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퍼컴퓨터는 연산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순서로 500위까지 드는 컴퓨터를 말한다. 국제슈퍼컴퓨터학회(ISC)가 매년 6월과 11월 세계의 모든 슈퍼컴퓨터를 성능에 따라 500위까지 등수를 매긴다.
슈퍼컴퓨터는 기상과 재난 예보는 물론 인공지능(AI), 우주, 로봇, 바이오와 신약, 신소재, 양자역학, 핵융합과 핵분열 제어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분야들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필수 아이템이다. 예를 들어 신약 개발의 경우 단백질을 구성하는 수십만 개 분자 행동을 일일이 파악해야 하는데 분자 움직임을 예측하는 물리학 공식을 슈퍼컴퓨터로 계산하면 경우의 수를 미리 알아내 치매, 파킨슨병 등 퇴행성 뇌질환부터 당뇨, 암에 이르는 각종 질병에 대한 원자 수준의 치료법을 찾아낼 수 있다.
특히 슈퍼컴퓨터는 핵폭탄과 극초음속 미사일을 비롯해 각종 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 목적으로도 활용돼 왔다. 말 그대로 슈퍼컴퓨터는 한 국가의 과학과 기술력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퍼컴퓨터는 그동안 미국이 전 세계를 선도해 왔다. 실제로 세계 최초의 슈퍼컴퓨터는 1976년 미국의 시모어 크레이가 만든 ‘크레이(Cray) 1’이었다. 이후 미국은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하지만 중국이 21세기 들어 슈퍼컴퓨터 제작 기술을 급속히 발전시키면서 미국에 도전장을 던졌다.
중국은 2010년 2.5페타플롭스의 성능을 보인 ‘톈허(天河) 1’이라는 세계 최고의 슈퍼컴퓨터를 만들었다. 1페타플롭스는 초당 1000조 번의 연산 속도를 말한다. 이후 중국은 일본과 미국의 슈퍼컴퓨터에 1위를 빼앗겼지만, 2013년부터 2017년까지 ‘텐허 2’와 ‘선웨이 타이후즈광(神威 太湖之光)’으로 세계 슈퍼컴퓨터 1위를 차지했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IBM, 엔비디아, 인텔, 크레이, AMD 등 주요 컴퓨터와 반도체 업체에 막대한 자금과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세계 1위 타이틀을 되찾아왔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오크리지 국립연구소가 보유한 IBM의 ‘서밋(summit)’이 2018년과 2019년 연속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가운데 일본도 미국과 중국에 뒤질세라 슈퍼컴퓨터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 국립 이화학연구소와 전자 업체 후지쓰가 공동으로 개발한 슈퍼컴퓨터 ‘후가쿠(富岳)’가 2020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의 슈퍼컴퓨터가 1위를 한 것은 2011년 ‘게이(京)’가 1위를 기록한 지 9년 만이다. 하지만 일본의 영광이 그리 오래가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중국이 엑사급(초당 100경 번)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주목할 점은 슈퍼컴퓨터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는 중국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226대, 미국은 114대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의 슈퍼컴 보유 대수는 크게 떨어진다. 일본이 30대로 3위, 프랑스가 18대로 4위. 독일은 16대로 5위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한국은 3대만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세계 10대 슈퍼컴퓨터 중 각각 4대와 2대를 갖고 있다. 중국이 보유한 2대의 슈퍼컴퓨터는 우시 국립슈퍼컴퓨터센터의 ‘선웨이’와 광저우 국립슈퍼컴퓨터센터의 ‘톈허 2A’다. 중국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슈퍼컴퓨터를 1대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 2010년 이후 슈퍼컴퓨터 개발에 투자하면서 현재는 미국을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중국이 슈퍼컴퓨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슈퍼컴퓨터가 군사력, 경제력에 이은 제3의 국력이기 때문이다.
美, 中 슈퍼컴퓨터 관련 기업 7곳 제재
미국 정부가 중국의 슈퍼컴퓨터와 관련된 기업과 연구소들을 블랙리스트(수출통제목록)에 올렸다. 미국 상무부는 4월 8일 중국 인민해방군을 지원해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협을 초래하는 활동을 해온 중국의 슈퍼컴퓨터 기업과 정부 연구소 7곳에 제재 조치를 내린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정부가 자국의 첨단 기술을 획득하려는 중국의 시도를 차단하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재 대상을 구체적으로 보면 톈진 파이티움 정보기술, 상하이 고성능 집적회로 디자인센터, 선웨이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진안·선전·우시·정저우 국립슈퍼컴퓨터센터 등이다. 이번 조치에 따라 이들은 미국 정부의 사전허가 없이는 미국 기업과 거래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이들은 슈퍼컴퓨터 개발과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미국 반도체와 부품, 장비 등을 확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상무부는 “이들이 중국 인민해방군이 사용하는 슈퍼컴퓨터 제작과 군 현대화,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 등에 관여해 왔다”고 제재 이유를 밝혔다. 지나 러만도 미국 상무부 장관도 성명에서 “슈퍼컴퓨터 능력은 핵무기와 극초음속 무기 같은 현대 무기 및 국가 안보 시스템 개발에 필수적”이라며 “미국 상무부는 중국 정부가 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권한을 사용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가 이번 조치를 내린 결정적인 이유는 중국이 극초음속 미사일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2019년 10월 1일 국경절 열병식에서 극초음속 미사일인 둥펑(DF)-17을 처음 공개했다. 중국은 이어 1년 후인 2020년 10월 대만과 마주 보고 있는 푸젠성에 DF-17을 실전 배치했다.
DF-17의 사거리는 2500㎞로, 대만은 물론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및 괌과 주일 미군 기지 등을 타격할 수 있다. 특히 DF-17은 미국 해군 항공모함도 격침시킬 수 있다. 극초음속 미사일은 마하 5~10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에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해 미사일방어(MD) 체계를 뚫고 목표를 타격할 수 있는 ‘꿈의 신무기’라고 불린다.
워싱턴포스트(WP)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이번에 제재 조치를 내린 톈진 파이티움은 극초음속 미사일 연구·개발(R&D)에 쓰이는 중국 인민해방군 산하 중국공기동력연구개발센터(CARDC)의 슈퍼컴퓨터에 반도체 칩을 납품해 왔다. 이 업체는 2014년 톈진시 정부, 국영 중국전자정보산업그룹(CEC), 중국 인민해방군 국방과기대학(NUDT)이 합작으로 만든 벤처기업이다. 미국 민간 싱크탱크인 프로젝트 2049 연구소의 에릭 리 연구원은 “이 업체는 독립적인 민간 기업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임원들 대다수는 NUDT 출신인 전직 군장교들이다”라고 밝혔다. 이 업체는 그동안 미국 정부의 제재 대상에 포함된 적이 없었다.
특히 이 업체는 미국 반도체 설계 회사인 케이던스 디자인 시스템스(Cadence Design Systems)와 시놉시스(Synopsys)의 기술을 이용해 반도체 칩을 설계했다. 이 업체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반도체 제조업체인 대만의 TSMC에 칩 제조를 의뢰한 후 칩을 넘겨받았다. CARDC는 슈퍼컴퓨터를 통해 극초음속 미사일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면서 받는 열을 측정하는 시뮬레이션 실험 등을 실시해 왔다. CARDC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운영하는 군사기술연구소다.
미국 정부는 1999년부터 CARDC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등 자국의 첨단 기술이 중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통제해 왔다. 하지만 중국 정부와 기업들은 그동안 미국 정부가 내린 제재 조치의 구멍을 교묘하게 이용해 제재를 회피해 왔다. 파이티움의 경우 설계한 고성능 칩을 제작하기 위해 먼저 대만 반도체 기업 알칩의 문을 두드렸다. 알칩은 이 설계대로 칩을 생산할 수 있는 초미세 공정 시설을 갖춘 TSMC에 제작을 위탁했다. TSMC는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을 만드는 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지 모르고 이 칩을 제작했다. 미국 정부가 이번에 제재 조치를 내린 것은 앞으로 자국의 첨단 기술이 중국의 군사력 강화 등에 사용되지 않도록 제재의 틈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TSMC는 “앞으로 미국의 수출 통제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할 것”이라며 “미국 정부의 제재를 즉각 이행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번 조치는 바이든 정부가 전임 트럼프 정부의 대중 강경책 유산인 상무부의 블랙리스트 제재를 처음 가동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 정부는 화웨이(5G 통신장비), SMIC(반도체), DJI(드론) 등 중국의 첨단 기술 기업들을 상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미국 상무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기업과 개인은 2019년 12월 기준 239개에 달한다. 지금까지는 집적회로와 통신 분야가 가장 많았는데, 이제는 제재의 대상을 슈퍼컴퓨터로 확대한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 정부가 적극 추진하는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한 제재 조치를 더욱 강화할 것이 확실하다.
중국 정부는 바이든 정부가 안보 위협을 명분으로 내세워 자국의 첨단 기술 분야 제재에 나선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은 중국의 첨단 기술 기업을 짓누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재에 나서고 있다”면서 “미국의 제재 조치가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막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국제사회에선 이번 조치로 중국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국제 슈퍼컴퓨터 전문가들은 대부분 미국 정부가 자국의 기술과 소프트웨어가 들어간 제품을 화웨이에 공급하지 못하게 하자 화웨이가 당장 힘을 못 쓰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번 제재가 중국에 피해를 줄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은 미국의 공세에 맞서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국가의 미래가 과학기술 혁신에 달려 있다”면서 ‘기술자립’을 강조했다. 중국 정부는 3월 4일부터 일주일간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에서 ‘기술자립’을 위해 총력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호주 싱크탱크인 전략정책연구소의 맬컴 데이비스 선임연구원은 “중국은 이미 많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대등해지거나 능가하고 있다”며 “중국의 기술자립 전략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글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 사진 한국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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