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초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인지 능력 저하와 관련된 질환 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 은퇴 이후 오랜 기간 소득 없이 살아가야 하는 고령자들에게 치매에 대비한 자산 관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이에 따라 고령자의 경제적 존엄을 지키기 위한 해법으로 '신탁'이 주목받고 있다.
[상속 이슈]
기대수명이 높아지면서 여러 질병에 노출될 위험이 증대되고 있는데, 특히 인지 능력과 관련된 질병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2년 기준 고령자 중 치매상병자 수는 92만3003명으로 고령자의 10.2%를 차지하고, 추정 치매환자 수는 93만5086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러한 추정 치매환자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고령사회 재정 위기, ‘자산관리’ 시급
공적인 부양을 기대해볼 수 있겠으나 생산가능인구가 부담하는 고령자 수가 급증해 그 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닫고 있고, 공적 부양을 받더라도 이는 개개인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계비에 그친다. 한편, 과거 전통적인 효 사상에 따라 고령자에 대한 공경이나 부양이 당연시되던 것에 비해 현대 사회에서는 가정과 사회에서 고령자의 지위가 약화되고 가족 구성 내지 부모 부양에 대한 인식이 변화해 자녀로부터의 부양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고령자는 보유 중인 자산을 관리해 스스로 은퇴 후의 생활비, 의료비 등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종전의 자산관리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자산관리 방식인 위임계약의 경우,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재산의 소유권이 위임인인 고령자에게 남아 있고 관리·처분을 위한 법률 행위의 당사자도 고령자이기 때문에 고령자가 제3자와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거나 사기를 당해 재산을 처분한다면, 해당 재산을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장 안정적인 자산관리 방안으로 손꼽히는 예금 계약도 고령자가 치매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이 곤란한 상황이 되면 고령자의 의지대로 자산을 관리하는 것이 어렵다.
예컨대 고령자가 금융기관에 50억 원을 예치한 상태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면, 고령자가 평소 의욕했던 대로 이를 부도 위기 자녀의 사업자금이나 손주의 학자금으로 쓰는 것이 불가능하고 후견이 개시되지 않는 이상 본인의 병원비로 쓰기 위해 인출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신탁이다. 신탁은 위탁자와 수탁자 간의 신임 관계에 기해 위탁자가 수탁자에게 특정의 재산을 이전하고 수탁자로 하여금 수익자의 이익 또는 특정의 목적을 위해 그 재산의 관리, 처분, 운용, 개발, 그 밖에 신탁 목적의 달성을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하게 하는 법률 관계로서, 일종의 재산관리제도에 해당한다. 신탁은 다른 재산관리제도와 달리 신탁재산의 소유권이 수탁자에게 완전히 이전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재산을 수익권이라는 채권 형태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보유한 재산을 다양한 수익권으로 변형해 활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신탁은 재산관리제도로서 다양한 장점을 갖는다.
신탁으로 치매에도 끄떡없는 자산 설계
첫째, 신탁재산의 독립성이 인정된다. 위탁자가 신탁을 설정한 후에 재산 상황이 변동하더라도 신탁을 설정할 때 예정됐던 재산 관리 방법은 그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령자가 미리 자산을 신탁하고 노후를 설계한다면, 추후 인지 능력이 감퇴하더라도 이미 자산이 수탁자 명의로 이전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당 자산을 노리는 사기를 당하거나 불리한 거래에 노출되는 위험을 없앨 수 있고, 갑작스레 부채를 떠안더라도 신탁재산은 기존에 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둘째, 신탁을 설정하면 위탁자가 자산의 관리와 운용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수탁자를 통해 적절한 관리와 운용을 맡기는 자산관리 대행이 가능하다. 예컨대, 고령자가 아파트 한 채만 보유하고 다른 재산이 없는 경우라면, 이 부동산을 운용해 월세 상당의 수익을 발생시켜 생활비와 실거주 공간을 위한 차임으로 제공하거나, 고령자가 해당 부동산에 거주하면서 주택연금을 받고 일부 공간을 임대해 수익을 발생하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용해 보다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신탁은 수익권이라는 채권 형태로 재산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위탁자는 자신이 보유한 재산을 다양한 형태로 변형해 활용할 수 있다. 즉, 소유권이라는 고정된 권리를 수익권으로 전환해 ‘여러 명에게 나누거나’, ‘여러 단계의 권리로 나누거나’, ‘여러 시간에 나누어 행사할 수 있도록 나누는’ 등의 유연한 모습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 통해 다양하고 탄력적인 자산관리 방안을 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신탁은 자산관리 수단으로서 뛰어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중에게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신탁을 설정하면 각종 절세는 물론 상속 절차에 소요되는 비용을 절감하는 경제적 효용이 있는 해외 사례와 달리, 우리나라는 이러한 경제적 효용이 부족하고 금융기관을 수탁자로 할 경우 적지 않은 보수를 지급해야 하는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이 아닌 일반인을 수탁자로 하는 신탁을 고려해볼 수 있지만, 수탁자의 횡령에 대한 불안감, 안정적이고 전문적으로 신탁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기대 등을 고려하면 전문적인 수탁기관이 선호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수탁자의 전문성을 갖추면서도 위탁자에게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공공신탁을 고려해볼 수 있다.

공공신탁은 특정 목적을 위한 신탁을 수행하는 전문적인 수탁기관을 선정하고 국가가 신탁의 설정 및 실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용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다. 대표적인 사례로, 싱가포르의 특별수요신탁회사(Special Needs Trust Company·SNTC)가 있다. SNTC는 장애인 내지 고령자를 위한 재산 관리를 목적으로 싱가포르 사회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비영리법인이다. 신탁재산은 장애인의 부모, 고령자 등으로부터 위탁받고, 수탁 업무는 사회복지 업무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소요되는 각종 비용은 대부분 사회가족부가 지원하기 때문에 위탁자는 전문적인 수탁기관을 수탁자로 신탁을 설정하고 운용하는 데 따른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이를 통해 신탁을 통한 자산관리가 필요한 고령자에게 양질의 신탁 서비스를 낮은 비용에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고령자와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회 현상이다. 고령자가 경제 활동을 마친 이후 살아가야 할 날이 길어진 것에 비해, 국가가 고령자의 삶을 지원해줄 역량은 더욱 부족해지고 있고 그마저도 각 고령자가 희망하는 수준에 이르기는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령자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활용해서 고령자의 노후를 대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피한데, 신탁이 답이 될 수 있다.
신탁은 고령자의 자산을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이며, 이러한 신탁의 장점은 전문적인 수탁기관을 통해 극대화될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는 신탁을 설정하기 위한 경제적인 유인이 없는 반면 전문적인 수탁기관을 수탁자로 할 경우 상당한 신탁보수가 발생하기에 고령자가 신탁을 접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고령자가 수수료에 대한 부담 없이 자산을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공공신탁을 도입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때 주요 재원이 되는 신탁재산은 국가가 아닌 개별 고령자가 직접 출연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비용이 크지 않으면서도 그 효과는 분명한 매우 효율적인 복지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웅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