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통(窮卽通).’ 불황이 깊어지자 많은 경영인들이 이 말을 꺼낸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영원하다. 이 같은 주역의 근본 원리는 요즘 같은 때 작게나마 우리에게 힘을 주는 긍정적 에너지가 된다. 한국 뮤직컬계의 미다스 설도윤 설앤컴퍼니대표야말로 긍정의 힘으로 단단히 뭉쳐진 사람이다. “위기가 기회라고 하죠. 저도 외환위기를 누구보다 혹독하고 처절하게 겪어 본 사람입니다. 제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죠. 오뚝이처럼 그걸 딛고 일어나면서 자가발전한 것 같아요. ‘무조건 할 수 있다는 확신’, ‘휴먼 네트워크’ 이 두 가지만 잘 가지고 있다면 불황을 헤쳐 나가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뮤지컬 제작자 설도윤 인생 최대의 역작은 ‘오페라의 유령’이다. 확실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는 세계 최고의 뮤지컬 제작사인 RUG(Really Useful Group)와의 탄탄한 파트너십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오페라의 유령’은 RUG의 대표작이었으며 설 대표는 이 공연의 라이선스를 따내기 위해 삼고초려했다. 당시가 외환위기 때였으니, 외국 제작사의 눈에 한국 공연 시장이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호주 대표가 ‘한국이 외환위기인데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자꾸 던지더군요. 저는 이 상황이 분명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 말했어요. 그러자 또 ‘한국에는 마켓 형성이 안 됐을 텐데?’라고 질문하더군요. 당시 국내에선 금 모으기 운동이 한창이었고, 저는 그 점에 착안해 곧 극복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1년여를 따라다니며 매달린 끝에 역사적인 라이선스를 얻게 됐죠. 그리곤 센세이셔널한 매출, 160억 원의 대박이 났죠.”물론 뮤지컬은 공연 예술이며 금전적으로 큰 이득을 봤다고 무조건 성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오페라의 유령’은 국내 뮤지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작품성도 지니고 있었기에 설 대표 성공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올 하반기에 다시 한 번 ‘오페라의 유령’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고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와 마케팅도 철저하게 기획 중입니다.”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사람(Really Useful Man)이다. 그가 운명적인 관계를 맺은 뮤지컬 회사 RUC처럼. 그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연기도 하며, 제작도 한다. 만능이다. 그가 뮤지컬 전문 프로듀서 1세대로 오랜 시간 한길을 걸어왔지만 뮤지컬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배우로서였다.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 영남대 음대에 진학했는데, 연극반 활동을 하느라 성악은 뒷전이었다. 그러다 1981년부터 배우로 무대에 서면서 뮤지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노래와 연기는 자신 있었지만 춤이 문제였다.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이화여대 육완순 교수에게 달려갔다. 밤에는 벽에 공연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고 새벽에 학교 담을 넘어 들어가 뼈가 으스러지도록 연습에 매달렸다. 피나는 노력 끝에 6년 만에 대한민국무용제에서 상을 받을 만큼 기량을 닦았고, 이를 바탕으로 배우에서 안무가의 길로 접어들었다.1985년부터 1990년까지 공연된 모든 뮤지컬의 안무를 그가 도맡다시피 했다.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피날레 장면도 그가 안무했다. KBS 상임안무가, SBS 예술단장을 맡아 각종 쇼프로그램에서 직업 안무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다 문득 지겨워졌다.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일었다. 뮤지컬 ‘가스펠’, ‘재즈’ 등을 만든 경험을 살려 프로듀서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했다.“1992년에 KBS홀 개관 기념으로 프랑스 뮤지컬 ‘재즈’를 제작했죠. 방배동에 있는 1억8000만 원짜리 집을 팔아 몽땅 쏟아 부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죠. 표 팔아 들어온 돈이 닥닥 긁어 1800만 원. 집 한 채 날린 거죠. 아주 비싼 수업료를 낸 셈입니다. ”이후 1995년 ‘사랑은 비를 타고’는 그가 본격적인 뮤지컬 프로듀서로 나서면서 처음 만든 작품이다. 퇴직금을 몽땅 털어 넣은 것도 모자라 신용카드로 대관비를 내 가며 어렵게 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개인이 하기엔 너무 힘든 사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영상 사업에 관심을 보이던 삼성을 설득해 2억 원을 투자받아 두 번째 작품 ‘쇼코메디’를 만들었다.탄탄대로처럼 보이던 그의 앞길도 외환위기의 늪에 발목을 잡혔다. 1998년 뮤지컬 ‘그리스’의 부진과 서울뮤지컬아카데미 등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사업이 자금난으로 휘청거리면서 파산 위기에 몰렸다. 집을 압류당하고, 채무자의 독촉에 시달리는 최악의 상황이었다.2000년 ‘브로드웨이 42번가’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면서 동시에 비밀리에 핵폭탄을 준비했다. 바로 한국판 ‘오페라의 유령’. 그리고 만족스러운 흥행, 훌륭한 작품성으로 한국 뮤지컬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쉽게 된 게 아니다. 기가 막힌 스토리가 있다.“쫄딱 망했던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투자금이 필요했는데 외환위기 직후인지라 어느 누구도 투자자로 나서지 않았죠. 힘이 빠져 거리를 타박타박 걷고 있는데 세단 한 대가 제 앞에 딱 서더군요. 평소 저에게 밥도 사 주고 후원해 주던 투자 회사 회장님이셨어요. 그분에게 투자 좀 해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선뜻 계좌로 3억 원을 넣어주시더군요. 제가 이 사업에 보였던 열정에 확신을 느끼신 거겠죠. 그 돈으로 일어나, 나중엔 그 회장님께 원금은 물론 이익 분배금까지 드렸습니다. 저는 요즘도 투자자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어요. 저를 믿고 투자해 주는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죠.”그는 인터뷰 내내 과거를 회상하기보다는 미래를 말하는 데 집중했다. 그가 말하는 계획을 듣고 있으면 지금이 불황인지, 호황인지 헛갈릴 정도다. 남들이 불황이라고 몸을 최대한 낮추고 움츠리고 있을 때 그는 더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다.“뮤지컬 ‘캣츠’가 8개월간의 공연을 마치고 200억 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이제 시작이죠. 2년 만에 30만 명의 관객이 든 ‘아이 러브 유’를 3월부터 오픈 런으로 다시 시작하고, 7월부터 ‘브로드웨이 42번가’를 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립니다. 9월부터는 ‘오페라의 유령’을 4년 만에 다시 올릴 예정입니다. 또 엠넷미디어와 함께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을 100억 원 규모로 제작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YG 엔터테인먼트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빅뱅이 참여하는 뮤지컬을 기획하고 있어요. 말하고 보니 할 일이 너무 많네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요.”경기가 나빠지면 사람들이 문화비부터 줄인다던데. 걱정이 된 기자는 이렇게 일을 벌여도 괜찮을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소비 위축으로 공연을 많이 보는 중산층이 무너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 수준이 많이 높아져서 사람들이 어찌됐든 공연은 보러 옵니다. 저는 공연은 하되 관객층을 극과 극으로 양분했죠. ‘아이러브유’와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이전보다 티켓 값을 더욱 저렴하게 해서 서민층 부담을 최소화하고, ‘오페라의 유령’은 최상층을 겨냥해 더욱 고급화할 겁니다. 이번 ‘오페라의 유령’은 목표 매출을 350억 원으로 잡았죠. 자신 있어요.”예술가적 감각과 최고경영자(CEO)의 자질을 두루 갖춘 설 대표는 ‘예술교육지원센터’를 통해 소외 계층에도 관심을 기울일 계획이다. 또한 ‘오페라의 유령’을 위해 직접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호암아트홀의 운영권을 인수해 뮤지컬 전용극장으로 만들기 위해 협상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 문화계의 ‘돈키호테’인 그는 진정한 욕심쟁이다. 그의 욕심만큼, 한국 공연계의 발전도 함께 커가길 기대해 본다.뮤지컬계의 미다스설도윤 1959년 경북 포항 출생 1988년 올림픽 개회식 한마당 안무 1995년 서울 뮤지컬컴퍼니 설립 2000년 제미로 공동대표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제작 2002년 설앤컴퍼니 대표,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보엠’ 프로듀서 국내 최초 데뷔 2003년 뮤지컬 ‘캐츠’ 내한 공연 프로듀서 2006년 한국 뮤지컬 대상 프로듀서상 2007년 공연예술아카데미 이사장 제작 작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브로드웨이 42번가’, ‘사랑은 비를 타고’, ‘오페라의 유령’, ‘캣츠’, ‘미녀와 야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에비타’, ‘아이 러브 유’ 등 다수.글 김지연·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