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화폐 시대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 특히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진 가운데, 쇄국의 공포보다는 구조적 충격을 완충할 규율과 기술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스페셜] 스테이블코인 따라잡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왼쪽 두 번째부터)가 지난 1일 ‘변화에 대한 적응 거시경제 변동 및 정책 대응’을 주제로 포르투갈에서 열린 각국 중앙은행장 토론회에서 제롬 파월 미국 Fed 의장(세 번째),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네 번째) 등과 스테이블코인 규제 방안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사진=ECB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왼쪽 두 번째부터)가 지난 1일 ‘변화에 대한 적응 거시경제 변동 및 정책 대응’을 주제로 포르투갈에서 열린 각국 중앙은행장 토론회에서 제롬 파월 미국 Fed 의장(세 번째),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네 번째) 등과 스테이블코인 규제 방안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사진=ECB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네이버, 카카오 같은 빅테크부터 핀테크, 결제 스타트업까지 디지털 원화라는 황금알을 낳을 거위에 올라타려는 모습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앞세운 테더와 서클의 고속 성장 사례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탓이다.

그러나 반짝이는 겉모습 이면에는 전통 금융이 변동성 높은 가상자산 시장의 파고와 직결되고, 금융당국의 자본 통제력마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통화 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논지는 원화가 디지털로 전환되는 순간 달러로의 전환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달러 전환 자체가 아니라, 원화가 스테이블코인 형태로 바뀌며 국경 없는 퍼블릭 블록체인 위를 떠돌게 될 때 규제 손길 밖으로 벗어난다는 데 있다.
디지털 원화의 역설…‘쇄국’은 답이 아니다
자본 유출 채널 관리가 관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스테이블코인의 결정적 차이는 ‘개방성’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CBDC는 허가형(프라이빗) 블록체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통제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이더리움, 솔라나 같은 퍼블릭 체인이라는 거대한 디지털 공공망에서 작동한다.

필자는 퍼블릭 블록체인을 ‘유료 인터넷’이라고 부른다. 오늘의 인터넷이 망 중립성에 기댄 ‘정보의 무료 고속도로’라면 퍼블릭 블록체인은 수수료(가스)를 내고 신뢰를 사고파는 공간이다. 익명 기반이라는 점은 비슷하지만, 스마트 콘트랙트가 자동으로 계약을 집행하고 결제와 공증을 동시에 처리한다는 점에서 온라인 사기의 상당 부분을 구조적으로 줄여준다.
디지털 원화의 역설…‘쇄국’은 답이 아니다
물론 코드가 완벽한 방패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프로젝트 설계 미흡이나 악성 설계자가 끼어들면 피해는 여전히 발생한다. 다만 체인을 면밀히 살피면 자금 흐름을 투명하게 추적할 수 있고, 코드 감사로 상당수 위험을 사전 차단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거대한 ‘웹3 경제권’이 국가라는 울타리 밖에서 자율적으로 돌아가고, 그 안팎을 잇는 관문(온·오프 램프)이 충분히 단속되지 않을 경우 자본 유출 채널이 상시 열려 있다는 점이다. 1997년 외환위기 트라우마가 짙은 한국 사회가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디지털 원화의 역설…‘쇄국’은 답이 아니다
한국이 최초로 도입한 트래블룰

그렇다고 문을 걸어 잠글 수만은 없다. 미국은 2기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가상자산 제도화의 속도를 높이고 있고, 유럽은 이미 '암호자산 시장 규제(MiCA)'에 합의했다. ‘쇄국’은 선택지가 아니다. 관건은 개방의 동력을 살리면서 부작용을 흡수할 완충 장치를 설계하는 일이다. 한국 외환 시장도 완전 자유화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 개인이 신고 없이 해외로 송금할 수 있는 한도는 연 10만 달러다. 필요하면 금융위원회·관세청·금융정보분석원(FIU) 협업으로 수시 조정을 거쳐 과도한 외화 유출을 조절한다.

가상자산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 총량 자체보다는 통제권 밖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관리해야 한다. 업비트나 빗썸 등 국내 거래소 내부에서 보유하는 토큰은 실질적으로 국내 금융 시스템에 묶여 있으므로 시스템 리스크 전이가 제한적이다. 위험은 이용자가 해외 거래소나 개인 지갑으로 대규모로 옮겨 갈 때 발생한다.

한국이 2022년 3월 세계 최초로 도입한 ‘트래블룰’은 그런 맥락에서 선제적 조치였다. 트래블룰은 100만 원 이상 가상자산 전송 시 송·수신자 실명 정보를 거래소 간에 동봉하도록 의무화한다. 은행 전신송금 규칙을 가상자산으로 확장한 것으로, 자금세탁방지(AML)·테러자금조달방지(CFT) 리스크를 거래 단계에서 미리 봉쇄하는 장치다.

실제로 솔루션 장애로 일부 거래소가 일시적으로 트래블룰 정보 전송이 막히자, 100만 원 초과 출금이 즉시 정지되는 사례도 있었다. 규제망이 작동했기에 ‘돈이 증발한 채 사각지대로 빠져나가 버리는’ 사태를 막은 셈이다.

집중관리 토큰과 일반 토큰 ‘이원화’

원화 스테이블코인 역시 비슷한 프레임이 가능하다. 발행·결제·송금이 국내 승인 사업자 시스템 내에서 이뤄진다면, 1대1 페깅만 확실히 유지되는 한 결제 혁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외부 지갑으로 이동되는 물량에는 ‘통화 정책에 견딜 만한 한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투자 기회를 좇아 해외 시장으로 나가야 할 자금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제한 개방은 정책당국과 중앙은행을 무력화한다. 그렇다고 한도를 너무 빡빡하게 묶으면 국내 시장의 혁신 인센티브가 사라진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필자는 ‘집중관리 토큰’과 ‘일반 토큰’의 이원화를 제안한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전략적 및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자산은 엄격한 외부 반출 한도를 두고, 변동성이 크면서도 상대적으로 비우량한 알트코인 쪽에는 느슨한 규율을 적용하는 모델이다.
서울 역삼동에 있는 가산자산거래소 업비트 라운지. 사진=한국경제
서울 역삼동에 있는 가산자산거래소 업비트 라운지. 사진=한국경제
한국 투자자는 원래 고위험·고수익 포트폴리오 선호가 강해 알트코인 거래 비중이 해외보다 월등히 높은데, 이런 구조적 특징을 활용해 ‘안정적 가치 저장 수단’의 탈출을 억제하면서 시장 활력을 지키자는 발상이다. 시간이 흐르면 알트코인에서 생기는 환차익, 변동성 이익은 자국 내 다시 비트코인, 이더리움으로 환류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결국 국내에 우량한 가상자산이 누적되는 효과도 노릴 수 있다.
디지털 원화의 역설…‘쇄국’은 답이 아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구조 측면에서는 100 % 예치금 의무를 관철해야 한다. 준비금은 국내 은행 원화 계좌 및 저위험 채권, 머니마켓펀드(MMF)에만 예치하고, 필요하면 한국은행이 지급준비금·예수금 계정을 별도 관리해 ‘협의 은행(narrow-bank)’ 모델을 구현할 수 있다. 온체인에서는 준비금 토큰화를 통해 일일 잔액과 유통량을 자동 공시하게 하고, 분기마다 스트레스 테스트를 한다면 위·변조 관련 우려가 크게 줄어든다.

‘스마트 댐’ 만들자

더 나아가 외부 지갑 송금 시 컨센서스 레이어에 신고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를 붙여 관세청, FIU에 실시간 데이터가 전송되도록 설계하면, 스테이블코인이 디지털 원화로서 경제 효율성을 증진하면서도 자본 통제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도록 할 수 있다. 여기에 한국은행이 개발 중인 CBDC나 토큰예금과 연동해 공공 디지털 화폐와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서로 보완하도록 하면, 민간이 혁신하고 공공이 안전판을 깔아주는 투 트랙 구조가 가능하다.

이 모든 장치는 결국 블록체인 안의 디지털 자산이 실물경제와 맞닿는 출입구을 겨냥한다. 가상자산은 이미 탈국경성, 탈규제성을 선취했다. 규제당국이 할 일은 그 흐름을 억지로 막는 대신 온오프 램프, 스테이블코인, 금융기관 익스포저라는 세 갈래 수도꼭지를 촘촘히 조절해 물살은 유지하되 범람을 방지하는 ‘스마트 댐’을 짓는 일이다. 트래블룰 같은 선제적 제도가 이미 초석을 놓았고,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그 위에 세워질 다음 층이라면, 남은 과제는 설계의 정교함이다.

디지털 화폐 시대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조류다. 쇄국의 공포보다는 구조적 충격을 완충할 규율과 기술을 갖추는 편이 장기적으로 자본 효율과 금융 경쟁력을 모두 지키는 길이다. 통제 가능한 개방이라는 역설적 목표가 바로 지금 한국 금융당국 앞에 놓인 과제다.

박태우 스페이스바 벤처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