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수
매거진 <인디드> 편집장 남자의 시계가 회중시계였을 당시, 손목시계는 귀부인들을 위한 팔찌 대용일 뿐이었다. 남자들의 손목에 시계가 자리하게 된 배경엔 전쟁의 흔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회중시계로 시간을 읽는 건 일촉즉발의 전시에선 이상적인 형태일 수 없었다. 그 불편함을 단박에 해소시켜준 건, 손목만 돌리면 시간을 읽을 수 있는 손목시계였다. 1903년 보아 전쟁 시기, 회중시계에 가죽끈을 단 것이 손목시계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그렇게 100년이 훌쩍 넘은, 작은 손목시계 역사엔 남자들의 생사고락이 한껏 담겨 있다. 해군의 수중 임무에서 시계의 정확도는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도구로 인식됐고, 비행기 조종사를 위한 항공 시계라는 태생적 배경을 지닌 손목시계들은 조종사의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비행기 계기반이 고장 났을 때, 조종사의 안전을 확보하는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니까. 이런 역사적 배경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 보니, 외형뿐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배경에 생각이 머문다. 그래서 구매 결정이 단조롭지 않고, 시계를 구입한 후 애착이 더욱더 강해진다.
배경을 꼼꼼히 살피고, 시계 구입을 고민할 때, 다양한 시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금 여력이 무한하지 않으니, 합리적인 가격에 남다른 의미를 지닌 시계, 그리고 내가 현재 소유하지 않은 형태의 시계에 항상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나만의 선택 기준을 곧추세운 채 최근 내 시선을 사로잡은 시계는 오리스의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터 캘리버 403이다.
오리스의 이 시계를 꼽은 이유는 우선 1938년에 최초로 소개된 이후 특유의 디자인으로 존재감을 인정받은 시계이며, 80년 이상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스테디셀러이기 때문이다. 오리스는 쿼츠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기에도, 기계식 시계를 포기치 않았다. 잠시 잠깐 쿼츠 무브먼트를 탑재한 모델을 생산하긴 했지만, 이내 기계식 시계만을 생산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만큼 자체 기술력과 시계에 대한 진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그런 의미에서 1938년에 최초 등장한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터는 오리스의 상징적인 모델로서 대형 크라운과 문자반 둘레를 따라 배치돼 있는 날짜 눈금을 가리키는 중앙 바늘이 오리스 특유의 디자인으로 자리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모델이다. 이 모델에 적용된 무브먼트 캘리버 403은 오리스의 인하우스 고성능 자동 캘리버 400 시리즈 중 하나다. 캘리버 403은 2021년에 250세트로 한정 출시된 홀스테인 에디션 2021에서 처음 선보였지만, 컬렉션 시리즈를 위한 캘리버 중에 하나로 특별히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캘리버 400 시리즈에 속한 다른 모든 무브먼트와 마찬가지로 캘리버 403은 높은 수준의 항자성 기능, 무려 5일 동안의 파워리저브 기능, 그리고 10년의 보증기간을 특징으로 한다. 캘리버 403은 하루 오차 범위가 크로노미터 테스트를 쉬이 통과할 수 있는 정확도를 자랑한다.
이런 기능적인 특징뿐 아니라 외형 또한 호불호가 없을 듯하다. 항공 시계라는 특징상 비행기 조종사들이 입었던 플라이트 재킷과 같은 캐주얼 아이템들과 좋은 짝을 이룬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과거의 디자인을 복각한 수준의 클래식한 외양은 정중한 슈트와도 좋은 궁합을 자랑한다. 촬영을 위해 이 시계와 함께 블루종, 니트 카디건, 그리고 슈트와 함께 스타일링을 시도해봤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 한 치의 오차 없는 어울림을 완성해냈다. 그만큼 오리스의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터와 함께라면 스타일링에 대해 고민이 필요 없을 듯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계를 받아들고 조금은 걱정이 앞섰다. 내 손목이 굵은 편이라 지름 38mm 케이스의 시계를 선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내 손목에 작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직접 손목에 올려보니, 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른 38mm 시계와 달랐던 이유는 아무래도 두꺼운 장갑을 착용한 조종사가 손쉽게 시계를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한 큼지막한 용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용두의 압도적인 위용은 38mm의 시계를 내 굵은 손목 위에서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게 했다. 정말 이런 디자인을 브랜드의 아카이브로 간직하고 있다는 건 축복이자 행운이 아닐까 싶다. 아들이 둘 있다. 내 흔적이 담긴 무언가를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과거엔 만년필 같은 필기도구가 그런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니셜이 인그레이빙 돼 있는 유일무이한 필기구를 물려받는다면 남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게 분명할 테니까. 하지만 최근 필기구를 곁에 두고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시계는 다르다. 하루 종일 내 손목 위에 올려져 일상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오버홀 같은 관리만 잘 받는다면, 무한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오리스의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터를 보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시계를 물려준다면, 트렌드와 상관없이 내 자식들과 매일매일 함께하는 그런 동반자가 돼주지 않을까? 그리고 덤으로 가끔 나를 기억해주지 않을까? 그냥 아비 된 자의 작은 소망을 시계에 담아본 것이다. 이 시계에 그만큼 애착이 간다는 뜻으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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