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의 ‘불법파견’ 인정
자회사 파견법 위반 혐의도 무죄 취지 파기환송

[법알못 판례 읽기]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 해고 근로자들이 7월 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 해고 근로자들이 7월 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기업 아사히글라스가 사내 하청업체 해고 근로자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5년 하청업체의 집단 해고로 법정 분쟁이 시작된 지 9년 만에 나온 상고심 판단이다. 이로써 해고 근로자들은 일터로 복귀할 수 있게 됐다.

한편 관련 형사 사건에서 대법원은 불법파견 혐의로 기소된 회사 대표 등을 무죄로 본 원심 판결을 파기했다. 다만 아사히글라스가 하청업체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한 것이 부당노동행위라는 근로자 측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 “화인테크노, 하청 근로자 고용해야”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2024년 7월 11일 해고 근로자 23명이 아사히글라스 한국 자회사인 AGC화인테크노(이하 화인테크노)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재판부는 “피고가 협력 업체 소속 근로자들에게 구속력 있는 업무상 지시를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화인테크노는 디스플레이용 유리 제조업 등을 영위하는 회사로, 자사 공장의 박막트랜지스터액정디스플레이(TFT-LCD)용 글라스 기판 제조 공정 일부를 주식회사 GTS에 도급했다.

화인테크노는 2015년 6월 GTS 소속 근로자들의 노조 결성을 문제 삼아 도급 계약을 해지했고, GTS는 소속 근로자 178명에게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했다.

이후 근로자들은 원청회사인 화인테크노를 불법 파견과 부당노동행위로 고용노동부에 고소했다. 또 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날 상고심 결론이 나온 것이다.

앞서 근로자들은 “화인테크노와 GTS가 체결한 도급계약은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상 근로자 파견 계약”이라며 “그런데도 파견법상 근로자 파견 사업 대상이 될 수 없는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 업무를 맡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화인테크노가 2년을 초과해 파견근로자를 사용하거나 근로자파견사업 허가를 받지 않은 GTS로부터 근로자 파견의 역무를 제공 받은 이상 화인테크노는 파견법상 사용사업주로서 GTS 근로자들을 직접 고용할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1·2심 법원은 근로자들의 손을 들어줬고, 대법원도 하급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GTS의 현장 관리자들의 역할과 권한은 화인테크노 관리자들의 업무상 지시를 근로자들에게 전달하는 정도에 그쳤다”며 “GTS의 근로자들은 피고 관리자들의 업무상 지시에 구속돼 그대로 업무를 수행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GTS의 근로자들이 화인테크노의 글라스 기판 제조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됐다고도 봤다. 예컨대 이 사건 공장의 공정 중 ‘콜드 공정’은 화인테크노가 담당한 선행 ‘핫 공정’과 컨베이어벨트로 이어져 있어 GTS가 담당한 콜드 공정 업무의 작업량과 작업속도는 핫 공정의 영향을 받았다. 콜드 공정에서는 화인테크노가 담당하는 업무와 GTS가 담당하는 업무가 전후로 이어져 상호 연동되기도 했다.

대법원은 또 “GTS는 화인테크노가 결정한 인원 배치 계획에 따라 근로자를 채용해 현장에 배치했고 근로자들의 작업·휴게시간과 휴가 등은 화인테크노의 생산 계획의 영향을 받았다”고 봤다.

이어 “GTS는 설립 이후부터 화인테크노에서 도급받은 업무만을 수행했고 도급 계약이 해지되자 폐업했으며 생산업무에 필요한 시설과 설비를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근로자 측의 승소가 확정됨에 따라 화인테크노는 해고 근로자들에게 ‘고용의 의사 표시’를 해야 한다. 구체적인 복직과 밀린 임금 문제는 노사 협의를 거쳐 결정되게 된다.

이날 같은 재판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파견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GTS와 대표이사, 화인테크노에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은 파기했다. 이 사건 원고들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2009년 4월~2015년 6월 화인테크노 공장의 글라스 직접생산공정 업무에 근로자들을 파견해 근무하게 해 파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GTS 대표이사는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화인테크노는 벌금 1500만원을, GTS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심 법원은 근로자 파견 관계를 부정해 무죄로 판단했다.

이날 대법원은 근로자들이 화인테크노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과 마찬가지로 근로자 파견 관계를 인정하는 취지로 피고들에 대해 무죄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부당노동행위 행정소송은 근로자 패소

다만 이 사건과 관련된 행정사건을 맡은 같은 재판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화인테크노가 GTS와 도급계약을 해지한 것은 부당노동 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앞서 해고 근로자 등은 “화인테크노가 GTS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근로자들을 해고하게 한 것이 지배·개입의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며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했다.

경북지노위는 화인테크노가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신청을 각하했다. 하지만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배·개입의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해 구제명령을 내렸다. 이에 화인테크노는 중노위를 상대로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화인테크노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화인테크노가 사용자가 아니며, 설령 사용자에 해당하더라도 GTS와 도급계약을 해지한 것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2심도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원심이 화인테크노가 GTS 근로자들에 대한 관계에서 지배·개입의 부당노동행위 주체로서의 사용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도 “화인테크노의 부당노동행위 의사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은 선고 이후 기자회견에서 “9년의 싸움, 우리가 옳았다.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현장으로 돌아간다”고 밝혔다. 다만 “대법원은 불법파견을 인정하면서도 부당노동행위 사건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며 “아쉬운 판단 지점”이라고 덧붙였다.


[돋보기]
“불법파견 소송 취하하면 정규직 채용”

사내 하청 근로자를 원청회사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 잇따라 나오는 가운데 원청회사가 불법파견(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취하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하청 근로자에게 제안한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1심 판결이 최근 나와 주목받았다.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박정대)는 전국금속노동조합과 GM 사내 협력업체 소속 비정규직 근로자 15명이 중노위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노동행위구제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중노위와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GM 사내 하청회사 근로자인 원고들은 2013년 6월부터 GM을 상대로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참여 근로자가 늘어나자 GM은 노조와 교섭을 통해 사내 협력업체 재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발탁 채용’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노조가 거부했다.

이후 2022년 회사는 하청회사 근로자들에게 △협력업체의 근속기간 절반만 인정 △소송 승소 시 받을 수 있는 차액 임금 포기 △최대 1200만원의 채용 격려금 지급 등을 내용으로 한 ‘채용 제안서’를 제시했고 243명이 이 제안을 수용했다. 제안을 수용하지 않은 근로자들은 하청회사와 근로계약이 종료됐다.

노조는 “GM이 조건에 동의한 조합원만 발탁 채용한 것은 노조 등에 대해 ‘지배·개입 부당노동행위’”라며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냈다. 지노위·중노위에서 모두 기각되자 중노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최종 발탁 채용된 260명 중 (소 취하) 조건에 응해 발탁 채용된 근로자 243명은 조합원 36명, 비조합원 207명으로 조합원보다 비조합원이 더 많다”며 “조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발탁채용에서 제외하는 것은 노동조합 조합원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사내 협력 업체 근로자들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한 조건”이라고 판단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