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수
매거진 <인디드> 편집장

그렇게 100년이 훌쩍 넘은, 작은 손목시계 역사엔 남자들의 생사고락이 한껏 담겨 있다. 해군의 수중 임무에서 시계의 정확도는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도구로 인식됐고, 비행기 조종사를 위한 항공 시계라는 태생적 배경을 지닌 손목시계들은 조종사의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비행기 계기반이 고장 났을 때, 조종사의 안전을 확보하는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니까. 이런 역사적 배경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 보니, 외형뿐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배경에 생각이 머문다. 그래서 구매 결정이 단조롭지 않고, 시계를 구입한 후 애착이 더욱더 강해진다.
배경을 꼼꼼히 살피고, 시계 구입을 고민할 때, 다양한 시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금 여력이 무한하지 않으니, 합리적인 가격에 남다른 의미를 지닌 시계, 그리고 내가 현재 소유하지 않은 형태의 시계에 항상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나만의 선택 기준을 곧추세운 채 최근 내 시선을 사로잡은 시계는 오리스의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터 캘리버 403이다.
오리스의 이 시계를 꼽은 이유는 우선 1938년에 최초로 소개된 이후 특유의 디자인으로 존재감을 인정받은 시계이며, 80년 이상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스테디셀러이기 때문이다. 오리스는 쿼츠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기에도, 기계식 시계를 포기치 않았다. 잠시 잠깐 쿼츠 무브먼트를 탑재한 모델을 생산하긴 했지만, 이내 기계식 시계만을 생산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만큼 자체 기술력과 시계에 대한 진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그런 의미에서 1938년에 최초 등장한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터는 오리스의 상징적인 모델로서 대형 크라운과 문자반 둘레를 따라 배치돼 있는 날짜 눈금을 가리키는 중앙 바늘이 오리스 특유의 디자인으로 자리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모델이다.


이런 기능적인 특징뿐 아니라 외형 또한 호불호가 없을 듯하다. 항공 시계라는 특징상 비행기 조종사들이 입었던 플라이트 재킷과 같은 캐주얼 아이템들과 좋은 짝을 이룬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과거의 디자인을 복각한 수준의 클래식한 외양은 정중한 슈트와도 좋은 궁합을 자랑한다. 촬영을 위해 이 시계와 함께 블루종, 니트 카디건, 그리고 슈트와 함께 스타일링을 시도해봤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 한 치의 오차 없는 어울림을 완성해냈다. 그만큼 오리스의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터와 함께라면 스타일링에 대해 고민이 필요 없을 듯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계를 받아들고 조금은 걱정이 앞섰다. 내 손목이 굵은 편이라 지름 38mm 케이스의 시계를 선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내 손목에 작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직접 손목에 올려보니, 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른 38mm 시계와 달랐던 이유는 아무래도 두꺼운 장갑을 착용한 조종사가 손쉽게 시계를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한 큼지막한 용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용두의 압도적인 위용은 38mm의 시계를 내 굵은 손목 위에서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게 했다. 정말 이런 디자인을 브랜드의 아카이브로 간직하고 있다는 건 축복이자 행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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