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 인류 역사에서 항상 중심이 돼 온 귀금속이다. 원소기호 AU, 원자번호 79번인 금은 부와 탐욕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화폐로도 사용되는 등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광물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로마 중세에 이르기까지 금은 가장 훌륭한 거래 수단이었으며 부의 상징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했을 때 마케도니아인은 페르시아 왕이 궁궐에 비축해 놓았다는 막대한 금을 기대하고 동방으로 향했다. 기원전 1091년 중국에선 금이 처음으로 법정화폐로 인정됐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금을 찾으러 나섰기 때문이다.
금은 은이나 구리 등 다른 금속과 달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속성 때문에 최고의 금속이라는 자리를 지금까지 차지해 왔다. 금은 또 가장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에 글로벌 리스크가 발생할 때마다 금 수요가 급증했다. 실제로 금은 표준화돼 있으며 적은 부피로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환금성도 뛰어나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실물자산이다.
금은 이처럼 희소성, 가단성, 안정성, 내구성, 균일성 등 물리적 화폐의 필수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유일한 원소다. 특히 금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강대국들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최근 들어 가장 안전한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금값’이 말 그대로 ‘금값’이 되고 있다. 금이 화폐보다 안전한 이유는 첫째, 실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될 위험이 없다. 둘째, 금은 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 2가지 상황에서 재산을 보호할 수 있다. 셋째, 금의 가치는 변함없다. 대부분 ‘금값이 올랐다’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금이 오른 게 아니라 달러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넷째, 금은 사이버 금융 전쟁에서도 해킹당할 위험이 없다.
◆금 사들이는 중국, 위안화 국제화 노림수?
국제 금값이 오르고 있다. 국제 금값은 올 초 대비 이미 12% 정도 오른 상태이며, 연말까지도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 금값이 오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미국과 북한 간의 군사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발 지정학적 리스크와 미국 트럼프 정부의 군사 옵션 사용 가능성이 확산되면서 안전자산인 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북한 핵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을 경우 국제 금값은 내년에도 상승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세계 최대 금 상장지수펀드(ETF)를 운영하는 미국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SSGA)는 “내년에도 국제 금값은 강세가 지속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안전자산의 경제학적 개념은 투자의 위험이 없는 자산을 말한다. 투자에는 위험이 수반된다. 투자의 위험에는 채무 불이행의 위험, 시장가격 하락의 위험, 그리고 자산이 사라질 위험 등이 있다.
전쟁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당연히 투자의 위험이 증폭된다. 전쟁 상황에서 안전자산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미국과 북한이 이른바 ‘말의 전쟁’을 벌이면서 가장 인기를 끄는 안전자산으로 금이 꼽히고 있다. 2003년 1월 이라크 전쟁 가능성이 높아졌을 당시 국제 금값이 폭등했던 사례가 있었다.
국제 금값이 오르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중국과 러시아가 금을 대량 매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국민들은 전 세계에서 인도 국민들과 함께 금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중국인들에게 금은 돈과 재복을 상징한다. 중국에서 명절 때면 금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 것도 금으로 만든 목걸이 등 장신구를 선물로 주고받기 때문이다.
중국은 2013년 인도를 넘어 세계 최대의 금 소비국이 됐다. 그런데 중국에서 최근 장신구보다는 골드바(금괴)나 골드코인(금화) 매입이 늘어나고 있다. 세계금협회(WGC)는 ‘금 수요 추세 보고서’에서 지난 2분기 골드바, 금화에 대한 중국의 시장 수요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6% 늘어났다고 밝혔다. 중국에서 골드바와 골드코인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금을 투자 목적으로 매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금 투자 수요가 급증한 건 경제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됐다. 중국 증시와 위안화 가치의 변동성이 큰 데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 주요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이미 너무 올라 투자 대상으로서의 매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반부패 개혁에 나섬에 따라 재산 은닉의 방법으로 금을 선호하는 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금 거래소 거래량은 지난해 모두 2만4000톤, 선물거래소 거래량은 3만9000톤, 상업은행들의 장외 거래량은 7000톤으로 합계 금 거래량은 7만 톤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장융타오 중국 황금협회 부회장은 “제13차 5개년 계획(13·5 규획, 2016∼2020년) 기간에 금 거래량은 10만 톤을 넘어설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중국에서 금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중국 기업들이 해외 금광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 지난해 중국 내 누적 금 생산량은 453톤을 기록하면서 2015년 대비 3.4톤, 0.76%가 증가했지만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중국 최대이자 세계 3위 금 생산 업체인 쯔진광업은 캐나다 스프로트자산운용과 해외 광산 매입을 위한 합작 펀드인 쯔진스프로트펀드를 설립했다. 쯔진스프로트펀드는 캐나다 배릭 골드가 보유한 파푸아뉴기니 소재 금광 지분 50%를 2억9800만 달러에 사들였다. 피터 그로스코프 쯔진스프로트펀드 최고경영자(CEO)는 “중국의 주요 금 생산 업체 5~6곳 모두 해외 금 자산 매입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중국의 다른 금 생산업체인 산둥자오진 그룹도 남미의 금광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이 회사는 호주와 캐나다 등의 광산 지분 인수도 고려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내 광산에 대한 대대적인 탐사도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2016년 말 현재 조사를 거쳐 이미 1만2100톤의 금 매장량을 확인했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다.
게다가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와 관련된 국가들로 금광 개발을 확대할 계획이다. 장 부회장은 “일대일로 연계 국가들은 금 자원이 풍부하고 소비 수요도 왕성해 투자 거래가 활성화돼 있다”면서 “앞으로 금을 선도 업종으로 삼아 이들 국가와 금광 탐사, 채굴, 가공, 소비, 투자 거래 방면에서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도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고 있다. WGC의 집계로는 중국의 금 보유량은 지난 2분기 현재 1842.6톤으로 10년 전인 2007년 2분기 600톤에서 3배 이상 늘어났다. 중국의 금 보유량은 미국(8133.5톤), 독일(3374.1톤), 이탈리아(2451.8톤), 프랑스(2435.9톤)에 이어 세계 5위에 올랐다. 한국은 104.4톤, 국제통화기금(IMF)은 2814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중국의 금 보유량은 4000톤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인민은행이 최근 몇 년간 해마다 사들이는 금 매입량은 500여 톤에 달한다. 중국 인민은행은 자국의 금광에서 금광석을 직접 매입하거나, 자국 내 상업은행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런던과 뉴욕의 국제 금 거래소 등에서 금을 은밀하게 구입하고 있다.
중국 인민은행이 금을 대거 매입하는 것은 미국 달러화의 패권에 대항하고, 위안화의 국제화를 가속화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황금협회는 “금의 전략적 가치는 위안화의 국제화를 지원하는 것”이라면서 “금은 기축통화로 인식될 수 있다”고 밝혔다. 국제 금 전문가인 쿠스 얀센 애널리스트는 “중국은 미국 달러화의 패권을 대체할 국제통화 시스템의 핵심을 금으로 보고, 사활을 건 확보전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전략경제학자인 윌리엄 엥달도 “달러화 중심 경제 시스템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이 제대로 대접을 받을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면서 “중국 등 일부 국가의 중앙은행이 금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미국 중심 금융질서 바뀔까
러시아도 중국처럼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고 있다. WGC에 따르면 러시아의 금 보유량은 1680톤으로, 세계 6번째 금 보유국이다. 러시아는 국제 시장에서 금을 사들이는 것은 물론 자국 내에서 생산하는 금도 모두 사들이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엘비라 나비울리나 총재는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고려할 때 러시아의 금융 안정성을 꾀하는 차원에서 금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주목할 점은 러시아가 미국 국채를 팔고 금을 사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달러화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 중앙은행이 금을 집중 매입한 덕분에 외환보유액도 늘어났다. 금값이 올랐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지난 8월 초 기준 4150억 달러로 3816억 달러인 한국보다 많다. 나비울리나 총재는 “앞으로 금값이 더욱 오른다면 외환보유액 목표치인 5000억 달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중국과 러시아의 목표는 국제 경제 질서 측면에서 볼 때 미국 달러화 시대 이후를 노린 포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 달러화는 기축통화로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화폐다. 각국 화폐의 교환가치를 달러화에 고정시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모든 석유 거래가 달러화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달러화는 무역의 결제와 각국의 주된 지불준비자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경상적자가 확대될 경우 유동성이 확대되면서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반대로 경상흑자가 늘어날 경우 유동성이 축소되면서 달러화 가치가 상승한다.
이에 따라 달러화의 신뢰성에 문제가 생기는 딜레마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IMF는 달러화의 보조적 성격의 준비자산이자 가상통화인 특별인출권(SDR)을 만들었다. SDR는 IMF 회원국들이 지분 등 일정 조건에 따라 IMF로부터 국제 유동성을 인출할 수 있는 권리다.
SDR의 통화 바스켓은 달러화, 유로화, 일본 엔화, 영국 파운드화 및 중국 위안화의 가중 평균치로 구성돼 있다. 중국은 위안화 SDR의 통화 바스켓에 공식 편입된 이후 SDR의 역할 강화를 통해 기존의 미국 중심 금융질서를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국제 금융계 일각에선 SDR와 금의 가치를 연동한 새로운 통화가 달러화를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금을 대량 매입하는 것은 바로 달러화 이후 시대를 노린 전략적 노림수라고 볼 수 있다.
미국 거시경제 분석가인 제임스 리카즈는 <금의 귀환(The New Case for Gold)>에서 “금이 국제 통화 시스템에 귀환했다”며 “중국, 러시아 등이 암암리에 금의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것은 장기적으로 달러 헤게모니가 붕괴될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무튼 달러 헤게모니 시대가 붕괴할지 여부는 미지수이지만 금을 많이 보유한다는 것은 국제 경제 질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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