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은 여성 최초의 도쿄(東京) 유학생이자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1922년 창립된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고 개인전을 열었다. 또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로서 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시(詩) ‘인형의 가(家)’ 등의 작품도 남겼다.
1. <강변풍경>, 1930년대, 캔버스에 오일, 23×32cm, 개인 소장2. 결혼할 당시 나혜석 사진으로 그녀의 나이 25세. 당시 여성으로는 최초로 도쿄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의 당당함이 눈빛에 가득하다.
1. <강변풍경>, 1930년대, 캔버스에 오일, 23×32cm, 개인 소장2. 결혼할 당시 나혜석 사진으로 그녀의 나이 25세. 당시 여성으로는 최초로 도쿄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의 당당함이 눈빛에 가득하다.
결혼한 후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긴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동유럽과 프랑스 파리를 거쳐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대서양을 건너 미국 대륙을 횡단한 후 증기선으로 태평양을 넘어 귀국하기도 한 선각자였다.

또한 나혜석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선언해 당대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며 봉건적 남성중심주의에 과감하게 맞서 여성의 인간적 권리를 요구한 투사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서도 그녀는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친척의 외면과 사회의 냉소로 아무도 모르게 길 위에서 맞이한 비극적 최후는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었다. 나혜석은 진정 궁핍한 시대의 외로운 선각자였다.

수재 나혜석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불꽃처럼 살다간 ‘신여성’의 상징
나혜석은 1896년 4월 18일 경기도 수원에서 나주 나 씨 나기정과 수성 최 씨 최시의 사이의 5남매 가운데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여유 있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시대인 1900년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였다가 시흥군수가 됐고, 경술국치 이후 용인군수를 지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고 “이 세상에서는 계집애들도 배워야 한다”는 아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딸들도 신교육을 받게 할 만큼 시대를 앞서 가는 깨인 사람이었다.

1913년 3월 나혜석이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을 때 그녀의 성적은 평균점수가 만점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났고, 특히 수학이 가장 뛰어나 오빠 나경석의 자랑이기도 했다.

오빠는 1910년에 일본 도쿄고등공업학교에서 유학했고 당시 일본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재일 한국인 민족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찍이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나혜석은 오빠의 권유로 1913년 4월 15일 일본 도쿄 혼고 기쿠사카초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매일신보(每日申報)는 1913년에 이미 ‘재자재원(才子才援)’이라는 제목으로 나혜석이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졸업시험에서 최우등의 성적을 얻었음을 보도했고, 1914년에는 ‘동경학교에 조선규수’라는 제목으로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조선 여자로서 유학하게 됐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축하를 보내고 있다.

이는 이후 나혜석이 남들 하는 대로 부잣집에 시집가서 ‘비단 치맛자락을 늘이며’ 사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세계를 꾸리는 첫걸음이자 우리 근대미술사의 출발점이었다. 조선 사람으로 이렇게 본격적으로 유화를 공부한 사람은 나혜석이 여성으로서는 물론 처음이며, 남성까지 통틀어도 네 번째였다.

3. <선죽교>, 1933년, 목판에 오일, 23×33cm, 개인 소장 4. <이화원>, 캔버스에 오일, 23×32cm, 개인 소장
3. <선죽교>, 1933년, 목판에 오일, 23×33cm, 개인 소장 4. <이화원>, 캔버스에 오일, 23×32cm, 개인 소장
, 1933년, 목판에 오일, 23×33cm, 개인 소장 4. <이화원>, 캔버스에 오일, 23×32cm, 개인 소장">
도쿄 유학시절

도쿄 유학시절은 나혜석의 모든 생각과 인간관계와 그에 따른 인생이 결정된 때이기도 하다. 당시 도쿄는 서구의 문물이 들어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한창 꽃피던 시기다. 이곳에서 나혜석은 새로운 서구 사상과 일본의 신여성운동을 접했으며, 유화를 배웠고, 글을 썼다.

도쿄 유학생들의 동인지인 <학지광>(學之光)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부덕의 장려가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여자도 기예를 익히고 무슨 일이든지 처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것을 제안하는 글을 발표한다.

최초의 여권에 대한 자각적 표현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1915년 조선 여자 유학생 친목회를 결성하고 잡지<여자계> 2호에 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나혜석은 최초의 근대 여류 소설가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오빠의 주선으로 당대 최고의 조선 청년 지식인들을 만났고, 그중에서도 빛나는 인물이었던 최승구와 예술을 논하며 연애를 했다. 도쿄의 학생들이 몰려다니는 담벼락에 ‘나혜석은 ××의 것’이라는 치기어린 낙서가 있을 정도로 그는 화제의 중심 인물이었다. 불행히도 애인 최승구는 폐병으로 죽고, 후에 남편이 될 김우영을 만난다.

나혜석은 1918년 3월 도쿄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잠시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종로구 운니동 집에서 쉬면서 그림을 그렸다. 나혜석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귀국한 이듬해 1월부터 매일신보에 연말연시의 세시풍속 <섣달대목>과 <초하룻날>이라는 신문 삽화를 그리면서부터다.

이 삽화들의 소재는 흐뭇한 가정사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고, 필선은 질박하면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친근감을 주고 있다. 화가 나혜석으로 이름을 드러낸 공식적 데뷔였던 셈이다.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불꽃처럼 살다간 ‘신여성’의 상징
결혼 그리고 이혼

김우영은 삼척 김 씨로 1886년 동래에서 출생했으니 나혜석보다 열 살 위였다. 1916년 교토대 법학부를 다닌 김우영은 충주 김 씨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가 부인이 일찍 죽어 홀몸이었고, 문벌과 재산이 있는 괜찮은 남편감이었다.

1920년 4월 10일 나혜석의 나이 스물다섯, 서울의 정동 예배당에서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린다. 나혜석은 결혼에 임해서 김우영에게 세 가지 약속을 받아낸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前室) 딸과는 별거케해주시오.’ 요즘도 쉽지 않은데 1920년대 결혼서약치고는 실로 파격적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이는 개인적으로는 결혼하고서도 계속 자기 발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실천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근대 최초의 여성 화가로서, 예술가로서, 선각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이런 나혜석의 요구에 김우영은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신혼여행은 나혜석이 원하는 대로 전라남도 고흥에 있는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가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대신했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가당찮은 대담한 여인이었다.

이후 김우영은 1923년 일본의 외무성 관리가 돼 만주 안동현의 부영사로 부임하면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게 된다. 나혜석에게는 새로운 세상에 바라보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불꽃처럼 살다간 ‘신여성’의 상징
나혜석이 결혼 직후인 1921년 3월에 가진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 개인전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리는 성황을 이룬다. 당시 출품됐던 70여 점은 전해지는 바 없고, 1922년 ‘선전(鮮展)’에 출품됐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그녀의 그림은 일상의 주변 풍경을 중심 테마로 해 고전적 아카데미즘의 영향을 받은 안정된 구도와 정리된 원근법, 그리고 인상파의 영향을 입은 밝은 색조로 그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나혜석의 개인사적인 비운은 가장 큰 행복 속에서 이루어졌다. 1927년 나혜석 부부가 세계여행 중 파리에 체류할 때 남편이 법학 연구를 목적으로 독일 베를린으로 잠시 떠나 있게 되는데, 그해 10월 파리에 혼자 남아있던 나혜석은 민족 지도자로서 파리 만국박람회를 관람하러 왔던 천도교 교령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은 1929년 3월 귀국 후 남편 김우영에게 알려져 이혼을 강요당하다가 결국 1931년 봄 이혼을 하고 만다. 세상이 부럽지 않던 11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기른 3남1녀의 자녀들을 손 한 번 만져보지 못하게 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나혜석은 이혼 후에도 계속 작품 활동을 했고 전무후무한 <이혼고백서>를 쓸 정도로 자신의 자존심을 추스르고자 했으나 허물어지는 경제적 어려움을 당해낼 재간이 없게 된다. 나혜석은 다시 최린에게 찾아가나 동정을 받기는커녕 차가운 냉대와 서슬 퍼런 권력의 위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이 소송은 당시 장안의 최고의 화제였고 나혜석이라는 한 인간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계기가 됐다. 결국 최린에 의해 합의로 마무리됐지만, 나혜석을 아껴주던 오빠도 이후부터 집안을 망신시켰다는 이유로 등을 돌린다.

이제 세상의 시각마저 신문화의 기수 나혜석이 아닌 부도덕하고 부정한 여인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1935년 서울 서린동에서 개최한 소품전에는 사람들의 조소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그즈음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강변풍경>은 얼핏 보면 거칠고 활달해 보이지만 우울한 내면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이혼 후의 고독감이 내적 감정의 표현으로 기울어지면서 회화적 순수의 깊이로 침잠한 것이다. 나혜석의 그림은 오늘날 남아 있는 작품이 20여 점 남짓하다.

원작이 의심되는 작품도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그나마 선전 입선작 도록으로 남은 흑백사진 도판으로 나혜석의 화풍을 짐작할 수 있다는 데 위안을 삼을 뿐이다.
5. 1930년 나혜석의 나이 35세.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기 얼마 전 사랑하는 네 자녀, 나열· 선· 진· 건과 함께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6. 정동교회 전경. 1987년 10월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 예배당이다. 이 교회에서 나혜석은 1920년 4월 10일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김우영과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최선호2010ⓒ
5. 1930년 나혜석의 나이 35세.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기 얼마 전 사랑하는 네 자녀, 나열· 선· 진· 건과 함께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6. 정동교회 전경. 1987년 10월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 예배당이다. 이 교회에서 나혜석은 1920년 4월 10일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김우영과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최선호2010ⓒ
쓸쓸한 죽음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나혜석은 1937년 말쯤 수덕사 견성암으로 김일엽을 찾아간다. 이후 나혜석은 1944년 말까지 수덕사 밑 수덕여관에서 머물며 그림을 그리면서 때때로 아이들을 보기 위해, 지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 나들이를 했다. 또한 진주 근처 다솔사와 해인사에서도 묵은 적이 있다. 공주 마곡사 근처에 방을 얻어 머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1944년 말, 몸은 이미 병색이 완연해 수덕사에서 나와 서울의 인왕산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게 된 나혜석은 이후 안양의 경성보육원 등을 전전하며 서울에 나타났다가 냉대를 받고 자취를 감추는 생활을 반복했다.

평생을 길 위에 서서,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이자 남성의 부속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자각한 선각자였던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몹시 추운 겨울, 길 위에서 지켜보는 가족도, 눈을 감겨주는 따뜻한 손길도 없이 여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이듬해 3월 용산구 관보에 게재됐는데 이름과 나이뿐 본적과 주소는 불명, 옷은 남루하고 소지품은 무(無), 사인은 병사로 적혀 있었다. 수원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도쿄 유학과 세계일주, 파리시절의 로맨스 그리고 4남매의 어머니로서 누렸던 조선 최초의 화려함은 관보에 게재된 ‘소지품 없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녀의 죽음은 시대의 관습에 저항하며, 한 시대 최고의 호사에서 최하의 궁핍까지, 최고의 수재에서 행려병자의 비극까지 온 몸으로 두루 겪은 한 여인의 비극적 운명이었다.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불꽃처럼 살다간 ‘신여성’의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