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성전문가·보건학 박사·유튜브 ‘배정원TV’]최근 우리 사회를 엄습하고 있는 ‘성 엄숙주의’. 성에 대해 쉬쉬하지만 결국 그 이면에는 더없는 향락과 착취, 차별이 존재한다. 또 이는 남녀의 성별과 상관없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 위한 건강한 성 담론이 필요한 이유다.
어김없이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다짐을 하고, 보다 긍정적이며 기쁨이 넘치는 한 해를 기대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길이 막혀 길 위에서 밤을 새면서도 깊은 밤을 달려 바다에 새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달라진 마음과 신성하고 비장한 에너지를 얻겠다고 동해로 향한다. 또 누군가는 집 가까운 산 위에라도 올라 새해의 아침을 맞으며 소원을 빌기도 한다.
성교육·성상담 전문가로서 나도 2020년에 바라는 바가 있다. 첫째는 우리 사회가 남녀의 젠더 평등에 대한 인식이 좀 더 높아져서 남녀 모두 더욱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젠더 평등이란 남성과 여성이 성별의 차이와 상관없이 함께 공평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19년을 보내며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우리나라 성인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청년 관점의 젠더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대응방안 연구: 공정인식에 대한 젠더분석’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연구는 결국 한국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청년과 기성세대의 생각 차, 남성과 여성의 생각 차를 알고자 진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청년 여성들은 성별 공정성과 안전 위협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청년 여성의 80%가 한국 사회의 공정하지 않음과 차별, 범죄에 대한 불안 때문에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불행, 분노, 억울, 부당함에 대한 감정경험을 알아보는 울분척도는 청년 여성(여 2.79%, 남 2.53%)이 가장 높았고, 범죄 피해에 대한 불안지수 역시 청년 여성(여 2.66, 남 1.74)이 가장 높았다.
이는 지난 한 해 동안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여성들에 대한 공격인 몰카(몰래카메라), 성폭행, 성희롱, 데이트 폭력 등에 대한 불안감과 억울함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가장 안전한 관계여야 할 사랑을 시작하고 유지하고, 끝내는 과정이 모두 안전하지 않다고 한국 사회의 청년 여성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우리나라가 치안이 좋다고 하지만 여성들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한 명확하게 안전한 사회는 아니다. 또한 사회의 불공정함에 청년 여성의 86%(남 78.4%)가 공감했고, 소득 및 임금 격차 면에서 성별에 따른 격차가 부당하다는 데 청년 여성의 82.8%(남 42.7%)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성은 인간의 삶이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남녀 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로 10년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똑똑한 데다 고학력이고, 가정에서는 이미 평등에 대한 가치에 익숙해진 청년 여성에게 일자리를 찾고 유지하는 데 좌절감과 절망을 주어 그들이 살아야 할 미래에 더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는 의미다.
최근에도 몇몇 금융기관이나 공기업의 입사 과정에서 여성 차별이 밝혀졌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입사의 기회, 승진의 기회 등을 공정하게 갖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결국 청년 여성은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결혼을 미루고, 출산과 육아를 포기한다.
직장에서의 승진과 업무 능력의 차이는 남녀에 대한 차이가 아니라 기혼 여성과 미혼 여성, 기혼 안에서도 아이가 있는 여성과 아이가 없는 여성의 대결로 점화돼 가고 있다. 이렇게 여성들이 직업을 갖고 유지하는 데 불공정함은 결국 저출산으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한국이 급속히 초고령사회로 들어가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사라질 것인가’ 하는 문제로까지 더욱 무겁게 먹구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게 사실이다.
둘째는 2020년에는 우리 사회에 건강하고 행복한 성 담론이 자유롭고 유쾌하게 오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성은 우리 인간들의 본능이면서 즐거움과 생식의 원천이다. 성은 이미 생식으로서의 중요성보다 친밀함, 사랑의 표현과 확인, 즐거움의 영역으로 더욱 큰 의미를 가지게 됐다.
성은 야한 것도 문란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고 우리가 영위하는 태도와 가치에 따라 더없이 즐겁고, 외롭지 않으며 행복함을 가져다주는 통로이며 소통 방식이다. 생식의 축복과 위대함만큼 즐거움과 행복의 영역도 가볍지 않다. 성에 대해 제대로 잘 알고 관리할 수 있으면 우리는 더욱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건강한 성에 대한 담론과 대안보다는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성에 대한 이야기만 양산되고 소비된다.
최근에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성 엄숙주의’로 가고 있는 게 우려된다. ‘성 엄숙주의’는 젠더 평등과는 반대의 길이기도 하다. 성에 대해 쉬쉬하면서 그 이면에는 더없는 향락과 착취, 차별, 폭력이 닿아 있는 이중적인 사회가 돼 가고 있다. 또 성은 인간의 삶이고, 인간의 삶은 청소년기만 있는 것은 아닌데, 건강한 성인들의 행복한 성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려운 사회가 우리나라다. 그렇다고 청소년기에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루어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성에 대한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과 대안들이 제시되면, 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도 달라질 것이다. 남녀에 대한 혐오적인 시선과 폭력적인 태도와 행동은 누구에게도 옳거나 유리하지 않다. 결국 생명의 귀중함을 알고, 생명인 나와 너를, 그리고 우리를 존중하고 잘 관리하고 귀하게 대우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성적 지향점이다.
새롭게 시작된 2020년에는 우리들이 남녀의 성별과 상관없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각자의 다름으로 차별하지 않고, 생명의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서로 귀하게 여기고, 돌보고 존중하는 그런 새해가 되기를, 사랑의 낭만과 위대함이 살아나는 한 해이기를 정말 간절히 빌어 본다.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성전문가·보건학 박사·유튜브 ‘배정원TV’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6호(2020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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