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정채희 기자ㅣ사진 각 사 제공 l 참고 도서 <언컨택트>] 거스를 수 없는 시대 변화는 가장 완고했던 오피스 공간에도 균열을 가져왔다.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재택근무는 기업에 효율의 가능성을 시사했으며, 노동자들은 안전과 복지를 위해 직주일치를 희망하고 있다. 성큼 다가온 오피스 프리(office free)의 시대를 조명했다.


[big story] 사무실의 종말? 성큼 다가온 ‘오피스 프리’
(사진) 롯데쇼핑의 거점 오피스. / 롯데쇼핑 제공


전 세계에서 ‘오피스 프리’ 실험이 한창이다. 사무실 공간에서 사람을 마주하고 대면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관성은 예측할 수 없는 전염병의 위협 속에 깨지고 말았다. 기업과 노동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각자의 생존 전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적의 방법은 회사로부터의 격리였다. 원격근무, 재택근무에 보수적인 입장을 지녔던 기업들도 코로나19의 위협 속 생존을 위해 오피스 프리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美 CFO 74% “재택근무 유지할 것”


위기 속에 기회일까. 미국 리서치 기업 가트너(Gartner)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의 74%가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5% 이상의 직원을 영구적으로 재택근무자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big story] 사무실의 종말? 성큼 다가온 ‘오피스 프리’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단행하면서 업무의 상당 부분을 재택근무로 대체해도 업무에 큰 차질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재택근무의 효율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비용 통제에 강한 압박을 받는 기업의 CFO들은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재택근무란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의 소프트웨어 개발사인 오토매틱은 이를 일찌감치 깨달은 기업이다. 이 회사는 전 직원이 원격근무를 하는 오피스 프리 기업으로 2020년 2월 기준 1170명의 직원이 70여 개국에서 일한다. 1년에 한 번 오프라인 모임을 갖는데 그 외에는 카페든 집이든 공유 오피스든 각자가 선택한 공간 어디에서든지 업무를 할 수 있다.


회의나 커뮤니케이션, 채용까지도 모두 온라인을 활용한다. 그렇다고 생산성이 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전문 투자사 세일즈포스로부터 이 기업이 평가받은 기업가치는 30억 달러로, 5년 전인 2014년 10억여 달러보다 3배 평가를 받았다. 사무실 없이 원격근무만으로도 비즈니스가 성장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오토매틱의 실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무실을 없앰으로써 운영에 따른 고정비를 줄인 만큼 원격근무를 위해 직원들이 쓰는 비용 일체를 지원한다. 홈 오피스를 꾸미는 비용부터 공유 오피스를 빌리는 비용, 심지어 카페에서 일할 때 마실 음료 비용 등이 업무공간에서 쓰는 비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피스 프리에 따른 기회비용 분배에도 성공한 사례다.


오토매틱과 같은 수준의 재택근무는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원격근무, 재택근무 실험은 한창 진행 중이다. 정보기술(IT) 기업인 네이버, 카카오와 다수의 게임사들은 코로나19 확산 기간 재택근무를 유지하고 있다. 전 직원 원격근무 체제로 전환하거나 주 2회 출근하는 순환근무제를 실시하는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도록 유연근무 시스템을 마련했다.


하지만 누구나 카카오와 네이버가 될 수는 없다. 일부 기업은 오피스를 없애는 대신에 직주일치를 위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이 중 하나는 ‘거점 오피스’의 도입이다. 거점 오피스란 집에서 가까운 곳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사무실을 대체하는 개념인데, 재택근무의 단점으로 꼽히는 단절감과 업무 효율 저하를 보완한 모델로 통한다.


거점 오피스를 시도한 국내 회사는 SK텔레콤과 롯데쇼핑 등이다. SK텔레콤은 본사가 아닌 집에서 10~20분 거리의 가까운 사무실로 출근하는 오피스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직원들의 근무 거리를 고려해 종로, 서대문, 분당, 판교 등에 4개소를 먼저 개소했다. 롯데쇼핑은 수도권 일대 롯데백화점의 공간을 활용해 총 5개 거점에 225석을 마련했다. 좌석 예약 시스템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5개 거점 오피스의 좌석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두 회사 모두 갖고 있던 기존 공간을 활용했으며 향후 구성원의 거주지 분석을 통해 추가적으로 외부 임차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big story] 사무실의 종말? 성큼 다가온 ‘오피스 프리’
(사진) 쿠팡의 스마트 오피스. / 쿠팡 제공


기존 유휴공간이 없는 기업의 경우에는 공유 오피스를 활용한다. 공유 오피스란 사업자가 건물 일부를 임대해 사무공간으로 꾸민 후 이를 다시 개인 혹은 소규모 기업에 전차하는 구조의 비즈니스다.


국내 공유 오피스업체인 패스트파이브에 따르면 6월 기준 회원 수는 1만7000명으로 코로나19가 국내 확산되기 전인 1월과 비교해 33% 증가했다. 패스트파이브 관계자는 “거점 오피스를 구축하고자 하는 기업의 문의가 많다”며 “직원들은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기업은 운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공유 오피스를 활용하려는 추세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공간을 타인과 함께 쓰는 공유 오피스의 사업모델에 우려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시기에 단기적으로 주춤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공유 오피스의 성장세가 지속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홍지환 NH투자증권 글로벌리츠 부문 애널리스트는 “과거 공유 오피스 이용자는 스타트업과 프리랜서 위주였다”며 “현재 중소기업, 재택근무, 대기업 등으로 이용자층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코로나19 사태 이후 기업의 오피스 거점 분산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앞으로 시장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경기 불확실성이 높아짐에 따라 짧은 임대차 계약에 대한 수요 또한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공유 오피스의 시장 침투를 가속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오피스 공실률 증가, 도심 유휴공간은


재택근무, 거점 오피스, 공유 오피스….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오피스 프리’ 제도가 국내에 확산, 정착한다면 오피스를 임대하려는 수요는 점차 감소할 전망이다. 홍지환 애널리스트는 “봉쇄조치와 자택대기 명령으로 기업들의 휴폐업이 늘면서 오피스 신규 임대 결정을 유보하거나 임대차 계약을 파기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며 “주요 도시의 공실률도 소폭 상승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수익형부동산 연구개발 기업인 상가정보연구소가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3~4월 전국 업무용 부동산 거래량은 50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95건 대비 14.6% 감소했다. 서울의 경우 올해 3~4월 거래된 업무용 부동산은 188건으로 지난해 264건 대비 28.8% 감소했으며, 경기도는 158건으로 지난해 179건 대비 11.7% 감소했다.


[big story] 사무실의 종말? 성큼 다가온 ‘오피스 프리’


전문가들은 이제 오피스 수요가 줄면서 생긴 상업지구의 유휴공간을 어떻게 각색할지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도시대학 교수는 최근 정부가 주최한 코로나19 이후 도시와 건축, 주거의 변화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재택근무로 주거공간 수요는 늘어나는 반면, 상업시설에는 빈 공간이 발생하면서 도시공간의 재구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진행 중인 대안은 주거공간과 직장이 한 공간에 있는 직주일치 방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최근 도심의 빈 상가 등을 개조해 1~2인 공공임대주택으로 공급할 수 있는 ‘공공주택특별법’ 개정안을 오는 10월 18일부터 시행키로 했다. 이번 개정안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주택 사업자는 주택과 준주택 외에도 도심 내 오피스나 숙박시설 등도 리모델링하고 1~2인 주거용 공공임대로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신규 비즈니스 공간 창출도 대안 중 하나다. 비대면 시대를 다룬 책 <언컨택트>에 따르면 일본의 철도사업체 도큐전철은 지하철역 주변에 원격근무용 사무실을 만들었다. 노래방 사업자는 이용이 뜸한 낮 시간대를 업무공간으로 대여하고, 공공시설에도 공중전화처럼 생긴 원격근무용 초소형 사무실을 만들어 설치하는 사업들이 진행 중이다. <언컨택트>의 저자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재택근무와 원격근무가 늘어나면서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공간은 계속 늘어나고 다양한 비즈니스도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기업들이 오피스 프리로 근무 방식을 전환한 것은 코로나19라는 사회적 재난 상황에 대비하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코로나19 위기 상황이 끝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이라는 시각도 내놓는다.


하지만 새로운 업무 수행 방식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코로나19로 빠르게 찾아온 유연근무제가 하나의 기업문화로 자리 잡길 바라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딜로이트가 42개국 1만3400명의 MZ세대(밀레니얼과 Z세대)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답변자의 75%가 “재택근무나 원격근무가 자신에게 중요한 요소다”라고 답했다. 결국 MZ세대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재택·원격근무는 기업의 선택이 아닌 필수의 시대가 온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오피스 프리의 시대는 공간뿐 아니라 우리 삶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다.


김용섭 소장은 “우리가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집을 사서 정착했던 건 그 시대의 고용과 라이프스타일이 그러했기 때문”이라며 “원격근무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날수록 장소와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로케이션 인디펜던트(location independent) 문화가 일반화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물리적 조건에 제약받지 않는 삶의 태도는 일하는 장소는 물론 삶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변화시킬 것이다”라고 예고했다. 공간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이제 사람들의 태도와 삶의 방향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에 올라탈 때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4호(2020년 0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