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자문서 압수는 헌법상 권리 침해”
의뢰인 권리 보호 ‘진일보’

[법알못 판례 읽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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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와 의뢰인 간 의사 교환 자료에 대한 압수 처분의 위법성을 인정한 법원 결정이 나왔다. 국내에는 변호사와 의뢰인의 비밀유지권을 골자로 한 ‘변호사-의뢰인 특권(ACP·Attorney-Client Privilege)’이 명시적으로 입법화돼 있지 않은 가운데 법원이 사실상 ACP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분석이다.

서울남부지방법원 형사11단독 사건을 맡은 정성화 판사는 2024년 2월 23일 의뢰인이 변호사와 주고받은 문서, 메일, 메시지 등에 대한 검찰의 압수가 위법하다고 결정했다.

헌법 제12조 제4항에서 명시하고 있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중 하나로서, 변호사와 의뢰인 간 의사 교환에 대해서는 변호인이나 의뢰인이 그 공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동안 수사기관이 변호사와 의뢰인 간 의사 교환 자료를 압수해 이를 수사 및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이 변호사-의뢰인 특권을 인정한 사례가 나오면서 의뢰인의 권리 보호 차원에서 진전이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와 함께 ACP 관련 입법 논의가 본격화할 것이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디스커버리운용 손들어준 법원

서울남부지법은 1000억원대 부실 펀드를 판매하고 환매를 중단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1·2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장하원 전 디스커버리자산운용 대표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검찰이 법률자문자료를 압수한 것은 위법하다고 보고, 장 전 대표 측이 제기한 준항고 신청을 일부 받아들였다.

준항고는 수사기관의 압수수색 등 처분에 불복해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는 제도다. 법원이 압수수색에서 확보된 압수물에 대한 준항고를 인정할 경우 해당 압수물은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앞서 2023년 7월 서울남부지검은 디스커버리자산운용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고 장 전 대표와 임직원의 휴대전화, 서버 외장하드, 노트북에 저장된 전자정보 등을 압수했다. 여기엔 변호사가 운용사의 질의에 대해 작성한 법률자문 의견서뿐만 아니라 과거 별건 수사 및 재판 과정을 거치며 변호인과 주고받은 문서, 메일, 메시지 등까지도 광범위하게 포함됐다.

변호인으로 나선 법무법인 광장은 압수수색 및 포렌식 과정에 참여해 검찰이 변호사와 의뢰인 간 의사 교환 자료를 압수하자 즉시 위법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압수수색 이후 준항고를 신청했다.

광장은 △헌법상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강하게 보호되고 있는 점 △형법·형사소송법·변호사법에서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점 △미국 등 선진국들은 모두 변호사와 의뢰인의 자유로운 의사 교환의 비밀을 보장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에 남부지법은 지난 2월 23일 “헌법 제12조 제4항에 의해 인정되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중 하나로서, 변호인과 의뢰인 사이에서 의뢰인이 법률자문을 받을 목적으로 비밀리에 이뤄진 의사 교환에 대해서는 변호인이나 의뢰인이 그 공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하고 변호사와 의뢰인 간 의사 교환 자료 일체에 대한 압수를 취소했다.

또한 “조언과 상담을 통해 이루어지는 변호인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을 인용하며 “압수 물품 중 변호사가 수신인 또는 발신인인 메시지나 전자메일, 작성한 문서는 헌법상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검찰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할 자료는 증거로 사용하지 않아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압수 대상이 된 전자정보의 범위를 넘어서는 전자정보를 영장 없이 압수한 셈이어서 위법함을 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장 전 대표는 2022년 7월 대출채권 대부분이 부실해 손실을 예상했음에도 이런 사실을 숨겨 370여 명의 투자자에게 1348억원에 달하는 피해를 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심과 올해 2월 2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검찰이 상고해 현재 대법원 심리 중에 있다. 한편 장 전 대표는 허위 투자제안서로 1000억원대 펀드 투자금을 불법으로 모아 운용한 혐의로도 지난해 12월 불구속 기소돼 1심 재판을 받는 상황이다.

2012년 대법원 판례에서 ‘진일보’

법조계는 이번 법원의 결정이 ‘변호사-의뢰인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12년 전 대법원 판례(2009도6788)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2012년 5월 17일 주택재개발사업 수주를 목적으로 회사에 우호적인 재개발 조합장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비용을 불법 지원한 혐의(건설산업기본법 위반)로 기소된 삼성물산 영업본부장 박모(57) 씨 등 5명에 대한 상고심(2009도6788)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검찰은 삼성물산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변호사가 직원에게 보낸 법률의견서 이메일을 발견했다. 의견서에는 “귀사가 조합장 당선을 위해 간접적, 우회적 방법으로 홍보비용을 지원한 사실이 밝혀진다면”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에 검찰은 박 씨 등이 조합장 후보에게 부정 청탁 및 금품을 제공한 혐의가 있다고 보고, 압수한 변호사 의견서와 직원 진술조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의견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의견서 작성 변호사도 증언을 거부했다.

1·2심에서는 변호사-의뢰인 간 비밀 교환에 대한 특권을 인정해 의견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했으나 대법원은 ‘변호사-의뢰인 특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이어 대법원은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법률자문을 한 내용을 적은 ‘법률의견서’는 형사소송법상 전문증거에 해당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검찰이 압수한 디지털 저장 매체에서 출력해 유죄의 증거로 제출한 이 사건의 법률의견서는 삼성물산이 변호사에게 법률자문을 받은 내용으로, 그 실질은 형사소송법 제313조 1항에 규정된 ‘피고인 아닌 자가 작성한 진술서나 그 진술을 기재한 서류(전문증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도 “공판 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그 작성자 또는 진술자인 변호사의 진술에 의해 성립의 진정함이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 법률의견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법률의견서를 유죄 증거로 사용하려면 작성자인 변호사가 법정에 직접 출석해 진정성을 증명해야 하고, 변호사가 정당하게 증언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 법률의견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이 법률의견서를 형사소송법상 전문증거로 판시하면서, 변호인-의뢰인 특권 불인정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입법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양선영 광장 변호사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은 형사소송이 개시되기 전 변호사와 의뢰인 간 상담 내용은 형사소송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므로 증거로 사용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였으나 이후에도 비판이 제기된 판례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2024년 남부지법의 준항고 인정 결정은 형사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상담 내용을 압수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문제가 된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변호사-의뢰인 특권 인정은 의뢰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진일보한 판결”이라며 이번 법원 결정이 변호사와 의뢰인 간 비밀 보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돋보기]
“OECD 중 한국만 없는 제도”

최근 몇 년 동안 대형로펌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어지면서 법조계에서는 ACP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행 변호사법은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선 안 된다는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는 규정하지만 변호사가 수사기관 등 제3자에 대해 비밀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는 ACP 권리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대한변호사협회(회장 김영훈)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해 국민정책제안단을 구성하고 ACP 도입을 제1 과제로 꼽았다. 변협 국민정책제안단은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 우윤근 전 주러시아 대사, 김철수 전국지방변호사회장협의회장이 공동 단장으로 참여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6개국 중 ACP를 도입하지 않은 곳은 한국뿐이다. 현재 국내 변호사법에는 ‘전현직 변호사는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지만 수사기관이 강제수사에 나섰을 때 자료 제출 요구를 거절하는 근거로는 쓰이지 않는다.

변협은 “법무법인 등을 대상으로 한 압수수색으로 변호사와 의뢰인 간 비밀에 대한 침해가 빈발하다”며 “국민의 기본권인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헌법상 적법절차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ACP 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