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이어 美서도 ‘쇳물에서 자동차·로봇까지’
정주영 창업회장부터 이어진 현대가 '3대의 꿈'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2월 27일 전북 군산 새만금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새만금 로봇·수소 첨단산업 육성 및 AI 수소 시티 조성을 위한 투자협약(MOU)’에 참석해 “국가와 국민이 함께 키워낸 현대자동차그룹이 새만금에 대대적 투자를 시작한다”며 이처럼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바다를 막아 조성한 군산 새만금에 9조원을 투입해 2029년까지 로봇 제조 공장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물을 전기로 분해해 청정 수소를 생산하는 수전해 플랜트 등을 짓기로 했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세운 현대건설이 맡았다. 정 창업회장은 1984년 충남 아산 방조제 공사 당시 대형 폐유조선으로 물길을 막아 공기를 36개월이나 단축시킨 이른바 ‘정주영 공법’으로 우리나라 지도를 바꿨다. 재계에서 “할아버지(정주영 창업회장)가 만든 간척지에 손자(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가 공장을 세운다”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3대(代) 이어진 ‘수직계열화 꿈’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이번엔 정 창업회장의 꿈이었던 ‘쇳물에서 자동차까지’ 수직계열화 신화를 미국에서 다시 쓴다. 정 회장은 지난 9월 4일 미 루이지애나주 도널드슨빌에서 열린 ‘현대제철·포스코 루이지애나 제철소(HLPS)’ 기공식에 참석했다. 정 회장의 아버지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2010년 충남 당진 현대제철 1고로 공장 화입식(고로에 첫 불을 붙이는 것)을 통해 국내에서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지 16년 만에 무대를 미국으로 넓힌 것이다.
현대그룹은 정주영 창업회장 시절부터 쇳물 생산과 불순물 제거, 철강재 생산 등 전 공정을 한곳에서 소화하는 일관 제철소 건설을 추진했다. 자동차와 조선, 건설 등 주요 산업군 품질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철’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가벼우면서도 강성이 중요한 자동차 강판은 현대제철의 고로 제철소 가동 이전까지는 포스코나 일본 등 해외업체에서 가져다 썼다.
정 창업회장은 정부가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이은 제2제철소 설립을 추진하던 1977년 종합제철소 설립계획안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제2제철 사업자는 포스코 몫이었고 광양제철소가 들어섰다. 1996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 정몽구 명예회장은 아버지(정주영 창업회장)의 뒤를 이어 고로 제철소 건설에 도전했다. 정 명예회장은 제철소 설립 서명 운동까지 벌인 끝에 1997년 경남도와 협약을 맺고 하동군에 제철소 설립을 추진했지만 정부 반대 등으로 무산됐다.
결국 IMF 외환위기 이후 모기업 부도로 매물로 나온 한보철강을 2004년 인수한 끝에 2006년 1월 고로 제철소 설립 인가를 받았다. 정 창업회장의 첫 도전(1977년)부터 화입식(2010년)까지 꼬박 33년이 걸린 셈이다. 정 명예회장은 당진 현대제철 고로 화입식에서 “보람 있고 감격스럽다. 선대 회장(정주영 창업회장)의 꿈을 드디어 이뤘다”고 말했다.
미국 자동차 전문 매체 오토모티브뉴스도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8월 정주영 창업회장과 정몽구 명예회장, 정의선 회장으로 이어지는 현대차그룹 3대(代) 경영진을 ‘100주년 기념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오토모티브뉴스는 “3대 경영진은 폐허였던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제조 강국이자 자동차 왕국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수상 이유를 설명했다.
○“자동차부터 로봇·우주까지 공급 확대”
이번에 첫 삽을 뜬 HPLS는 정의선 회장이 지난해 3월 발표한 260억달러(약 35조원)의 대미 투자 계획 중 첫 번째 사업이다. 서울 여의도 2.5배 면적인 737만㎡ 규모 부지에 총 58억달러(약 8조원)를 투입해 연산 270만 톤의 철강제품을 원료부터 제품까지 한번에 생산 가능한 일관 공정 시스템을 만든다. 현대제철(지분율 50%)과 현대차·기아(각 15%)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는 물론 국내 철강 1위 업체인 포스코(20%)도 참여해 ‘K철강’ 연합군을 꾸렸다.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도 이날 기공식에 참석해 “국내에서는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경쟁자지만 해외에서는 서로 협력해 한국 기업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HPLS가 생산한 자동차 강판을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기아 조지아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 등 현대차·기아 미국 공장은 물론 제너럴모터스(GM) 텍사스 공장, 폭스바겐 테네시 공장, 혼다 앨라배마 공장 등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의 미국 공장에도 공급한다는 목표다. 일단 HPLS의 연 270만 톤 중 현대차·기아 미국 완성차 공장에 80만 톤이 공급되고 포스코가 기존 미국 거래처와 멕시코 법인 등에 60만 톤을 판매하기로 했다. 나머지 130만 톤 신규 수요처가 필요한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생산한 K철강을 자동차에 한정하지 않고 보스턴다이내믹스가 만드는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는 물론 로켓 산업 등에 적용하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정의선 회장도 기자들과 만나 “이곳에서 제조된 철강을 당연히 아틀라스에 적용할 것이고 더 열심히 해서 스페이스X 같은 로켓에도 공급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내 산업 공동화 우려도
현대차그룹은 이번 HPLS 기공식으로 쇳물(현대제철·포스코 루이지애나 제철소)에서 핵심 부품(현대모비스)과 전기차 배터리(현대차그룹·SK온·LG에너지솔루션 합작법인), 자동차(현대차 앨라배마, 기아 조지아, HMGMA)까지 미국에서 생산하는 일관생산 체제를 사실상 완성했다. 글로벌 자동차 판매 1위인 도요타는 물론 미국 토종 업체인 GM, 포드도 이루지 못한 일이다. 정의선 회장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전략은 미국의 관세 압박을 피함으로써 최대 판매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기회임은 분명하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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