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국제 무역항으로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개항한 목포는 파도치는 근현대사의 주 무대가 됐다. 10월에는 목포항구축제(10월 20~22일),제104회 전국체육대회(10월 13~19일),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10월 31일까지) 등 큰 축제도 열린다.

“이 시들 보고 눈물짓는 분도 계세요.”
정오의 햇살이 내려앉은 골목의 담벼락에 직접 쓴 시와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이 골목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던 문화활동가 정태관 선생이 벽에 쓰인 시를 가리킨다. 80세 어르신의 시는 ‘큰딸 서울 딸 그렇게 이뻐 죽것소’로 시작한다.
‘결혼해 갓고 살믄 좋을 것인디’, 좋은 사람 만나 사는 것이 소원이라는 노모의 당부 같은 넋두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목포, 근현대사의 희로애락을 만나다
목포 자랑, 북교동 예술인 골목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큰딸이어라우/ 낮에는 낮밥 먹었는가 전허고/ 저녁에는 잘
자라고 전화허고/ 하루도 안 빼먹고 전화헌당게/ 그랑게 제일 큰딸이 좋지라우” 바로 옆
에 89세 어르신이 남긴 시도 주인공이 큰딸이다.
시의 제목은 ‘큰딸 자랑’인데 자음 한 획에 나뭇잎이 닿아 ‘큰딸 사랑’처럼 보인다. 공교롭게도 기자가 큰딸인지라 속으로 이 시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목울대가 뜨겁고 꽉 메어서 눈에 힘을 주어야 했다.
걷다가 멈춰서 눈물을 삼키게 하는 이 거리의 이름은 ‘북교동 예술인 골목’이다. 목포를 넘
어 대한민국 근현대 문화를 이끈 주역들의 삶이 이 거리에 묻어 있다.
1907년생으로 운림산방 3대 주인이자 호남 전통회화의 거봉이 되는 남농 허건, 1903년생 여성으로서 최초의 장편소설을 남기고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박화성, 1897년생으로 <산돼지>, <난파> 등 표현주의 희곡에 식민지 지식인의 당당한 목소리를 투영한 김우진, 1942년생으로 평론의 기준이 된 전무후무한 문학가 김현, 1924년생으로 <산불>, <밀주> 등 사실주의극의 모범이 되는 수많은 작품을 남긴 극작가 차범석. 태어나 떠난 시기는 각자 달라도 목포 북교동 이 거리를 무대로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 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열어 보인다.
이들이 태어나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를 짐작하면 예술은 차가운 대접을 받았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말과 얼을 뺏긴 일제강점기가 지속됐고, 다른 이념 속에 총구를 겨누었던 한국전쟁도 겪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그렇게 굴곡졌고, 아팠고 배고팠다.
당대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 넉넉지 않아도 나누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힘’을 담았다. 얼마나 다행인가, 낮고 후미진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이 있다는 것은, 좀 더 가진 사람이 갖지 못한 삶을 떠올리는 것은. 더없이 아프고 배고픈 시절에 예술이 밥은 못 돼도 밥을 뜰 마음, 살아갈 의미를 찾게 한다.
불편한 것들이 편리해지고, 배고픔 대신 살찔 것을 염려하는 오늘날도 예술의 역할은 다르지 않다. 어떤 노랫말에 마음이 쿵 내려앉고, 한 줄 문장에 그 사람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면 예술은 예술로서 제 일을 다한 것이다. 북교동 예술인 골목, 여든 할머니의 시처럼 말이다.
목포, 근현대사의 희로애락을 만나다
우리네 삶에 예술 없으면
최근 몇 년 사이 목포는 관광도시로도 우뚝 섰다.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원도심에서도 이곳 북교동은 미지의 보물섬처럼 발굴하고 탐험하는 맛이 있다. 200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북교동은 남양동, 무안동과 함께 목원동으로 통합돼 주민들은 여전히 북교동과 목원동을 혼재해서 쓰곤 한다.
북교동(목원동) 예술인 골목은 크게 박화성길, 김진섭길, 차범석길, 김현길, 김우진길로 나뉘며 그 안에서 각 예술인과 관련한 스폿,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다. 차범석길에는 1930~1950년대 실존 인물인 ‘옥단이’가 골목에 예의 방실방실한 웃음을 지으며 여행객을 맞이한다.
20003년 차범석이 희곡 <옥단어!>를 발표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머물던 옥단이를 불러온 것이다. “옥단-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이웃에 물을 길어다주며 삶을 이끈 당찬 여성. 목포에서는 사람 이름을 부를 때 끝에 ‘이’ 대신 ‘어’와 가깝게 발음해 작품 제목이 <옥단어!>다. 차범석 생가 옆에 마련된 ‘차범석작은도서관’에는 그의 대본집 <전원일기>와 희곡집 <옥단어!> 등이 전시돼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뿐이랴. 도서관 코앞에는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한 획을 그은 전설의 가수 이난영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 그가 노래한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가 없었다면 지금의 K-팝 신화도 조금은 더 늦춰졌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엔터테이너라고 해도 손색없는 이난영은 가수에서 그치지 않았다. 1959년 두 딸과 조카가 주축이 된 그룹 ‘김시스터즈’를 만들었으니 미국에서 활약한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인 셈이다.
이난영&김시스터즈전시관은 화가이자 문화예술가로 활동하는 정태관 선생이 하나하나 발품을 팔아 세웠다. 지난 2006년 삼학도 난영공원에 이난영 여사의 수목장을 모셨는데, 이때 딸이자 김시스터즈 멤버였던 김숙자 선생과 인연이 닿았다고.
선생이 기증한 이난영 여사의 유품과 미국에서 활동 당시 착용한 의상, 소품 등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으로 오늘날의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전시관은 정태관 선생이 운영하는 무인카페, 화가의 집을 통해 입장할 수 있다. 화가의 집은 북교동의 또 다른 예술작품같다.
초록 잔디가 깔린 너른 마당에 노란색 파라솔, 네모반듯한 집 외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와
인공 짚을 덮은 지붕과 장독대까지. ‘북교동 예술인 골목’이라는 뜻 있는 공간을 만든 것도 선생의 오랜 정성이 빛을 발한 결과이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를 찾는다.
목포, 근현대사의 희로애락을 만나다
국제 무역항으로서 목포의 희로애락
목포역에서 10여 분 거리의 원도심은 ‘1897 개항문화의 거리’로 불리는 근대문화유산이 밀집해 있다. 1897년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개항한 목포는 빠른 속도로 대중문화가 전파되고, 거리에는 영사관, 우체국, 은행, 소방서 등 관공서 건물이 속속 세워졌다. 목포를 여행할 때 1897 개항문화의 거리는 이제 필수 코스 중 하나가 됐다. 구 목포일본영사관이던 건물은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변모했다.
유달산을 등지고 세워진 붉은 벽돌의 건물은 국제 무역항으로 목포의 어제,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등 굵직한 목포의 역사를 조명한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지난 2022년 9월, 목포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새로운 문을 열었다.
1929년 일제강점기에 세운 건물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설립해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일본 자본에 대항하는 호남 지역 인사들의 순수 자본으로 호남은행 목포지점을 건립한 것이다. 묵직하고 다부진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물은 근대 개항도시 목포에서도 유일한 근대 금융계 건축물이다. 1층은 호남은행 역사실, 근대문화 가상현실(VR) 체험을 할 수 있는 모던타임즈, 레트로 골목길·카페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벤트홀과 근대문화 체험존으로 운영하는 레트로 카페에서는 올 초 개항문화의 거리를 무대로 열린 패션 브랜드 슬링스톤의 근대의상 패션쇼의 의상과 당시 런웨이 장면을 영상으로 접할 수 있다. 2층은 1930~1970년대 우리나라를 빛낸 명곡들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그때 그 음악 전시관, 이난영과 음악가족을 주제로 한 기획전도 만날 수 있다. 새롭게 문 연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역사적인 공간을 찾아온 관람객이 적지 않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국제 무역항으로 출발한 목포의 역사는 2022년 6월 개관한 목포미식문화갤러리 해관 1897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개항 이전에 설치된 목포세관은 당시 해관이라는 명칭으로 관세 업무를 시작했다. 1908년 준공된 본관 건물은 관장실, 사무실, 서류실 등 11개 공간으로 구성됐다.
목포, 근현대사의 희로애락을 만나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본관은 지난 2020년 발굴 조사로 기초 부분이 확인됐고 외부에 하나의 전시물(구 목포세관 본관 터)로 보존했다. 해관1897의 주요 공간인 큰 창고, 작은 창고는 원래 외국물품을 임시 보관하는 보세창고로 1955년 준공한 건물이다.
작은 창고는 역사 전시관으로서 목포해관의 역할, 주요 무역품,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 미식문화 전당인 큰 창고에서는 입맛 돋우는 목포 대표 간식, 특산물로 만든 음료 등을 맛볼 수 있다.
해관1897은 전남도와 전남관광재단이 선정한 ‘유니크베뉴’이기도 하다. 유니크베뉴란, ‘독
특한’의 의미인 유니크(unique)와 ‘장소’를 뜻하는 베뉴(venu)의 합성어로 지역의 독특한 정취와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회의 장소를 뜻한다. 그 자체로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과 영감을 심어줄 수 있는 국제회의장, 흥미로운 기획전시를 계획하고 있다면 눈여겨볼 공간임이 틀림없다.

글 정상미 사진 이효태 삽화 조성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