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오용길

보통 자연풍경을 그린 그림을 산수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의 산수화는 자연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지닌 자연관까지 반영된다. 흔히 상상 속의 풍경을 배경으로 주로 그렸던 조선시대 전기의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 후기의 실경산수화(혹은 진경산수화)로 구분된다. 오용길 작가의 그림을 굳이 구분하자면 후자의 경우를 현대화시킨 것이다.
우선 작품 <봄의 기운-둘레길>(2020년)을 보자. 사방이 연초록의 꽃들로 화사하지만, 근경(近景)과 중경(中景)에 빈 나뭇가지가 많은 걸 보니 아직은 이른 봄 풍경이다. 화면 중심의 낮은 계곡엔 진달래며 개나리, 산벗나무, 산수유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작은 무릉도원을 이뤘다. 오른쪽 하단의 엇비친 산길은 큰 폭의 에스(S)자로 완만하게 산등을 넘고 있다. 저 너머 연한 하늘빛과 이파리의 선명한 빛을 보니 아직은 이른 아침인가 보다. 사이사이 짝을 이룬 등산객 모습이 더없이 반가운 어느 뒷산 둘레길 아침 정경이다.



봄이 되면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왠지 모를 새로운 희망도 솟는다. 아마도 화사한 봄기운의 선물일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삼삼오오 가벼운 여행길에 오른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봄맞이 여행의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꼭 산이나 계곡이 아니어도 좋다. 작품 <테라스에서 본 풍경>처럼 그저 시원한 나무그늘에 서 있기만 해도 더없이 큰 휴식이고 힐링이다. 오 작가만큼 놓치기 쉬운 일상 풍경에서 이처럼 정겹고 따뜻한 장면을 포착하는 예도 드물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가슴속에 만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넘쳐 나와 글과 그림이 된다”고 했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숨 쉬고 살아가는 일상에 잠들어 있다. 오 작가의 그림도 바로 그 삶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볼수록 생동감이 넘친다. 굳이 설명하거나 꾸며대지 않아도, 보고 있으면 정감 어린 친숙함이 묻어난다. 그 친근한 일상에서 ‘삶의 진리’를 만날 수 있도록 유도해준다. 고요한 일상 속 평화로움, 그의 그림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담백한 선물이다.
왜 자연인가. 오용길은 국내 최고의 수묵담채 화가다. 이미 27세였던 1973년 국전(國展)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받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서 전통적 개념의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오 작가의 작품 세계는 월전미술상, 의재 허백련 예술상, 이당미술상, 동아미술상 등을 수상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그런 그가 궁극적으로 선택한 소재는 자연이다. 그것도 특별한 비경(秘境)이나 웅장한 절경(絶景)이 아니다. 늘 주변에 있어 왔던 평범한 자연이다. 그는 일상의 풍경에서 어떤 에너지를 발견한 것일까.


현대식 진경산수의 새로운 전형
화가의 철학은 그림이 말해준다. 평소 “무엇보다 그림은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소신을 밝혀온 오 작가는 ‘21세기판 겸재’로도 불린다. 그의 화풍은 “진경산수화 대가인 겸재 정선의 맥을 잇는다”는 평가다. 한국화의 전통을 지키며 실제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오 작가의 작품은 빼어난 비경과 절경만이 아닌, 우리 주변의 풍경이나 늘 보는 일상 속 자연의 모습을 담아낸 산수화여서 더 특별하다. 최근엔 고향인 안양의 일상 풍경을 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안양예술공원’ 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다양한 계절과 시점에서 평소 익숙했던 공원의 모습을 재해석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를 종이에 붓과 먹, 그리고 간단한 채색만으로 단박에 채집해낸 ‘오용길식 리얼리티’, 작품에 담긴 실경산수는 ‘현대식 진경산수의 새로운 전형’을 잘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넘어 그 풍경이 지닌 진짜배기의 숨은 가치까지 이끌어낼 줄 아는 탁월한 기교가 돋보인다. 어쩌면 거울 속의 그림자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것처럼, 오용길의 자연풍경은 우리 마음속에서 잠들었던 풍경까지 깨워준다.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잠경산수(潛景山水)’로서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 직전의 마티스는 그림 수첩 한쪽에 “예술이 뭐 그리 대단한가. 인간에게 하나의 진정제가 되면 되는 것을…”이라고 적었다. 오용길의 자연이 더없이 정겨운 이유 역시 삶의 진정제나 평범한 가을 들녘의 들국화 같은 존재와 같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한 가치를 발견한 그의 안목과 심미안이 고스란히 작품에 녹아들었다. 지극히 전통의 제작 기법에만 의존한 그림임에도 결코 ‘촌스럽지 않다’는 점이 매력이다. 오히려 ‘의외의 참신함’마저 느껴진다. 온갖 현란한 기교의 현대미술에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오용길 그림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자 힘이다.
![[Artist] 담백한 일상의 자연, 21세기판 ‘진경산수’](https://img.hankyung.com/photo/202105/01.26501846.1.jpg)
오용길 작가는…
1946년생. 서울대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그동안 선화랑, 월전미술관, 동산방화랑, 안양 알바로시자홀, 겸재정선미술관 등에서 25회의 개인전과 MANIF 외 여러 차례의 아트페어 부스초대전을 가졌다. 20대 중반이던 1973년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시작으로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 특별상(1976년), 동아일보사 주최 동아미술상(1978년), 제1회 선미술상(1984년), 제1회 월전미술상(1991년), 경기도문화상(1992년), 제1회 의재 허백련 예술상(1995년), 제1회 이당미술상(1997년), MANIF 대상(2011년) 등을 수상했다. 오 작가의 그림은 청와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호암미술관, 사법연수원, 이화여대박물관, 한양대박물관, 외교통상부, 주미 워싱턴대사관, 주헝가리대사관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현재는 이화여대 명예교수, 후소회 회장, 성묵회 회원, 안양미술협회 고문 등으로 활동 중이다.
글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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