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외 나들이의 행복이 오늘날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자동차, 철도처럼 문명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소수 귀족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랜 기간 일반 대중들은 신분으로 속박된 계급사회 속에서 살아 왔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끊임없는 전쟁과 폭동으로 편치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 속에서 일반 서민들이 지금의 우리처럼 자유롭게 여행하며 봄을 만끽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언제일까. (사진_위) 스털링 오버레이와 에칭으로 멋을 낸 칵테일 잔(벨 에포크).
(사진_아래) 스털링으로 멋지게 조각을 한 뮤지엄급 디캔터(벨 에포크).
평화와 황금의 계절
19세기 말엽이 돼서야 유럽은 전쟁을 멈추고 황금 같은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시대다. 이 시기는 보불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로 유럽 대륙에서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시기를 가리킨다.
유럽의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세기말 혹은 세기의 전환기로서 특별히 좋은 시절이라는 의미인 ‘벨 에포크’로 통칭해서 불린다.
벨 에포크는 좋은 시절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데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시민들에게 화려하게 선보였다. 자동차와 기차,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이 발명됐고 비행기를 이용한 도버해협 횡단이라는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일도 있었다.
도시를 화려하게 밝히는 전구가 발명됐고 이와 함께 도시도 재정비됐다. 도시가 아름다워졌고 나라마다 발명품을 과시하는 박람회가 열려 구경거리가 넘쳐났다.
또한 여가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사진기와 영화, 백화점, 바캉스도 이 시기에 생겨났다. 귀족이 아닌 평민들도 이국적인 풍물을 접할 수 있는 여행을 동경하면서 최초로 계획적인 여행이 이루어져 여행자 수표와 패키지여행 상품도 등장하게 됐다. 말 그대로 열심히 일하는 모두에게 혜택과 여유를 선사하는 꿈같은 시절이 벨 에포크 시대였다.
수입 상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발전해 19세기 중반에 탄생한 백화점 또한 이 시기에 자리 잡아 소비라는 달콤한 맛을 대중에게 선사했다. 당시의 마케팅 전략은 요즘의 광고와 너무도 흡사해 놀라울 정도다. 봄이 되면 백화점의 한 해 매출을 가늠하게 되는 대규모 직물전이 기획됐다. (사진_위) 벨 에포크 시대의 조선의 아름다운 조각보.
(사진_아래) 벨 에포크 시대의 여성적인 색감이 돋보이는 조선의 아름다운 조각보.
집 안을 꾸미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던 직물은 여인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상류층에서는 벽에 종이 대신 실크 천을 발랐고, 정교한 문양이 직조된 다마스커스산 식탁보를 깔았다. 테이블클로스와 함께 화려한 도자기와 유리 테이블 웨어는 이 시대 여인들의 필수 쇼핑 아이템이자 자랑거리였다.
늘어난 중산층의 구매력은 도자기와 유리 산업의 최전성기로 이어졌고, 제2차 산업혁명을 이끌기도 했다. 산업 발전과 함께 왕성한 경제활동으로 부를 쌓은 중산층들은 그동안 상류층만 누려 왔던 사교 활동을 즐기기 시작했다.
집으로의 손님 초대가 늘어났고 손님을 초대하는 격식이 집안의 위상을 말해주던 시대였기에 쇼핑으로 준비된 테이블클로스와 그릇들은 집안의 자랑거리가 돼 손님상을 장식했다. (사진) 24K 금도금으로 화려하게 꽃무늬를 표현한 뮤지엄급 티파니 칵테일 잔(벨 에포크).
테이블 위 펼쳐진 향락
이 시기는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명품 브랜드들이 대거 나타난 시기이기도 했다. 여인들의 오랜 로망으로 자리 잡고 있는 샤넬도 그중 하나였는데, 코코 사넬 여사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분야는 다름 아닌 모자 가게였다.
당시 여자들의 머리는 한결같이 모두 긴 머리였고, 결혼한 부인들은 예외 없이 올림머리를 했기에 모자와 머리핀은 여인들의 필수품이었다.
때마침 1860년대부터 불어 닥친 일본 문화의 유행으로 인해 여러 가지 장식을 더한 빗핀은 19세기 중반 내내 여인들의 애용품이 됐다. (사진) 벨 에포크 시대의 조선의 옥을 재해석해서 핑크 사파이어로 포인트를 준 반지. (사진) 벨 에포크 시대에 유행했던 뱅글을 재해석한 블루 사파이어 뱅글.
이러한 유행에 힘입어 르네 랄리크를 비롯한 아르누보를 빛냈던 많은 예술가들의 손에서 아름다운 빗핀들이 만들어졌다. 금박과 은박을 입힌 고급스러운 장식의 빗핀은 벨 에포크 시대 여인들의 머리를 화려하게 치장했다.
이러한 유럽 사회의 발전과 풍요로움은 각 나라의 만국박람회를 통해 전시됐고 이것을 구경하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도시는 더욱 활성화됐다.
최초의 만국박람회는 1851년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렸고, 각종 공산품과 공예품을 통해 자국의 산업 발전 수준을 과시하는 국력의 홍보마당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벽두인 1900년에는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려 유럽은 바야흐로 벨 에포크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새로운 관람 여행 상품까지 생겨나게 될 정도였으며, 우리가 해외에서 즐기는 많은 랜드마크 상징물들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파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에펠탑과 알렉산드르 3세교, 오르세미술관으로 우리에게 사랑받고 있는 오르세역사도 벨 에포크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20세기를 맞이하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지탱해줄 혁신적인 에너지로서 전기가 주인공이 됐다. 전기가 가진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슬로건 아래 세워진 ‘전기궁전’에서는 매일 밤 화려한 조명 쇼가 펼쳐져 파리의 밤을 환하게 밝혔다.
한 세기가 지난 요즈음 무인자동차와 드론, 인공지능(AI) 로봇들이 세계 유명 전시회에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모습을 과거에 비춰보며 우리들을 위한 새로운 벨 에포크를 기대해본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y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8호(2019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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