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번아웃 증후군’이 일상이 된 한국 일꾼들에게 달콤한 꿀잠은 보약과도 같다. 베개는 잠의 질을 높여주는 결정적 도구다. 일꾼의 물건에서 베개가 빠질 수 없는 이유다. 가장 불행했던 시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답할 수 있다. 2년 전, 잠을 잘 수 없었던 그 시간들. 작은 회사의 임원이 돼 직원들의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잠이 오질 않았다. 눈이 무거워서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았지만, 침대 안에만 들어가면 정신이 살아났다. 그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은 밤새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됐다. 새벽에 겨우 눈을 감으면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잠에 들지 못하는 걱정을 하느라 잠에 들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쌓이자 일상은 빠르게 무너졌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정신은 흐리멍텅했고 두통에 시달렸다. 일을 하려면 정신을 차려야 하니 계속 자극을 줄 수 있는 커피와 간식거리를 달고 살았다. 한 달 만에 체중은 3kg이 늘고, 역류성 식도염 탓에 똑바로 누워 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돈 주고도 못 고치는 ‘지랄병’이었다. 두통 탓에 예민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에 일꾼들의 말과 행동을 다시 돌려보며 의미 부여를 했다. 상대방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점점 더 내가 불행해지는 쪽으로. 그래서 낮에 그를 만나면 동료 일꾼으로서의 내 태도는 엉망이 됐다.
“산다는 것은 앓는 것이다. 잠이 열여섯 시간마다 그 고통을 경감시켜준다.”
1700년대 유명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세바스찬 샹포르(Sebastien Chamfort)의 말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니 하루 24시간이 고통에 노출돼 있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면서 해가 떠 있는 동안 일꾼으로서의 생활은 엉망이 됐다.
나처럼 잠 때문에 고통받는 일꾼이 많은 듯하다. 얼마 전 한 취업 포털사이트가 일꾼 750명을 대상으로 ‘직장병 경험’을 조사했는데, 건강이 나빠졌다고 답한 일꾼의 16.7%는 “평소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고 답했다. 일꾼 10명 중 1명은 실제 불면증을 겪기도 했다니 일꾼들에게 불면증은 감기 같은 흔한 병인 건가 싶다. 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을 때 주변에서 비슷한 경험담을 건넨 일꾼들이 있었는데, 불면증부터 수면 무호흡증과 매일 꾸는 꿈 때문에 수면의 질이 나쁜 경우까지 증상도 참 여러 가지였다.
그중 한 명은 중견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는 일꾼C였다. 투자금이 사라지기 전까지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야 하는 그는 1년 넘게 하루 4시간을 채 못 자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가장 부러운 이가 와이프가 돈 잘 버는 사람도, 숱 많은 사람도 아닌 ‘잘 자는 사람’이 된 이후로 수면 아이템을 부지런히 사 모았다고. 수면 암막, 룸 스프레이, 수면 영양제, 수면 안대, 찜질기, 입욕제, 매트리스 등등. 이 중에서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효과를 줄 수 있는 아이템으로 꼽은 것은 ‘베개’였다.
회사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머리와 목을 긴장시키고, 이 긴장이 일꾼들의 잠 못 드는 밤을 만든다고 했다.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 머리와 어깨의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아이템이 필요한데, 이 두 부위가 직접적으로 맞닿는 물건이 바로 베개였다. 베개를 바꾸고 난 이후 실제 잠 드는 시간이 더 빨라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베개의 세상에 뛰어들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처음 바라본 베개의 세상은 버라이어티했다. 인터넷에 ‘베개’만 검색해도 솔깃한 상품들이 쏟아졌다. 마약베개, 경추베개, 꿀잠베개, 숙면베개, 기절베개, 찹쌀떡베개, 무중력베개, 거북목베개, 아늑베개, 호텔식 베개 등 상품명만 들으면 당장 장바구니에 담고 싶어지는 베개들이 한 무더기씩 나왔다. 브랜드도 다양했다.
의사가 개발했다는 어떤 스타트업의 제품부터 한샘, 이브자리, 에이스 등 국내 브랜드와 시몬스, 템퍼 등 해외 브랜드까지. 가격도 1만 원대부터 20만 원대 후반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인터넷으로 베개를 고르다간 밤에 고민거리가 더 늘어날 것 같아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수면 아이템에 진심인 몇몇 일꾼들에게서 추천을 받고, 처음으로 구입한 건 메모리폼 베개였다. 베는 사람의 무게와 온도에 따라 반응해 내게 꼭 맞는 베개가 된다는 설명서까지 읽고 10만 원대의 브랜드 제품을 집으로 배송시켰다. 그런데 뒤척임이 잦아서인지 메모리폼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몸 상태가 안 좋은 날에는 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로 추천받은 시장표 솜베개는 내가 원하는 목 높이에 맞춰 솜을 넣을 수 있었지만, 솜이 목을 받쳐주지 못해 또 장롱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베개 여정에서 연달아 실패한 후 깨달은 것은 내게 맞는 베개는 따로 있다는 거다. 이름이 알려진 브랜드라고 편한 것도 아니었고, 비싸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선택할 베개의 조건을 결정하고 직접 베어본 후 구입하는 게 돌고 돌아 찾은 최적의 경로였다.
머리와 어깨의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높이와 뒤척였을 때 흐트러지지 않는 모양, 양 볼에 닿았을 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소재. 이 삼박자가 맞는 물건을 찾기 위해 쇼핑몰과 백화점을 한 바퀴씩 돌아서 찾은 베개는 12만 원짜리 템퍼 오리지널이었다. 목과 어깨의 곡선을 지지해주는 디자인이 특징인 상품인데, 목을 베는 아래쪽은 높이가 높고 머리가 향하는 위쪽은 낮다. 이 베개의 첫 느낌은 ‘불편하다’였다. 매장에서 테스트해본 후 다른 베개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킬 참이었는데, 빠르게 표정 변화를 읽은 매장 직원이 어깨를 꾸욱 눌렀다. “위아래를 뒤집어서 사용하는 고객도 많으니 다시 한 번 누워보라”는 직원의 권유 덕분에 베개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후 2년의 시간이 흘렀고 더 이상 밤이 두렵지는 않다. 그 사이 베개를 바꾸고 이사를 하고 직장을 옮겼다. 내게 일어난 변화가 베개뿐만은 아니기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짚긴 어렵지만 어쨌든 베개는 수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베개의 활약은 여행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집에서는 편하게 잠을 자게 됐지만, 잠자리가 바뀌면 여전히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힐링하겠다며 간 여행지에서 퀭한 눈으로 돌아오면 다음 날 회사에서의 고통은 배가 됐다. 몇 번 같은 경험을 한 후 캐리어에 베개를 넣고 다니는데, 내 베개를 베면 집에서처럼 편하게 잠이 들었다. 일상에서 ‘밥 먹었어’만큼 자주 듣는 안부인사가 ‘잘 잤어’인 것처럼, 잠은 잘 지내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닌가 싶다. 일꾼의 목표가 잘 사는 일이라면 일꾼들의 숙면을 응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고대 그리스 시인인 호메로스는 잠에 대해 ‘눈꺼풀을 덮어 선한 것, 악한 것,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처럼 잠은 우리가 겪은 일을 잊게 해주는 시간이고, 망각을 통해 내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시간이다. 그래서 오늘 일의 고됨을 감내했고, 내일의 사는 일에 또 뛰어들어야 하는 일꾼에게 잠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에너지다. 이렇게 보면 베개는 단순한 침실용품이 아닌, 일꾼의 물건으로써 그 쓰임새가 더 명확해진다. 오늘도 고생한 일꾼은 그래서 좋은 베개를 벨 권리가 있다.
글 일꾼B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