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발(發) ‘산업 구조조정’의 총성이 울렸다. 정부가 글로벌 경기 침체와 과잉투자 등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해운·조선·석유화학·철강·건설 등 5대 취약 업종에 대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 방안을 내놓았다. 업계의 자율적인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지원책을 내놓는 등 ‘당근’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이제 정부가 직접 나서 손질하겠다는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다. 특히 수년째 ‘적자의 늪’을 헤매고 있는 해운업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겨누고 있다.
‘위기의 해운업’…정부 주도 구조조정 본격화
“빚 줄여야 지원해 준다”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국토교통부·해양수산부·금융위원회는 2015년 12월 30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주재로 열린 제25차 경제 관계 장관 회의에서 ‘산업별 구조조정 추진 현황과 향후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금융위원회 주도로 2016년 상반기 중에 5대 취약 업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할 전망이다.
이날 회의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산업 분야는 해운업이다. 정부는 민·관 합동 선박 펀드를 조성해 해운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해운사들이 빚 부담을 지지 않고 선박을 빌려 운항할 수 있도록 BBC(Bare Boat Charter) 방식으로 ‘선박 신조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기로 했다. BBC는 일반 금융 기업과 정책 금융회사가 펀드를 조성해 선박을 매입하고 이를 해운사가 운용하는 리스 형태의 지원 프로그램이다. 용선 종료 시 소유권이 선박 펀드에 있기 때문에 해운사가 선가 하락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또 운용 리스로 회계 처리하기 때문에 부채비율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아 해운사가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김용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해운업을 지원하는 산업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했다. 선박 건조 지원 프로그램(BBC)을 통해 신규 선박 도입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사무처장은 “BBC는 시장 안정 P-CBO(회사채 신속 인수제)와 같은 직접적인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향후 국내 해운사들의 경쟁력 회복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초기에 12억 달러(약 1조4000억 원) 규모의 선박 펀드 조성을 추진한 뒤 수요를 봐가며 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투자자는 일반 금융 기업, 정책 금융회사, 해운 선사가 참여한다. 일반 금융 기업이 전체 조성 규모의 50%로 참여하고 KDB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정책 금융회사가 전체 조성 규모의 40%, 해운사가 10% 참여하는 구도다.
또 해운 업계의 ‘자발적 구조조정’을 유도하기 위해 기업이 자구 노력을 통해 재무 상태가 일정한 조건(부채비율 400% 이하)을 달성할 때만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국내 국적 해운사 ‘빅 2’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현재 부채비율이 750%를 웃도는 수준이다. 정부의 BBC 지원을 받으려면 한진해운은 약 8000억 원, 현대상선은 약 6000억 원 정도를 추가로 마련해야만 한다.
이 밖에 정부는 운임 공표제 적용 대상을 전 노선과 전 항만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운임 협상 범위도 20%에서 10%로 줄여 시장 질서를 확립하기로 했다. 대형 선사들의 운임 덤핑 행위 제재도 함께 시행할 예정이다. 정부 지침을 불이행하거나 차등 적용하는 해운 선사에는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등록 취소, 기항 금지 등 제재를 가하게 된다.
정부는 국적 선사의 네트워크 강화를 통해 부산항 환적 경쟁력도 높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부산 신항에 연근해 선사 물량을 우선 처리하기 위한 부두를 마련한다. 국적 선사가 포함된 얼라이언스의 환적 물량 유치 활성화를 위해 터미널 간 환적 화물 이동(ITT) 효율화도 추진하기로 했다.
이번 발표에는 시황 변동 대응 능력 강화를 위해 ‘한국해운거래소’를 설립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해운거래소는 운임 변동 등에 따른 해운사들의 리스크 헤징을 위한 운임 선도 거래 시장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정부는 해운사 부실 확산 방지를 위한 사전 정보 공유를 강화하는 방침도 밝혔다. 기업 부실이 산업 위기로 전이되지 않도록 해운 선사 간 재용선 현황, 해운 부대업 거래 연체 정보를 파악하고 공유하기로 했다.
정부가 이 같은 해운업 구조조정안을 내놓게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지원으로는 ‘적자의 늪’에서 영영 구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금융 당국의 유동성 직접 지원 카드가 수포로 돌아간 경험이 있기도 하다. 2013년 회사채 신속 인수제를 통해 현대상선(1조432억 원)과 한진해운(8387억 원)이 갚아야 할 회사채를 대신 변제해 줬지만 글로벌 불황 앞에 그 효과는 미미하다시피 했다. 수조 원의 돈을 쏟아부어도 끊임없이 경영난에 허덕이는 해운업이 정부엔 ‘앓던 이’와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해운업 전체 누적 적자 규모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9조8770억 원에 달하고 이 가운데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최근 10분기 누적 적자 규모는 1조 원대에 이른다.
이 때문에 앞서 2015년 11월 9일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합병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금융위원회·산업통상자원부·해양수산부·국토교통부 등 관련 부처가 구조조정 실무 회의를 거쳐 양사의 강제 합병을 결정했고 이를 2차 차관회의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이에 대해 업계와 정부 모두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며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강제 합병설은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정부 주도의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산업 구조 재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신호를 주기엔 충분했다.


정부 주도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신호탄’
이번에 발표된 정부의 구조조정안에도 ‘정부발 구조조정’을 향한 강력한 의지가 엿보인다. 김상훈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정부가 해운업 구조조정에 12억 달러 규모를 투입하기로 했는데, 그 대상을 부채비율 400% 이하로 선을 그었다. 사실 일목요연하게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정부가 직접 해운업 구조조정에 나설 테니 채권 은행은 나서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라며 “게다가 글로벌 1위 해운 선사인 머스크와 같은 ‘빅 1’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하고 하나를 합병하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이번 발표의) 속내를 더 들여다보면 이런 작업을 정부가 직접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연구원은 2016년부터 기업 구조조정의 효과가 가시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연구원은 “기업 구조조정 전문 회사인 유암코(연합자산관리)가 구조조정본부를 신설하고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기업 구조조정 업무에 뛰어들기로 했다”며 “유암코가 직접 구조조정을 진행하게 되면 기존 채권 은행에서 가지고 있던 고민을 유암코가 해결해 줄 것이고 기업 구조조정에 중기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암코는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급증한 부실채권(NPL)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 법인으로 설립됐는데, 연내 매각이 예정됐다가 중단됐다. 정부가 별도의 구조조정 전문 회사를 설립하려던 계획을 접고 유암코 내 구조조정 업무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바꿨기 때문이다. 정부는 유암코의 구조조정 업무가 본격화되면 채권 은행 중심의 기업 구조조정이 시장 중심으로 바뀌어 구조조정 업무가 더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위기의 해운업’…정부 주도 구조조정 본격화
해운 업계, 선박 펀드 실효성에 의문 제기
이번 구조조정 계획에 대해 이명순 금융위 구조개선정책관은 “정부는 해운업 경쟁력 강화 방안 등 이번 정부 내 협의체 논의를 통해 마련된 산업별 구조조정 방향에 따라 채권단과 업계가 구조조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 정책관은 “아울러 정기·수시 기업 신용 위험 평가 등을 통한 채권단 중심의 상시적·선제적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취약 업종 산업 구조조정 사안이 있을 경우 정부 내 협의체를 통해 구조조정 방안을 지속적으로 논의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부 주도 구조조정의 첫 주자로 해운이 지목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심각한 업황 부진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등록된 해운 선사는 200여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물동량이 급격히 줄면서 간신히 수명을 잇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2위 현대상선은 5년째 적자 상태로, 10분기 누적 적자액이 6796억 원에 달한다. 1위 한진해운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2015년 흑자로 전환됐지만 누적 적자는 여전히 3000억 원을 웃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해운업 구조조정안으로 제시한 선박 펀드 운용 계획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해운 업계가 장기 침체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지원 충족 조건인 부채비율 기준을 맞추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선주협회가 150개 해운사의 경영 상황을 파악한 자료를 보면 부채비율은 2008년 197%, 2010년 247%, 2011년 330%, 2014년 378%로 높아졌다. 특히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2015년 3분기 말 개별 기준 부채비율은 각각 747%, 786%에 달한다. ‘더 이상의 증자 여력은 없다’는 게 해운 업계의 공통된 전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상 정부 지원을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또 그동안 해운 업계가 정부에 요구해 온 회사채 신속 인수제 연장이나 고금리 이자 부담 완화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지원 방안이 없어 이번 구조조정의 실효성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조현주 기자 c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