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 사진 한국경제DB]한국이 7년 만에 조선업 1위 자리를 재탈환하며, 한·중·일 삼국이 세계 시장을 놓고 벌이는 조선업 경쟁이 한층 가열되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국영기업들인 자국 1위와 2위 조선사의 합병을 승인,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사를 출범시키려는 배경이기도 하다.
중국 상하이 앞바다에는 창싱다오(長興島)라는 동서로 긴 허리띠 모양의 섬이 있다. 동서 길이가 26.8㎞, 남북 길이가 2~4㎞, 전체 면적이 88㎢인 창싱다오는 섬 전체가 조선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곳에는 장난창싱(江南長興)조선소를 비롯해 크고 작은 조선소들이 있다.
장난창싱조선소에선 중국의 세 번째 항공모함이 건조되고 있다. 중국의 독자 기술로 만들어지고 있는 배수량 8만~8만5000톤급의 이 항모(가칭 광둥호)는 2022년까지 실전 배치될 예정이다. 이곳에선 2019년 9월 27일 액화천연가스(LNG)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선들 가운데 세계 최대 규모인 2만3112TEU급의 자크 사드호가 진수됐다. 이 LNG 추진 컨테이너선은 중국선박공업(CSSC)이 2017년 9월 세계 4위 해운사인 프랑스의 CMA CGM그룹으로부터 수주한 14억4000만 달러 규모의 LNG 추진 컨테이너선 9척 중 하나이며, CMA CGM그룹은 2022년까지 모두 20척의 LNG 추진 컨테이너선을 운용할 계획이다.
LNG 추진 컨테이너선은 기존 벙커시(C)유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선보다 유황 성분의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당시 입찰에는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건조 경험이 있는 한국의 조선 3사도 모두 참여했지만, 가격 경쟁력에서 중국에 밀려 수주에 실패했다.
◆중국 등 세계 조선업 합병 잇달아
중국 정부가 국영기업들인 자국 1위와 2위 조선사의 합병을 승인,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사를 출범시키면서 세계 조선업을 석권하려는 야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선박공업그룹(CSG)이라는 ‘슈퍼 공룡’은 앞으로 상당 기간 세계 조선업의 지형을 뒤흔들 것이 분명하다.
2019년 11월 26일 출범한 이 회사는 중국의 국영기업 담당 정부부처인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SASAC)가 승인한 자국 1위 조선사인 중국선박공업(CSSC)과 2위 조선사인 중국선박중공(CSIC)이 합병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장강(長江)을 경계로 각각 북쪽과 남쪽의 대형 국영 조선소들을 줄줄이 거느리고 있던 CSIC와 CSSC가 하나의 회사로 합쳐진 것이다.
장강 이북인 다롄의 다롄선박중공, 후루다오의 보하이선박중공, 우한의 우창선박중공 등을 산하에 둔 CSIC는 ‘북선(北船)’, 장강 이남에 있는 상하이의 와이가오차오조선, 후둥중화조선, 장난조선, 광저우의 황푸원충선박 등을 산하에 둔 CSSC는 ‘남선(南船)’이라고 불리어 왔다. 남과 북의 조선사를 합친 CSG는 산하에 무려 147개 연구기관과 사업 부문, 상장 기업 등을 거느리고 있으며, 총자산 규모는 7900억 위안(133조 원)에 달한다. 임직원 수는 31만 명이나 된다.
이 회사는 항공모함부터 유조선 등 각종 선박을 제조할 수 있다. 영국의 조선·해운 분석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CSSC는 2018년 기준 세계 조선 시장점유율이 11.5%로 2위를, CSIC는 7.5%로 3위를 각각 차지했었다. CSG는 지금까지 세계 시장점유율 13.9%로 세계 1위였던 한국의 현대중공업그룹을 누르고 단숨에 세계 최대의 조선사가 됐다.
이번에 합병한 두 국영기업은 20년 전에는 중국 선박공업총공사라는 하나의 기업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1999년 7월 1일 장강을 경계로 2개의 기업으로 분리시켰다. 이때 분리시켰던 이유는 국영 조선사들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조선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번에 다시 합친 이유는 구조조정을 통해 증가 일로의 부채를 해결하고 수익성을 높여 국영기업들을 효율화한다는 중국 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중국 국영기업들은 대부분 그동안 방만한 경영으로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중국 비금융 국영기업의 부채는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1.3배인 118조500억 위안(1경9300조 원)에 달했다. 게다가 중국 조선업계는 업체들의 난립으로 인한 과당 경쟁과 저가 수주 등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의 조선회사들은 수년간 수주 절벽으로 2009년 391곳에서 2018년 112곳으로 급감했다. 특히 정부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못 받는 민간기업들은 305곳에서 50곳으로 줄어드는 등 85%가 문을 닫았다. 정부의 지원 대상인 업체들 중에서도 2017년 7곳, 2018년 2곳이 파산했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로선 조선업계의 공멸을 막기 위해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중국 정부가 추진해 온 조선업 구조조정의 핵심이 CSSC와 CSIC의 합병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한국과의 경쟁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중공업은 세계 조선업의 대형화 추세에 따라 대우조선해양과 합병함으로써 세계 1위 조선사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중국 언론들은 CSG가 출범한 이유는 한국의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과의 합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CSSC는 2018년 건조량 663만 톤으로 2위, CSIC는 359만 톤으로 5위를 기록했고 양사의 수치를 합하면 1022만 톤이다. 세계 1위인 현대중공업(757만 톤)과 대우조선해양(461만 톤)을 합산한 1218만 톤과 비교해 196만 톤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CSSC는 선박 건조에 강하고 CSIC는 설계에 능한 만큼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 조선업계도 거대 국영 조선회사의 합병을 통해 한국의 조선업을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 중국은 2012년부터 국가별 조선 수주에서 6년 연속 한국을 눌러 왔다. 중국은 2015년 단 한 차례 일본에 1위 자리를 내준 것을 제외하고 조선업의 신흥 강자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2018년 한국이 7년 만에 조선업 1위 자리를 재탈환하면서 중국 조선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한·중·일 조선사, 세계 시장 경쟁 가열
한국은 2018년 1263만 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를 수주해 중국(915만 CGT)을 눌렀다. 한국은 시장점유율에서도 44.2%로 중국(32.0%)을 압도했다.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한국의 2019년 11월까지 수주액에서도 164억 달러로 중국(153억 달러)보다 많았다. 한국은 또 수주량에서도 712만 CGT(36.0%)를 기록해 중국 708만 CGT(35.0%)와 일본 257만 CGT(13.0%) 등을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특히 한국은 고부가가치 분야인 LNG 운반선 건조에서 중국을 압도하고 있다. 한국 조선업체들은 전 세계적으로 친환경 선박들이 각광받으면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LNG 운반선 수주를 사실상 싹쓸이하고 있다. 게다가 2020년 1월 1일부터는 ‘국제해사기구(IMO) 2020’ 규제가 시행된다. 국제 항행 선박 연료유의 황산화물 함유 허용치를 현행 3.5%에서 0.5%로 제한하는 제도다. 규제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선박에 탈황장치(스크러버)를 장착하거나 저유황유를 사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선박을 아예 LNG 추진선으로 교체하는 경우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삼성중공업의 경우 2019년 LNG 운반선 수주금액은 40억 달러로 2018년 33억 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수주액도 각각 20억9000달러와 17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LNG 운반선 선가는 척당 1억8600만 달러(2212억 원)로 전체 선박 중 가장 비싸다. 반면 중국은 가장 저렴한 벌크선(화물선)을 많이 수주하고 있다. 벌크선은 척당 4950만 달러(589억 원) 수준이다.
한국의 조선업체들이 LNG 운반선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기술력을 해외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업체들이 LNG 운반선 인도를 지연하는 등 기술력에서 잇달아 문제를 드러내면서 세계의 유수한 선주들이 한국의 조선업체들을 선호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슈퍼 공룡인 초대형 조선사를 출범시킨 것은 한국 조선업체들과의 규모의 경제에 따른 경쟁력과 기술력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기준으로 한국과 중국의 선박 건조 기술 격차는 벌크선이 2.5년, 탱커(유조선)가 4.2년, 컨테이너선이 4.2년, LNG 운반선은 7년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 정부가 세계 최대 조선업체를 출범시키면서 해군력을 강화하려는 야심까지 보이고 있다. 레이 판페이 CSG 회장은 기업 출범과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첫 번째 과제로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등 최신예 함정 개발 및 생산 등을 통해 세계 일류의 해군을 건설하겠다”고 강조했다. 레이 회장이 중국 해군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겠다고 천명함에 따라 CSG는 앞으로 해군력 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최신예 함정과 잠수함 건조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그동안 해양굴기를 내걸고 남중국해를 비롯해 태평양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해군력 강화에 박차를 가해 왔다. 레이 회장은 “시 주석의 이런 방침에 따라 군대를 강하고 흥하게 만드는 ‘강군흥군(强軍興軍)’의 책무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그동안 군함 생산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CSG는 방위 산업 분야에도 대규모 투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합병을 통해 세계 1위 조선사를 출범시키려면 공정거래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심사 결과는 2020년 상반기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노조다. 세계 조선업의 대형화 추세와 중국의 세계 최대 조선업체 출범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합병에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노조는 한국 조선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대승적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다.
현대중공업의 합병 계획은 세계 시장에서 독점 여부를 따지기 위해 각국의 심사도 받아야 한다. 유럽연합(EU)의 승인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EU는 초대형 컨테이너 화물선이나 LNG 운반선을 발주하는 선사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독과점을 규제하기 위한 기업 결합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EU 집행위원회는 최근 이탈리아 핀칸티에리와 프랑스 아틀란틱조선이 합병하면 크루즈선 점유율이 58%에 달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EU 공정위원회의 심사는 최대 5개월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중국 조선업체들이 합병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서자 일본 조선업체들도 손을 맞잡았다. 일본 최대 조선업체인 이마바리(今治)조선과 2위 업체인 재팬마린유나이티드(JMU)가 2019년 11월 30일 자본·업무 제휴에 합의했다. 이마바리조선의 2018년 건조량은 449만 톤으로 일본에서 1위를 차지했다. JMU는 228만 톤으로 뒤를 이었다. 두 업체의 실적을 단순 합산하면 677만 톤이 된다. 이 경우 현대중공업을 바짝 추격하게 된다. 두 업체는 공동으로 출자해 상선 설계나 업무를 담당하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고 생산 체제를 효율화하는 방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두 업체는 일본의 독점 규제와 관련한 절차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제휴를 추진한다. 출자 비율과 제휴 내용은 2020년 3월까지 확정할 계획이다. 두 업체는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수주전에서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것이 제휴의 목적이다”라고 밝혔다. 일본 조선업계는 세계 시장에서 강자로 군림했으나 한국,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 밀린 후 뒤늦게 규모의 경제를 노리고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조선업체들은 미래의 선박이라고 불리는 자율 운항 등의 기능을 갖춘 스마트십 분야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아무튼 한·중·일 조선업체들이 세계 시장을 놓고 말 그대로 치열한 ‘삼국지’를 벌일 것이 분명하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6호(2020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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