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일까. 현재 활동하는 국내 뮤지컬 배우들 면면을 들여다보면 상당수가 성악 전공자이거나 가수 출신들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꼭 노래만 잘한다고 뮤지컬 배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랫말이 관객들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도록 정확한 발음과 발성은 기본이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자유롭게 몸을 쓸 수 있는 유연성, 그리고 무엇보다 배역과 혼연일체가 된 듯 섬세한 연기 실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 그 점에서 뮤지컬 배우 박민성은 팬들은 물론, 제작자들 사이에서도 그 실력을 신뢰받고 있는 국내 뮤지컬계에 기둥 같은 존재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뮤지컬 무대 위에서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지만 처음 도전한 분야는 가수였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7년 함께 뮤지컬 배우를 준비하던 친구와 뮤지컬 <그리스>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두디’ 역에 덜컥 캐스팅되면서 뮤지컬계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뮤지컬이란 무림의 고수들은 차고 넘쳤고, 그 속에서 생존하기란 영 녹록지 않았다. 데뷔 2년이 지날 쯤 캐스팅의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때의 불안을 그는 뼈를 깎는 노력과 어떤 배역도 마다하지 않는 도전으로 정면 돌파하며 성장해 나갔다. 보컬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1년 반 동안 클래식 보컬 앙상블 ‘유엔젤보이스’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는 탄탄대로다.
<피맛골 연가>, <로미오 앤 줄리엣>, <라 레볼뤼시옹>, <삼총사>, <보니 앤 클라이드>, <두 도시 이야기>, <조로>, <로빈훗>, <쓰루 더 도어>, <밑바닥에서>, <벤허>, <프랑켄슈타인>, <여명의 눈동자>, <시데레우스> 등 창작 뮤지컬은 물론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에서 끊임없이 팔색조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그가 올여름 다시 한 번 뮤지컬 <벤허>의 메셀라에 도전한다. 2년 만에 귀환하는 뮤지컬 <벤허>는 루 월러스(Lew Wallace)가 1880년 발표해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유다 벤허’라는 한 남성의 삶을 통해 고난과 역경, 사랑과 헌신 등 숭고한 휴먼 스토리를 완성도 높게 담아낸 수작이다.
박민성이 분하는 메셀라는 한때 유대의 귀족 벤허 가문에 도움을 받고 살았으나, 이제는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의 장교가 돼 벤허의 집안을 궁지로 몰아넣는 인물이다. 특히, 메셀라는 로마군 장교가 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친우인 ‘벤허’를 만나는 극 초반에는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에 대한 반가움을, 벤허와의 갈등이 고조되는 이후에는 복수심과 분노를 표현해내야 하는 입체적인 감정선을 지닌 인물이다. 더욱이 이 작품의 경우 복근이 그대로 드러나는 로마시대 복식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들의 뼈를 깎는 몸매 관리로도 악명이 높다.
박민성 역시 작품 연습에 돌입하면서 매일매일 물을 4리터씩 마시면서 깐깐한 식단 관리와 운동을 병행하는 등 완성도 높은 연기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단, 2년 전과 비교했을 때 배역을 향한 열정은 유지하되, 매 순간 무대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도록 냉정한 자세를 터득하게 됐다는 그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2년 만에 다시 메셀라 역할을 맡게 됐는데, 소회가 궁금합니다.
“<벤허>라는 큰 작품에 한 번 더 참여하게 된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초연 때도 워낙 평이 좋았던 작품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작품성은 물론 음악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업그레이드가 됐습니다. 검술신도 더 화려해졌고, 넘버도 늘었어요. 특히 메셀라의 넘버(분량이) 좀 더 늘었는데 기가 막혀요. 제 목소리 들으러 꼭 한번 오세요.(웃음)”
2017년 벤허 당시 인터뷰를 보면 혹독한 자기관리가 이뤄졌던 것 같아요. 이번에도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나요.
“몸을 만들기 위해 물을 하루에 4리터씩 마시고 있어요. 식단 조절과 운동도 병행하고요. 물론 아무래도 2년 전과 비교해서 신체 나이는 속일 수가 없더라고요. 처음 검술 신(scene)하면서 고난도 곡인 ‘나 메셀라’를 부를 땐 숨도 많이 찼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연습을 계속하다 보니 몸이 기억을 되찾았는지 다시 (노래와 검술 신이) 잘되더라고요. 저 아직 죽지 않았나 봐요.(웃음) 단, 2년 전과 달라진 점은 있어요. 무대에서 관객들을 보며 연기하다 보면 어떤 에너지가 차올라요. 그런데 예전엔 간혹 그게 (감정) 조절이 안 돼서 호흡이 차고, 부담되기도 했어요. 이제는 그런 부분에서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 할 수 있는 연륜이 좀 생겼어요. 과거에는 무조건 뜨겁게 타올랐다면 지금은 그 열정은 간직하되 연습할 때도 진중하고 차분하게 균형을 잡으려고 해요. 냉정과 열정을 오고 간다고 할까요.”
올해 활약이 유독 두드러집니다. <벤허> 전에 창작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시데레우스>에서 연달아 주연을 맡았는데, 새로운 캐릭터를 연구할 때 노하우가 있나요.
“노하우가 딱히 있지는 않아요. 대본을 받아 읽고, 음악을 들었을 때 ‘아,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어요. 저는 대개 처음 생각했던 느낌을 좇는 편인데 연출팀이 생각한 형상들과 비슷한 편이었어요. 물론, 제 방향이 틀렸을 때는 바로 잡아주기도 하면서 창작의 이미지들을 형성해 가요. 아무래도 저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니까 함께하는 분들과 끊임없이 상의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많이 얻게 되죠.”
<시데레우스>에서 갈릴레오 역할을 맡았는데 익살스런 연기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자신을 소개할 때 손가락을 펴면서 “갈릴레5, 갈릴레2”라며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는데, 본인이 준비한 것인가요.
“네, 그 장면은 즉흥적으로 나온 게 맞아요. 사실 제가 갈릴레오 역할을 하면서도 그 사람의 풀 네임이 늘 헷갈렸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명확하게 각인시킬 수 있을까’ 하다가 손가락을 활용해보기로 했죠. 사실 뭐든 그냥 말로만 하면 쓱 지나가 버리잖아요. 동작을 통해 전달하려는 내용을 더 극대화한 셈이죠. 저는 배우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가 정확한 딕션(발음)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배우가 노래를 통해 무슨 말을 하는지 한 곡만 놓쳐도 관객들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거든요. 그러면 제대로 극을 감상할 수 없고, 그 극은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무대 위에서 최대한 관객들에게 정보 전달이나 이해를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답니다.”
무대 위에서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경우도 더러 있나요.
“전 공연이란 함께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칫 과한 욕심을 부리면 극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거든요. 그래서 가급적 대극장에서는 철저하게 (배우들 간) 약속을 지키려는 편이에요. 애드리브도 지양하죠. 다만, 종종 관객들의 피드백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소극장에서는 극의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 한 템포씩 변화를 주기도 해요. 그게 또 소극장 공연의 매력이니까요.”
2017년 <벤허> 당시 개명했던 이름(박성환)을 다시 본래 이름으로 바꿨는데, 그리고 나서 더 좋은 일들이 많았나요.
“아직도 호적상으로는 박성환으로 돼 있어요. 활동 이름만 제 본명 박민성으로 바꾼 셈이죠. 사실 박성환이란 이름도 좋아했고, 박민성이란 이름을 특별히 더 좋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다시 박민성으로 돌아온) 지난 2년간 좋은 일들이 많았던 거 같아요. 그전보다 다양한 작품에서 배역 제안이 들어오고, 더 많은 관객들이 저를 알아봐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죠. 특히 저희 아이들과 종종 공연을 함께 보러 다니는데 애들이 ‘아빠, 저기 사람들이 아빠 계속 쳐다봐’ 하면서 으레 의식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죠.” 필모그래피가 화려합니다. 모든 작품이 소중하겠지만, 그래도 ‘인생캐(인생 캐릭터)’를 뽑아보자면 어떤 작품, 어떤 캐릭터를 꼽겠습니까. 반면에, 유독 힘들었던 작품이 있었다면요.
“‘인생캐’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앙리 뒤프레’와 ‘괴물’ 역이죠. 반대로 힘들었던 작품은 뮤지컬 <밑바닥에서>를 꼽고 싶어요. 당시 ‘배우’ 역할을 맡았는데, 연습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역할이 처한 상황이 너무 처절했다고나 할까요. 사실 그동안 맡은 배역 중에 자살하는 역할을 해본 경험은 있어요. 그런데 ‘배우’라는 캐릭터는 정말 세상 가장 밑바닥까지 갔는데도 갈 때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살한 거거든요. 그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상하게 그렇게 처절한데 눈물연기도 잘 안 됐고요. 오죽했으면 마지막 연습 날까지도 이걸 진짜 해야 하나 고민했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첫 공연을 하게 됐는데 그날 관객들의 진심어린 박수를 받는 순간, 배우로서 진정한 환희를 처음 느꼈어요. 그 이후로는 눈물 신마다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롤 모델로 삼는 배우가 있나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속 조승우 선배의 연기를 처음 보고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직도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 편이지만, 예전에 대기실에서 우연히 뵙고 인사한 적이 있는데 어찌나 가슴 설례였는지 몰라요. 지금도 롤 모델 삼고 싶을 정도로 존경합니다. 다만, 제가 배우 활동을 어느덧 13년째 하다 보니 무대에서 오랫동안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 대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졌어요. 서지영 선배, 이희정 선배, 김봉환 선생님 같은 분들을 보면서 단지 반짝이는 스타가 아니라 평생 배우로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습니다.”
원래 성악 전공이 아니라 보컬에 대한 노력이 상당했을 것 같아요. 유엔젤보이스 활동도 도움이 됐다고 하는데, 정말 어떻게 하면 이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나요.
“사실 우리나라에 노래 잘하는 배우들이 정말 많아요. 그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연습밖에 답이 없더라고요. 물론 아무리 노래를 열심히 해도 누구나 완벽하게 노래를 잘할 수는 없죠. 분명히 타고난 부분도 있을 거고요. 저도 고음을 내는 건 원래 수월한 편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데뷔 초에는 안일하게 그런 제 강점에 의지한 부분도 더러 있었어요. 결과는 좋지 않았죠. 데뷔 후 빠르게 성장했던 것과 달리 2년쯤 지나니 점점 더 캐스팅 기회가 줄어들었어요. 일종의 슬럼프가 왔죠. 그러면서 혼자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때 깨달은 게 그동안 제가 노래와 연기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막 했던 것 같더라고요. 그 사실을 깨닫고는 일단 활동을 접고, 2010년부터 1년 반 가까이 유엔젤보이스 활동에 매진했죠. 소리가 너무 좋은 친구들이 주변에 많으니 그들의 좋은 점을 잘 배우고 싶었어요. 제가 가진 장점은 장점대로 살리면서요. 그때부터 매 순간 정말 절실하게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즈음 맡게 된 뮤지컬 <피맛골 연가>도 뮤지컬을 그만두려고 했던 저를 다시 무대로 끌어줬고요. 작품에 그런 가사가 있었어요.
‘열린 듯 닫힌 듯 돌고 도는 길, 눈뜨면 언제나 막다른 골목’이란 가사였는데 제 얘기 같아서 가슴이 무척 아팠어요. 그리곤 생각했죠. ‘현실에 안주한 삶을 살 건지,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서라도 드넓은 바닷속을 뛰어들 건지’ 말이죠. 결국 오디션을 봤고, 그 공연을 하게 됐어요. 매 순간 제 삶을 빗대어 연기하고 노래했었죠. 그러다 보니 그게 곧 제 삶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거의 쉼 없이 작품을 하고 있어서 <벤허>를 마치면 벌써 10월이 됩니다. 올 하반기에 작품 계획이 또 있나요. 뮤지컬 배우 말고 정극에 도전할 생각도 있나요.
“하반기에 논의 중인 뮤지컬 작품들이 있긴 한데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습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영화나 드라마 연기 분야도 도전해보고 싶은데 이건 운때가 맞아야 할 것 같아요. 서둘러서 새 분야에 욕심내기보다는 일단은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차근히 해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꿈이 있다면요.
“지금도 자기 전에 누워서 생각을 해요. 내가 배우를 안 하고 도망갔거나 쉽게 만족하고 도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죠. 그만큼 저는 이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하고, 그것에 늘 감사해요. 앞으로도 성대는 물론, 체력이 버텨줄 때까지 오래오래 무대에서 관객들을 찾아뵙고 싶어요. 치매가 걸리지 않는 한 평생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웃음)”
박민성 뮤지컬 배우는…
1982년 8월 7일생. 서경대 연극영화학부를 졸업하고, 2007년 뮤지컬 <그리스>로 데뷔했다. 이후 <위대한 캣츠비>, <노트르담 드 파리>, <피맛골 연가>, <로미오 앤 줄리엣>,<라 레볼뤼시옹>, <달고나>, <전국노래자랑>, <러브 레시피>, <잭 더 리퍼>, <삼총사>, <보니 앤 클라이드>, <두 도시 이야기>, <조로>, <로빈훗>, <쓰루 더 도어>, <밑바닥에서>, <벤허>, <프랑켄슈타인>, <여명의 눈동자>, <시데레우스> 등 다수의 작품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1호(2019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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