 없는’ 그 안전함이 희박해지는 까닭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 불가능한 시대

“우울증이요? 제가요? 나 나름 잘 살고 있는데.” 급성 담낭염으로 도로에 쓰러졌을 때 덤프트럭에 치일 뻔 했던 남하늘은 그 순간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아 정신과를 찾아간다. 진료실의 정신과 의사는 가을 물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본인이 지쳤다는 걸 인지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고, 우리는 모두가 정서적 탈진의 시기를 겪습니다.”
번아웃. 어떤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누적돼서 무기력증이나 우울감 등의 증상이 생기는 것. 드라마는 그녀를 이렇게 진단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모의고사 전국 1등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똑부러지게 야무진 맏딸로서 매 순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온 남하늘은 그 진단을 맥주 한 잔에 털어 버리려고 한다. “나 괜찮다고!”

마음의 병은 마음이 병 들어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정신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실 성장하는 모든 존재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 없이는 성장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청춘은 아파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스트레스의 극복을 수반한다는 점을 지시하는 일종의 사실 명제다. 문제는 그 스트레스가 포화 상태가 될 때, 개체가 스트레스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부하되고 누적될 때일 것이다.

대개 야무진 사람들,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은 그 선을 넘으면서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선택했으니까, 선택한 것은 책임을 져야 하니까,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은 볼썽 사나우니까 입을 꾹 다문 채 하던 일을 대신한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동료나 친구들에게 눈총을 주면서 느끼는 우월감을 진통제 삼아 더욱더 자신을 몰아붙인다. 발산된 것들은 가벼워진다.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전통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그러나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는 스트레스는 몸 안에 누적된다. 발화하지 못하는 정신을 대신해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번아웃은 그렇게 오는 마음의 병이다.

초등학교 앞에서 한 기자가 이제 막 학교생활을 시작한 1학년 학생을 붙들고 물어본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아이는 세상 풍파를 다 겪어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조차 희박해진 돌하루방 같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빨리 대학 가서 쉬고 싶어요.” 대학 문턱을 넘는 순간, 거기서부터 진짜 경쟁이 시작된다는 걸 알지 못하는 것이 유일하게 아이다운 치기로 느껴지는 대답.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삶은 이미 다 소진된 듯 보였다.

사회 전체에 만연한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는 아이들에게도 성인과 다르지 않게 과부하 된다. 두발과 복장의 자유를 보장하는 학생권에는 학습권은 있어도 휴식권은 없는 모양이다. “하루라도 쉬고 싶다”는 아이들의 비명에 학원 일요휴무제가 뜨거운 감자가 된 것도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일요일에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는 새로운 과외 수업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벌써 10여 년이 된 인터뷰 속의 아이는 아마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졸업하고 막 사회인이 됐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이미 ‘탈 대로 다 타’ 버린 청춘들이 그렇게 우리 사회를 채우고 있는 셈이다.
사진=JTBC
사진=JTBC
현대인은 모두가 정신병자

시스템이 세분화되고 복잡화된 현대 사회에서 정신병은 일종의 ‘감기’와도 같이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질병으로 간주된다. 집안의 아이 하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조부모, 부모, 수험생 본인까지 적어도 삼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농담이 자연스러운 나라,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심지어 영어유치원까지도 과열된 입시가 치러지는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입시 경쟁이 치열한 학군 내에 유소년을 위한 정신과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불치병 혹은 난치병이라는 말로 특수한 질환들을 구별하기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질환은 상당 기간 동안의 관리를 필요로 한다. 직접적인 병인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일 수 있지만, 더 많은 경우 환자의 생활습관과 환경이 발병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정신병자”라는 말도 그렇게 이해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특성이 사람의 정신을 더 쉽게 병들게 하는 것이다.

“저도 우울증이랑 공황으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아내가 밖에 나가서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는데, 사실이니까요.” 자신의 경험에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연출 아이디어를 얻었던 이재규 프로듀서(PD)는 “드라마를 찍으면서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수없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동일한 병명의 육체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해서 환자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닌 것처럼, 동일한 병명의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그 양상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동병상련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앓아봤다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저 ‘나도 아프니 너도 아프겠거니’ 헤아리며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조금은 마음에 위안을 삼을 수 있게 될 뿐이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온다

불현듯 마음의 균형을 잃은 채 무기력한 삶이 찾아올 때가 있다. 외롭고 지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정서적 탈진의 시기, 혹은 일부러 누군가가 망쳐 놓기라도 하듯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그런 시기를 우리는 흔히 슬럼프라 칭한다. <닥터 슬럼프>의 주인공 남하늘은 입시라는 무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을 극단까지 몰아붙인다.

그녀가 수학 문제 하나를 더 풀기 위해 뛰어다니고, 화장실 갈 시간을 아끼기 위해 물에 타지도 않은 커피 가루를 마시는 것은 조금씩 커진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병으로 시달리면서도 면회 온 딸에게는 웃어 보이는 아빠를 위해, 너무 일찍 아이를 낳고 또 너무 일찍 과부가 돼서도 잘난 딸 하나만은 최고로 키우려고 최선을 다하는 엄마를 위해서다. 그래서 그녀는 맛있는 것은 맨 마지막에 먹고 모든 즐거움은 나중으로 미룬 채 앞만 보며 달려 왔다. 그러나 학창시절에는 17시간씩 꼬박 채워 공부하고 임상강사가 된 지금은 17시간이 넘도록 일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 없는 굴욕과 치욕의 나날뿐이다.

슬럼프에 빠진 마음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빠서,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이 너무 아까워서,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결승점이 보여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휴식을 유예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그 휴식이라는 처방이 선택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이 될 때까지 유예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는 그렇다. 팔이나 다리를 다치면 깁스를 하고, 큰 수술을 하고 나면 ‘절대안정’이라는 처방을 받는다. 절대안정이란 다치거나 병든 부위를 아예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뼈에 금이 가고 피가 나는데 목발을 짚고 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마음이 부러지고 다쳐서 병이 됐을 때는 종종 그렇게 말한다. “괜찮아. 다들 그렇게 살아.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정신력의 문제야. 움직여보면 움직일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하고 부추긴다. 가끔은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우울증이라는 딸의 말에 엄마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한다.

세상에 둘도 없이 똑똑하고 야무지고 착하고 책임감 강하고 배려심 넘치는 내 딸이 그런 나약한 병에 걸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마취과 의사인 내 딸이, 정신병동 간호사인 내 딸이, 최선을 다해 최고로 키웠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직업을 가진 내 아이가 우울병이라니, 딸의 병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이 부정될 것만 같은 엄마는 병을 진단한 의사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욕하며 고개를 내젓는다. 딸이 자신의 손을 놓고 달려오는 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도할 때까지.
사진=넷플릭스
사진=넷플릭스
우리는 불사조가 아니다

아라비아사막에 살며 500년에 한 번씩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유년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새가 있다. 스스로를 불태워 죽고, 죽은 뒤에는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이 새의 이름은 ‘불사조’, 즉 ‘죽지 않는 새’다. 그러나 사실 그 새는 현실이 아닌 신화와 전설 속의 존재다. 현실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비슷한 우화가 있다. 태어나서 40년 이상 살아 노쇠한 독수리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 스스로 무뎌진 발톱과 부리를 깨뜨리고 젊음을 되찾으면 다시 30년 이상 사냥을 할 수 있는 맹금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독수리는 40년까지는 살아남기 어렵다. 야생에서는 20~25년의 삶을 유지할 뿐이고 동물원에서 살 때나 겨우 40년을 넘긴다고 한다. 자연 상태의 동물들은 스스로 부리를 깨뜨리거나 발톱을 뽑는 등 자해 행위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신체의 훼손은 자연 상태에서의 자기 보호에 치명적이고, 먹이를 사냥하지 못하거나 천적을 피하지 못하는 동물은 생존이 어렵기 때문이다. 제 발톱과 부리를 스스로 깨뜨리고 다시 한번 높이 비상하는 독수리의 이야기는 끊임없는 재교육이 불가피해진 현대 사회의 생존을 위해 창조된 우화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정상과 비정상, 의식과 무의식, 건강과 질환, 장애와 비장애. 사실 이러한 구분들은 경계를 통해서만 확인된다. 경계라는 위치는 이쪽과 저쪽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시선은 경계의 이쪽, 즉 사회 유지를 위해 용인되는 쪽에 머문다. 때로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헛발을 디뎌 경계의 저쪽으로 기울어진 경우에도 경계의 이쪽만을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위치가 경계의 이쪽에 가깝다고 인식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경계에 있다는 것은 경계를 넘지 않아서 안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제든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경계의 이쪽과 저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기도 하다. 경계의 수위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썰물이 지나가기를

감기에는 약이 없다고 한다. 바이러스의 변종이 너무 많아서 그 각각의 병인에 대응하는 치료제를 일일이 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기에 걸려 약을 먹는 것은 병인을 없애서 치료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증상을 완화함으로써 우리가 보다 쉽게 그 질환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또한 감기로 인해 기관지염이나 폐렴과 같은 감염에 의한 합병증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병을 이겨내는 것은 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똑같은 감기라도 아이보다는 어른이 좀 덜 걸린다. 건강한 청장년보다는 노인에게 감기는 더 위험하다. 몸의 면역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는 걸리지 않던 감기도 체력에 문제가 생기고 면역이 떨어지면 쉽게 걸린다. 오랜만에 걸린 감기에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정말 죽지 않을 만큼만 아프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약을 먹고 눈을 감고 세상과 닫은 채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정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요?” 담당 환자의 죽음으로 일시적인 해리를 겪었던 정다은에게 직장의 대모님 같은 수간호사가 따뜻한 차 한 잔 같은 위로를 건넨다. “그럼 당연하지. 당연한데,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거지. 일정한 시간에 잠들고 일어나 봐. 밥도 잘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러다 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생명이 활동을 멈춘다는 것이 아니다.

아파 보면 안다. 내가 열심히 뛰고 있었던 것처럼, 내 몸 안의 모든 세포가 정말이지 나 못지않게 안간힘을 쓰면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아프지 않게 하려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내 몸도 마음도 열심히 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외롭고 지치고 힘들 때 쉬어야 하는 것처럼, 내 몸과 마음도 외롭고 지치고 힘들 때는 쉬어야 한다. 썰물이 다 지나가고 밀물이 오기까지. 썰물인 동안에도 지구는 제자리에서 돌고 달은 지구 주위를 돈다.
번아웃이 드라마가 되다
글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 사진 JTBC·넷플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