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식 하나은행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장 인터뷰

10여 년 전 신탁 불모지에 가까웠던 우리나라에서 신탁 대중화에 뛰어든 사람이 있다. 바로 배정식 하나은행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신탁을 알리는 일이 설레고, 신탁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그리고 싶다는 그의 ‘찐’ 신탁사랑 이야기를 들어봤다.
[special]"신탁은 적극적인 인생 설계...고객 소통 중요"
‘진심인 편.’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정말 좋아한다는 표현을 더욱 강조하고 싶을 때 ‘~에 진심이다’라고 직설하기보다 ‘~에 진심인 편’이라고 돌려 말하는 게 유행이다. 배정식 하나은행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신탁에 정말 진심인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신탁 뉴스를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그의 이름을 목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세미나, 연구회, 포럼 등 신탁 관련 행사에 그는 우선순위로 초대되는 인기 강연자이기도 하다. 또한 언론사 기고 활동 저서 집필, 출장 및 교육, 그리고 실제 신탁 상담 및 계약 업무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일이 설레고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말한다.

배 센터장과 하나은행은 신탁 부문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해 왔다. ‘신탁법’ 개정 이전인 2010년 ‘하나 리빙트러스트(Living Trust)’라는 브랜드를 론칭(현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하고 국내 처음으로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한 바 있다. 이후 2012년 치매 초기 단계인 고객을 위해 최초로 내놓은 치매안심신탁, 2014년 장애인과 미성년자를 위해 최초로 출시한 케어트러스트(Care Trust)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도 여러 기관들과 협력해 ‘입소자들을 위한 지킴이 신탁’, ‘범죄 피해자 구조금 후견 신탁’ 등을 론칭하는 등 10년간 국내 신탁 발전과 제도 개선에 일조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노력 끝에 배 센터장이 이끄는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는 국내 유일 신탁 기반 통합자산관리 플랫폼으로 성장했고, 전문 인력, 계약·상속 집행 건수 모두 국내 최대 규모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수년째 자산관리 외에도 상속·증여 등 계약에 따라 무한대로 변신이 가능한 신탁이 100세 시대에 ‘유용한’ 안전망으로 지목돼 왔지만 국내 신탁 시장은 아직 각종 규제와 업계 간 이해관계로 온전히 날갯짓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웰다잉(well-dying)’ 열풍을 타고 활성화된 바 있는 유언대용신탁부터 치매신탁, 반려동물신탁까지 은퇴 및 노후를 대비한 다양한 신탁 상품이 줄을 잇고 있다. 배 센터장은 “신탁이 자산관리의 수단을 뛰어넘는 ‘사회안전망’으로 폭넓게 활용되길 바란다”며 신탁의 필요성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2010년 하나은행이 금융권 최초로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출시한 이후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여전히 센터장님에게 신탁은 가슴 떨리는 일인가요.
“지금도 설레면 안 되는데(웃음) 할 일이 아직 많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 신탁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신탁이 부자들의 자산관리뿐만 아니라 장애인, 미성년자 관리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막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종의 신념도 생긴 거 같아요. 그래서인지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이 일이 설레고, 재밌습니다.”

지난해 7월에는 하나 리빙트러스트 센터를 확대 개편한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가 출범됐어요.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죠. 우선, 저희가 2010년 처음 신탁업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금융권) 시장참여자가 하나은행뿐이어요. 그런데 그 사이 고령화에 따른 신탁의 필요성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면서 이제는 신탁이 금융기관의 중요한 명제가 됐고, 시장 전체가 움직이고 있죠. 고객들의 변화도 확실히 느껴요. 과거에는 신탁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고객들의 기우가 컸어요. 가령, 질문하시는 내용도 ‘혹시라도 신탁 소유권이 은행에 넘어갔는데 은행이 망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라고 묻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신탁법’ 제23조(신탁재산은 수탁자와 상속재산에 속하지 않는다)에서도 신탁 회사의 고유 재산과는 별개로 독립된 재산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초기에 한 고객님은 비슷한 걱정을 하시면서 계약하기까지 3년 8개월이 걸린 일도 있어요. ‘당신이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알겠는데, 은행권은 도통 못 믿겠다’면서 말이죠.(웃음) 그런데 요즘은 달라요. 대부분 신탁제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질문도 굉장히 다양하고, 구체적이에요. 공급자와 수요자 양측 모두 상당한 변화가 이뤄진 셈이죠. 보태어 예전에는 신탁 금전 관련, 부동산이나 구조 설계 위주로 논의가 됐다면 지금은 그것뿐만 아니라 콘텐츠, 즉 그 자산을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답니다.”

큰 변화가 있었네요. 2013년 한 인터뷰에서 신탁에 참여하시는 분들을 ‘얼리어답터’라고 표현하셨던데, 지금은 다르겠어요.
“그렇습니다. 아직 국내 신탁이 완전히 우리 생활에 뿌리내리진 못했지만 이제는 ‘얼리어답터’라는 표현(과정)은 조금 지난 것 같아요. ‘액티브 라이프 플래너(active life planner: 적극적인 인생 설계자)’라는 표현이 어떨까 싶어요. 실제로 고객들 상당수가 비교적 안정적인 미래를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요. 지금은 그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네요.”
[special]"신탁은 적극적인 인생 설계...고객 소통 중요"
[(왼쪽부터)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 류미주 차장·윤병훈 차장, 박현정 팀장·조현주 차장·배정식 센터장, 영업1부PB센터 이제환 Gold PB부장,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 송은정 차장, 영업1부PB센터 권성정 Gold PB부장,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 최연희 차장·조기환 세무사, 영업1부PB센터 김영호 지점장.]

지난 11년간 출시한 상품들의 흐름을 보면 우리 사회 시대상이 묻어나요. 상품을 구상하실 때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으시나요.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아이디어를 얻어요. 첫 번째는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다양한 니즈들을 발견하게 되죠. 예를 들면, 현재 저희가 공급할 수 있는 상품이 서너 가지라고 하면 실제 고객들의 니즈는 10개가 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아,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여전히 부족하구나’ 싶죠. 그런 격차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주 얻고, 그걸 토대로 그 니즈가 실효성이 있는지,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직원들과 논의해서 타진하죠. 또 다른 방법은 비정기적이지만 종종 회사 내부 채널을 통해 직원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교류하기도 한답니다.”

예전부터 말씀하신 대로 신탁이 실생활, 복지형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분명 있어 보입니다. 실상은 어떤가요.
“제가 바라는 신탁의 방향성과 실상은 간극이 좀 있죠. 10여 년 전 한 발달장애인 아버님이 제게 장애인신탁제도에 대해 문의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관련 공부를 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신탁제도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고, 그걸 통해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됐죠. 그러나 아직 장애인신탁 같은 경우는 가야 할 길이 굉장히 멀어요. 그래서 관련 업무를 추진하는 장애인부모협의체 분들과도 종종 미팅을 갖는데 그분 역시 장애인신탁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그걸 금융권에 맡기기엔 너무 영리성을 띠는 건 아닌지 고민하시죠. 어쨌든 공공 영역에서 복지 형태의 신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시는 거죠. 각자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합리적인 절충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또 다른 면에선 저희가 치매노인에 대한 사회적 화두를 많이 언급했는데, 그 부분에서는 의미 있는 접근이 이뤄진 것 같아요. 그리고 요즘 이혼, 재혼 가정이 늘어나면서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문의도 굉장히 많아졌어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신탁이 생활형 복지의 수단으로 분명 떠오르고 있지만, 아직은 그 역할을 오롯이 수행하기엔 사회적 인식과 제도 변화가 필요해 보여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치매 문제를 예로 설명해볼게요. 금융위 등 공공기관에서 정책적으로 고령화사회에 치매노인의 자금 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적잖이 나오고 있어요. 치매를 미리 대비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적·사회적 비용이 크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신탁 등 자금 관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금 혜택과 같은 실질적인 동기부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가령, 고령자들의 평균적인 생활수준에 맞춰서 자금 관리를 준비한다고 할 때, 운영자금에 대해서 일정 부분 비과세를 해주거나 일부는 상속세 공제 항목을 추가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나날이 고령자들이 보유한 재산의 규모가 커지고 있어요. 이 자산이 다음 세대에 흘러갈 수 있도록 일본처럼 손주에게 자산의 일정 부분을 양육비로 지원하면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고요.

기업 승계 측면에서도 개선해야 할 게 많아요. 개인 재산뿐만 아니라 나날이 기업의 가치가 커지고 있죠. 그래서 그것을 온전히 승계시켜야 한다는 말들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실제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특례제도가 잘 활용되지 못하고 있죠.
만약 신탁이 이 분야에 기여를 한다면 개선돼야 할 제도들이 많아요. 가령,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가업상속공제를 받기 위해서는 ‘피상속인이 해당 기업 주식의 50%(상장주식의 경우 30%) 이상을 10년 이상 보유’해야 하는데, 신탁재산에 포함된 주식도 ‘50%(상장주식 30%) 이상 보유’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여부가 아직 명확하지 않아요. 주식을 신탁재산으로 하는 유언대용신탁을 가업승계의 방안으로 삼기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다는 거죠. 따라서 유언 목적으로 신탁을 할 경우는 가업상속공제 요건을 위배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해석과 법제화가 필요해 보입니다.”
[special]"신탁은 적극적인 인생 설계...고객 소통 중요"
[“신탁 분야의 넘버원을 꿈꿔요.”
<신탁의 시대가 온다>의 공동 저자인 배정식 센터장과 박현정 팀장(왼쪽).]

신탁 업무에서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고객과의 소통만큼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인드와 역량, 경험이 정말 중요해요. 우스갯소리로 ‘오지랖’도 좀 많아야 하고요. 상담을 하다 보면 복합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그러려면 일단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기본적으로 대화를 할 수가 있죠. 그리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아, 내가 저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까’라고 접근하고, 결합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문제 해결에 시너지가 나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금융권의 비대면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어요. 신탁의 로보어드바이저도 가능할까요.
“신탁의 전 과정에서 로보어드바이저가 이뤄지기엔 아직은 한계가 있죠. 다만, 관련 서비스들이 더 다양해지고, 확대될 거라고는 생각합니다. 일례로 저희가 지난해 10월부터 비대면 상담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한 달에 7~8건 접수됐던 것이 올해 3월 기준 25건으로 3배로 뛰었어요. 그만큼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 일이 많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데이터를 꾸준히 쌓고, 가공해서 상담 모형이나 알고리즘도 한 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걸 통해 사람들이 꼭 영업점에 방문하지 않아도 자신의 고민을 쉽게 추정해볼 수 있는 툴을 제공한다면 유익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목표와 꿈이 있다면요.
“저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을 쉽게 찾고, 해결해볼 수 있도록 지식 정보 프로세스들을 잘 정비해서 공유하는 게 목표예요. 그게 비즈니스로도 잘 연결됐으면 좋겠고요. 무엇보다 저는 단 한 번도 신탁이 은행의 먹거리라고 말한 적이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 만능 안전망으로서 신탁이 여러 외부 영역들과 협력해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그때까지 저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special]"신탁은 적극적인 인생 설계...고객 소통 중요"
[special]"신탁은 적극적인 인생 설계...고객 소통 중요"
[서울시 중구 위치한 하나은행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 내부 모습들.]


글 김수정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