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 사진 김기남 기자] 발달장애인도 기업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없던 기업, 세상에 이로운 기업 ‘베어베터’를 만나다.
삼성, SK, 한화,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파트너 회사가 있다. 발달장애인의 일터 베어베터다.
베어베터는 발달장애 사원이 80% 이상을 차지하지만, 사업 각 영역에서 숙련된 전문가를 육성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회사로 유명하다. 베어베터와 파트너사의 재계약률은 95.0%.
장애인이 일하는 회사라서가 아니라 품질과 서비스에 만족해서 다시 찾는 회사가 되기까지는 회사의 무한한 담금질이 있었으리라.
발달장애인이 제몫을 해내는 노동자가 되도록, 베어베터의 뼈대를 그려낸 이진희 공동대표를 만났다. 이 대표는 세밀한 분업화와 쉬운 공정으로 발달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장본인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그런 대목이 나오더라고요. ‘해질녘이 되면 마음이 쿵 한다’는 거. 둘째 낳고 경력단절 여성이었던 시절에 아이 재우고 정신없던 하루를 마감하며 깜깜해진 창밖을 바라볼 때 가슴이 돌에 눌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내 아이의 미래가 저 창밖처럼 깜깜해 보였거든요.”
이 대표는 발달장애 아이를 둔 엄마다. 아이가 30개월 무렵 자폐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날부터 마음속을 누르는 돌 하나가 생겼다. 다시 회사 생활을 했지만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발달장애를 위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지 탐색했다. 그 무렵, 전 회사에서 상사로 만났던 김정호 공동대표가 통 큰 제안을 했다.
“김 대표는 네이버 창업 멤버였어요. 본인이 뜻하지 않게 부를 얻었으니 이를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다고 했죠. 발달장애인에게 대학 장학금을 주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셔서,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일자리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렇게 베어베터가 탄생했습니다.”
발달장애란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함께 부르는 말로, 국내 장애 인구의 7.8%를 차지한다(2018년 5월 기준). 이들의 평균 고용률은 24.9%로 장애 인구의 평균 고용률인 34.5%보다 턱없이 낮다. 베어베터는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회사다. 발달장애인이 직원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베어베터는 비장애인 중심의 회사가 아니라 발달장애인이 일하도록 하는 게 목표인 회사예요. 일하기가 어려운 사람들한테 일을 시켜서 이를 조직화하고 품질을 최고로 끌어올려야 했어요. 참고할 만한 모델이 없었기에 지금의 베어베터 시스템을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 대표는 발달장애인의 특성에 주목했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은 고집이 세지만 약속은 잘 지키고, 남에게 자신을 잘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익숙한 일은 잘 수행한다는 특징이 있다. 또 규칙에 집착하지만, 그래서 지하철 노선도 같은 루틴에 정통하기도 하다.
“이분들이 한번에 기억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새로운 일을 배우고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기 때문에 반복이 필요하죠. 장애로 인한 특징이 장점으로 발휘될 수 있는 그런 영역을 찾아 특화해야 했어요.”
회사는 인쇄 업무를 시작으로 커피, 제과제빵, 화훼, 배송까지 서비스 영역을 확대했다. 명함이나 기업의 교육 자료를 인쇄하고, 기업의 조식이나 선물로 쓰이는 제과제빵을 만들고, 기업의 경조사에 근·조환을 배달하고, 사내 카페를 위탁 운영하는 등의 일이다. 모두 기업 간 거래(B2B)의 영역이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업무가 잘 안 됐어요. 왜 안 될까 고민하던 중에 20년 전 신문에서 본 ‘일본이화학공업’의 사례가 생각났어요. 분필 제조업체인데 당시 발달장애인을 50명이나 고용해 제 눈길을 끌었던 곳이었습니다. 발달장애인에게 분필의 불량 검수 작업을 맡겼는데 비장애 사원에게 하는 것처럼 일을 시키니 규격에 맞게 측정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규격과 똑같은 사이즈의 모델을 만들어 ‘비교’하게끔 한 거죠. 거기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이 대표는 발달장애인이 쉽게 일할 수 있도록 직무를 재구성하고, 작업 과정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작업을 단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작업 과정을 A부터 Z까지 쉬운 말로 써 붙이고, 일터 곳곳에 그림과 사진, 순서가 적힌 표 등 시각적인 자료를 활용했다. 예컨대 꽃다발에 붙일 리본을 만든다면 끈에 점을 찍어 리본을 접는 위치가 어디인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했고, 모든 업무에 샘플을 곳곳에 비치해 비교가 가능하도록 했다.
만족도 ‘수’, 재계약률 ‘95.0%’
장애 사원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 능률은 크게 올랐다. 지금은 전 과정의 80%가량을 장애 사원이 담당한다. 나머지는 바리스타, 플로리스트, 제과기능사, 디자이너 등 전문가가 담당해 이들의 지도 아래 제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발달장애인이 만들었으니 제품의 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기우에 가깝다. 지난 8년간 회사를 이끌며 그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이 바로 제품의 품질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명함을 제작하면 오타가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색깔은, 디자인은 제대로 나오는지 궁금해하시죠. 베어베터는 2년마다 고객사의 품질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는데 만족도가 5점 만점에 평균 4.45점으로, 매우 높은 편이에요. 표본수가 400개가 넘는데 ‘불만족’과 ‘매우 불만족’이 선택된 것은 10개가 채 안 됩니다. 어떤 플레이어에게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제품을 내놔야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베어베터와 고객(기업) 간 재계약률은 2019년 기준으로 95.0%에 달한다. 2015년 92.1%, 2017년 94.7%로 해가 거듭할수록 더 우수한 성적표를 받았다. 제품의 질이 좋지 않다면 까다로운 기업고객과의 연도 일회성에 그쳤을 것이다. 김 대표의 자본금을 밑바탕으로 동종 업계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장비를 갖추고, 사업 각 영역에서 숙련된 전문가(장애 사원+비장애 사원)를 확보한 것이 품질과 서비스에 만족해서 다시 찾는 회사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제아무리 고품질의 제품과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발달장애인의 일터라는 편견을 완전하게 지우지는 못할 터. 이 간극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연계고용제도’다. ‘장애인 고용 촉진 및 직업재활법’상 장애인 고용의무가 있는 회사는 장애인 고용을 하지 않을 시 벌금을 내야 한다. 그런데 직접고용 대신 장애인표준사업장과 거래를 하면 거래금액의 50%까지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감면받을 수 있다.
베어베터는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장애인 직접고용으로 고비용·저생산성을 감수해야 하는 기업의 고민을 해결해준다. 장애인 고용의무를 다하지 못해 과태료를 내는 회사들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명함, 꽃, 팸플릿, 커피원두 등을 베어베터에서 구입함으로써 과태료를 줄이고, 고품질의 제품 구입까지 일거양득을 취할 수 있다.
“장애 사원을 240명이나 고용하면서 이렇게 생존할 수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연계고용제도입니다. 경쟁적인 조직에서 일반 사원보다 제몫을 하기 어려운 장애 사원을 고용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장애 사원이 일할 환경을 조성해주고, 또 그가 업무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런 투자를 하는 조직은 없습니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조건 고용을 하라고 하면 기업도, 장애 사원도 오래 못 가고 튕겨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죠.”
그럼에도 이 대표는 간접고용(연계고용)뿐 아니라 직접고용으로까지 장애인 고용이 확대되는 것을 회사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잘 육성한 베어베터의 장애 사원을 다른 기업으로 이직시키길 주저하지 않는다. 또 지난 8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은 노하우를 문서화해 다른 기업에도 아낌없이 나눠준다.
“흑묘백묘(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랄까요. 베어베터의 목표는 오로지 발달장애인 고용의 확대입니다. 우리가 많이 고용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고용하도록 만드는 것이에요. 김 대표는 ‘베어베터는 없어져야 할 회사’라는 극단적 표현도 씁니다. 베어베터가 없어질 정도면 그때는 다른 기업에서 발달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다는 얘기이니까요.”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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