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계절이 사치처럼 다가왔다. 그 많던 여행이 그저 추억이 돼 남겨진 지도 두 해,
그래도 우리에겐 제주도가 있어 다행이다.

글 사진 김민수 여행작가
가을, 다시 즐기는 제주 여행

가을 낙조의 감성 포인트 문도지오름
확실히 해가 짧아졌다. 문도지오름으로 다가가는 동안 제주의 서쪽 하늘은 이미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한경면 방림원 사잇길을 총총거리며 지나자 명성목장이 나타났다. 오름길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문도지오름은 명성목장의 말 방목지이며 대부분 사유지다. 다행히 소유주가 탐방을 제한하지 않아 통행이 자유롭다. 저지마을에서 오설록녹차밭까지 제주올레 14-1코스가 편안하게 이어지는 것 또한 그 덕분이다.
오름의 출입문에서 정상까지는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짧은 구간, 작은 봉우리 위에 가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문도지오름은 매끈한 능선을 가지고 있다. 방목된 조랑말들 때문이다. 유유히 풀을 뜯는 조랑말들은 사람과 마주쳐도 놀라 달아나는 일이 없다. 말굽과 같은 능선 둘레를 돌아 정상부에 서면 한라산 자락을 따라 산방산과 금악이오름, 그리고 신창풍차해안과 당산봉까지 이어지는 제주 서남권 지역이 드넓게 펼쳐진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는 일몰과 일출을 볼 수 있는 명소가 많다. 그중에서도 문도지오름은 설렘을 내려놓은 가을 제주의 정취를 가장 애틋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저지곶자왈 너머로 아스라이 저물어가는 하루해는 문도지오름의 감성 포인트다. 사실 낙조의 색이 절정을 이루는 때는 수평선 위로 해가 떨어지고 난 다음이다.
제주 하늘의 판타지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남짓, 출사를 나온 사진작가들과 웨딩 스냅사진 촬영을 나온 신랑, 신부들도 이 시간에 주목한다. 간혹 조랑말 한 마리가 카메오로 출연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 차량을 가지고 이동한다면 오설록 입구에서 방림원 사잇길을 10분간 달려 명성목장 부근에 주차하는 것이 좋다.

가을, 다시 즐기는 제주 여행

삼다수가 솟아나는 청정 삼다수숲길
삼다수숲은 “원시적 식생이 보존되고 생태가 건강해 산림 치유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라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 가을의 초입에서 삼다수숲을 다시 찾았다. 여전히 한낮은 더웠지만, 빼곡히 솟은 숲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자 금세 찬기가 느껴졌다.
이곳의 삼나무는 1970년대에 조림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무들은 높이 20~30m의 거목으로 성장했고 또 다른 식생들과 어우러져 빼곡한 숲을 이루게 됐다.
삼다수숲은 중산간의 해발 400m 지역에 형성돼 있다. 숲의 기반은 용암이 식어 형성된 땅이다. 제주의 ‘삼다수’ 생수는 이곳에서 난다. ‘화산암반수‘란 층층이 쌓여 있는 현무암이 빗물을 걸러 만들어진 깨끗한 물을 뜻한다.
2010년 삼다수를 생산하는 제주특별자치도 개발공사와 교래리 지역주민들은 숲 사이에 길을 내어 ‘삼다수숲길’이라 명명하고 총 연장 8.2km의 트레킹 코스를 개장했다.
숲길이 삼나무 밀집 지역을 통과하고 조릿대 지역으로 들어서면 천미천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위 구덩이마다 고인 물에는 나무도 있고 하늘도 있고 계절도 있다. 키 작은 조릿대가 군락을 이룬 사이마다 난대활엽수림의 몸통과 가지가 춤을 춘다.
일사불란한 삼나무 숲에 비하면 조릿대 지역은 형식이 없다. 오래전 이 지역은 말 방목지였다. 조릿대가 급속도로 번식하는 이유는 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삼다수숲길은 2010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천년의 숲 부문 어울림상을 수상했다.
※ 숲길에는 3개 코스가 있다. A코스(꽃길 1.2km), B코스(테우리길, 5.2km), C코스(사농바치길, 8.2km)로 꽃길은 봄과 여름, 테우리길은 겨울, 사농바치길은 삼다수숲길을 완주하는 코스로 가을에 걷기 좋다. 차량은 교래리종합복지회관 주차장이나 교래소공원에 주차하고 1km가량 걸어 들어가야 한다.

가을, 다시 즐기는 제주 여행

억새(게) 아름다운 가을 여왕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은 가시리가 자랑하는 가을 제주의 대표적 관광 스폿이다. 3개의 분화구(굼부리)와 이웃해 있고 6개의 봉우리가 하나의 산체를 이루는 특이한 구조로 돼 있다.
‘따라비’란 ‘땅할아버지’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변 오름들의 으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전해진다. 능선이 물 흐르듯 부드럽고 완만하며 가을이면 억새군락이 장관을 이뤄 사람들은 ‘오름의 여왕’이라 부른다. 따라비오름은 그 초입부터 남다르다.
가슴 높이로 자라난 노란 억새가 평원을 가득 메우고 그 사이를 따라 조붓한 오솔길이 하나 놓였다. 탐방객들은 오솔길에서 발걸음을 멈추거나 억새 숲 위로 얼굴을 빼곡히 내민 채 인증샷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정상부까지는 대략 30분, 계단을 따라 오르는 사이에 잠시 가려졌던 시야는 따라비 능선에 닿는 순간 경이로움에 다시 열린다. 따라비오름의 높이는 107m에 불과하지만, 해발은 3배가 높은 342m다.
큰사슴이오름(대록산)과 가시리 풍력발전단지가 시작된 시선이 표선 바다까지 흘러 꽂히는 까닭이다. 억새 바다는 때론 거친 파도가 되고 은은한 물결이 되기도 한다. 태양 빛이 구름을 뚫고 쏟아질 때는 그 바다에 윤슬도 생겨난다. 제주의 토종 억새는 10월에서 11월에 절정을 이룬다.
※ 갑마장길은 가시리 마을과 오름, 목장길 등 옛 목축지의 흔적을 따라 조성한 총 길이 약 20km의 도보 여행 코스다. 쫄븐(짧은)갑마장길은 그 길이를 반으로 축소해 놓았다. 돌담과 곶자왈을 지나고 숲길과 오름을 따라 가시리의 자연과 문화를 두루 살필 수 있는 편안한 걷기 길이다. 조랑말체험공원을 기점으로 가시천~따라비오름~잣성~국궁장~큰사슴이오름~유채꽃프라자∼꽃머체를 지나 원점으로 회귀하는 데 따라비오름을 탐방하고 일부 구간을 이어 걸어도 좋다.

가을, 다시 즐기는 제주 여행

제주에 딸린 섬 우도가 품은 비양도
제주에는 2개의 비양도가 있다. 하나는 협재 앞바다의 비양도요, 다른 하나는 우도 북동쪽에 딸린 작은 섬 비양도다.
우도 여행의 테마 중 하나는 섬 속의 섬 비양도에서의 캠핑이다. 비양도는 인위적인 시설 하나 없이 제주의 자연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는 천혜의 야영지다.
캠퍼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 3대 백패킹 성지로 손꼽힌다. 토지 소유주가 무상으로 땅을 내어놓고 마을에서 화장실과 제반 시설들을 관리하기 때문에 누구든 자유롭게 캠핑할 수 있다.
대형 배낭을 짊어지고 제주공항을 나서는 이들의 여정에는 십중팔구 비양도가 들어가 있을 정도다. 비양도는 본 섬과는 대략 120m 떨어져 있지만, 다리로 연결돼 있다.
‘섬 속의 섬이 품은 또 하나의 섬’이란 타이틀만으로도 비양도는 특별하다. 인파에 북적이던 비양도의 한적함은 저녁 무렵이 돼서야 찾아든다.
캠퍼들은 천연 잔디 위에 나와 앉아 비양도의 신비를 만끽한다. 비양도의 하늘과 바다는 유난히 푸르다. 저녁이 돼서도 그 푸르름은 한동안 사그라지지 않는다.
캠핑은 스스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며 자연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는 여행의 방법이다.
비양도는 그런 면에서 캠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최적의 장소다.
※ 우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렌터카를 가지고 입도할 수 없다. 우도에서 비양도를 가려면 천진동항이나 하우목동항에서 1시간에 2번 지나는 마을안길순환버스를 타야 한다.
※제주올레 1-1코스(우도올레)가 우도의 해안을 따라 놓여 있다. 일주도로와 코스가 겹쳐 다소 혼잡스럽지만, 우도의 명소들을 돌아볼 기회다.


새롭게 등장한 포토 스폿
1)보롬왓
보롬왓은 약 33만 ㎡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있는 규모의 꽃 농장으로 한울영농종합법인이 운영한다. 바람(보롬)이 부는 들판(왓)이라는 뜻의 보롬왓은 tvN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인플루언서 사이에서는 이미 사진 찍기 좋은 제주 명소로 소개되고 있다. 가을에는 빨강·노랑 맨드라미와 사루비아가 한창이다.


2)성읍녹차마을
표선면 성읍리에 있는 또 다른 명소다. 19만8347㎡ 규모의 녹차 밭을 한가로이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세계로 꺼져 든다. 녹차밭 아래로 숨겨진 땅에는 해가 들지 않는다. 그곳에는 입을 크게 벌린 신비한 동굴이 있다. 어찌 알았는지 이미 여행객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있다. 성읍녹차동굴로 불리는 이곳은 바깥 기온보다 섭씨 4~5도 낮고 습기가 많아 더욱 신비롭다.


김민수 여행작가는...
자칭 타칭 섬여행가, 캠핑여행가로 우리나라 200개 섬을 여행했다.
저서로는 <섬,이라니 좋잖아요>, <섬에서의 하룻밤>이 있다.
현재도 여전히 섬 여행 중이며 대한민국 100섬 가이드북을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