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장(臨場), 발품을 팔아 관심 있는 지역을 꼼꼼히 탐방하는 것이죠.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는 코너 ‘임장생활기록부’. 이달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다녀왔습니다
[임장생활기록부] 24 -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빠지지 않는 아파트가 있습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는 “은마 재건축 확정 기념 디녀쇼에 79세 원로가수 아이유 씨가 나선다”는 가짜뉴스 밈이 유행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그만큼 재건축 속도가 느리다는 겁니다.
은마는 강남의 대표적인 1세대 아파트입니다. 사람 나이로 치면 어느덧 마흔여섯 살이네요. 1979년 한보건설이 시공한 28개 동 총 4424가구 규모의 대단지입니다. 당시로서는 꽤 혁신적인 규모였습니다. 전용 84㎡ 기준 2700만 원에 분양됐었고요.
사실 가장 불편한 건 주차 문제일 겁니다. 단지 규모는 크지만 지하주차장이 없다 보니 지상의 모든 공간은 주차된 차들로 빼곡합니다. 이중 주차, 삼중 주차는 기본이고요. 차들끼리 맞닿아 '뽀뽀'한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어요. 겹주차된 차들을 이리저리 밀다 보니 어쩔 수 없긴 합니다.
저희가 취재를 하는 도중에 한 입주민이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이중 주차된 차를 밀어야 본인의 차를 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차가 꿈쩍도 하지 않았거든요. 지나가던 사람에게 "같이 차 좀 밀자"고 하는 건 은마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대치동은 국내 대표적인 학군지이자 최대 규모의 학원가입니다. 대치동엔 공부 잘하는 고등학교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전국 100위권 고등학교가 10개 이상 되거든요. 정부의 강남 개발 정책에 따라 강북의 주요 고등학교를 대치동으로 몰아준 덕분이었죠. 대치동은 상위권 학생들이 특목고나 자사고에 진학하지 못했을 경우 어느 학교에 가도 고민이 없는 전국 유일한 학군지입니다.
공교육 자원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교육도 대치동으로 몰리게 됐고 '규모의 경제'가 형성된 거죠. 영유아 대상의 영어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초중고 학원, 사회 과학 등 탐구과목 학원, 논술 및 문해력 학원, 예체능 학원을 비롯해 재외국민 입시 같은 특수 분야와 과학 실험, 코딩, 로봇, 유학, 컨설팅, 토플, SAT(미국 대학수능시험) 등 모든 영역의 사교육 학원이 있습니다.
굼벵이 재건축 속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 있는데 은마는 왜 다른 아파트보다 재건축 진행 속도가 유독 더딜까요. 일단 덩치가 너무 큽니다. 4500가구 가까이 되는 대단지이다 보니 조합원들이 워낙 많아서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분도 적어 사업성도 떨어지는 편이고요. 게다가 강남 1세대 아파트, 강남 8학군의 상징, 강남 집값을 움직이는 영향력 등 세간의 시선과 부담도 큽니다. 정부와 서울시의 각종 규제도 한몫 했고요.
사실 은마는 일찌감치 재건축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96년이었으니까 정말 오래 됐죠. 하지만 2003년 말에야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승인을 받았고, 20년이 지나서야 조합을 설립할 수 있었어요. 2003년에 재건축 예비안전진단을 실시했고 2010년 안전진단을 조건부 통과했습니다.
은마는 재건축 사업지 중에서도 내부 갈등과 분란이 심하기로 유명합니다. 주민들 사이에 여러 비대위가 등장했거든요. 최정희 조합장이 이끄는 은마반상회, 전임 추진위, 그리고 은마소유주협의회 등 세 개 파벌로 쪼개져서 진흙탕 싸움을 벌였습니다. 2022년 정비계획을 수립한 뒤 정비구역 지정까지 이뤄졌고, 2023년 조합설립인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조합 설립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내부에서 또 법적 다툼이 생겼습니다. 지난해 1월 법원이 조합장 선정 과정이 부실했다는 비상대책위원회의 가처분 신청을 인용해 사업이 한 차례 중단됐어요. 반년 뒤 법원이 다시 인용을 취소해 다행히 사업은 재개됐습니다만, 내분이 계속되면서 사업 기간은 더 장기화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노선이 단지 밑으로 지나게끔 설계된 것도 논란이 됐습니다. 국토교통부, 시공사인 현대건설과 갈등을 빚었죠. 한때 소송전까지 갈 뻔 했으나 현대건설이 곡선 반경을 줄이는 방식으로 절충안을 제시해 갈등이 일단 봉합됐어요. 새 정비계획안은 GTX-C 노선이 관통하는 곳엔 상부 공원을 조성하려고 합니다.
49층 6000여 가구 재탄생
우여곡절 끝에 정비계획을 변경해 최고 49층, 5962가구 규모로 재건축을 추진하게 됐습니다. 기존 정비계획보다 184가구를 더 짓게 된 건데요. 2023년 용적률 300%를 적용해 최고 35층에 33개 동, 5778가구로 재건축하는 정비계획안을 수립했지만, 조합 측이 역세권 개발 인센티브를 받은 용적률 320%를 적용하기로 한 겁니다.
공공임대 891가구, 공공분양 122가구가 포함됩니다. 단지 내에는 문화공원과 소공원이 들어서고요. 소공원 지하엔 대치동 학원가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공영주차장이 조성될 예정입니다. 특히 침수 예방용 빗물 저류시설을 단지 안에 설치하는 방안이 포함될 것 같습니다. 서울시가 신속통합기획 자문회의에서 공공기여 시설로 요구했고 조합이 이를 수용했거든요.
신통기획은 서울시가 민간 주도의 정비사업을 초기부터 지원해 정비구역 지정 기간을 단축하는 정책입니다. 조합 측은 서울시의 신통기획 통합 심의를 거쳐 연내 사업시행인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비계획 변경안에 대한 주민 공람을 마쳤고 시장에는 기대감이 커지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전용 84㎡가 6월 40억9000만 원에 거래된 데 이어 7월에는 42억 원에 거래되며 신고가를 재차 다시 썼습니다.
하지만 은마를 뺀 나머지 대치동 일대 구축 단지들은 재건축 추진에 시동을 거는 분위기입니다. 최근 대치미도 아파트가 정비구역으로 지정됐고요. 하반기엔 인근 정비사업장들의 수주전도 예정돼 있거든요. 부동산 시장은 은마아파트의 험난한 재건축 대장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재건축이 장기화하면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들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겠죠.
김정은 한국경제 기자 | 사진 이재형 한국경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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