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은 금융권에서 ‘자산관리 명가’로 불린다. 1995년 국내에서 가장 먼저 PB 비즈니스에 뛰어 들었을 뿐만 아니라 고액자산가들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 개발에 공을 들여 왔다. 스타 PB 출신으로 지난해 말부터 하나은행 WM본부를 이끌고 있는 이은정 본부장을 만났다.
[파이낸스] WM 리더 이은정 하나은행 WM본부장은 프라이빗뱅커(PB)의 경쟁력은 무엇보다도 전문성과 진정성이라고 강조한다. 은행을 넘어 전 금융권의 PB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 속에서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결국 전문성을 밑바탕에 깔고 고객에게 전하는 ‘진정성’이라는 설명이다.이 본부장은 “당연히 고객 수익률을 높이는 게 PB의 임무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어린 마음으로 고객에게 질문하는 자세”라며 “당장 은행의 이득을 생각하거나 상품을 많이 파는 것보다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 간판급 PB로 이름을 날렸던 이 본부장은 WM본부를 이끄는 지금도 뼛속까지 ‘PB’라는 자부심을 놓지 않고 있다. 이 본부장과 만나 하나은행이 가진 자산관리(WM) 경쟁력과 PB DNA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프라이빗뱅킹(PB) 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최근 몇 년 사이 부자, 즉 고액자산가가 늘어난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부모에게 자산을 물려받는 전통적인 부자가 상당수였다면, 요즘에는 자신만의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거나 투자를 통해 자산을 쌓은 분들이 많아졌거든요. 실제로 제가 PB로 만났던 고객 중에는 벤처 창업에 성공한 분, 코인이나 주식을 통해 엄청난 자산을 형성한 분, 유튜브 콘텐츠 크리에이터 등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유형의 자산가가 많은데요. 거액 자산을 보유한 부자의 유형이 급변하고 있는 것을 체감하고 있죠. 젊은 나이에 자산을 형성한 부자들의 니즈는 굉장히 다양해요.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투자 정보를 넘어, 자신이 거래하는 금융사를 찾아 PB와 상담하려는 수요가 자연스럽게 늘어났습니다. PB가 존재하는지 몰랐던 젊은 자산가도 이제는 자산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쪽으로 트렌드가 변화한 거죠. 또 과거에는 PB를 찾는다고 해도 자사 상품 판매 위주로 상담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이제는 자산가들도 보다 차별화된 PB 솔루션을 경험하며 눈이 높아졌어요. 결국은 고객이 정말 해결하길 원하는 문제를 읽고, 그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PB 비즈니스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봅니다. 자산가들의 니즈가 포트폴리오, 투자, 세무, 부동산 등 포괄적인 관점으로 변화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갈수록 자산관리 시장은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어요. 은행 입장에서도 이미 많은 정보가 오픈된 시장 상황에서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한계를 느끼는 상황이죠. 고객의 니즈에 따라 자산관리 솔루션을 차별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은행의 PB 역사가 오래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글로벌 PB상을 석권한 이력도 다수 있고요. 비결이 있다면요.
“사실 하나은행은 국내 PB의 ‘원조’라고 자부합니다. 현대적인 개념의 PB 비즈니스를 1995년 국내에 처음으로 들여왔고, 이후 자산관리 명가로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해요. 하나은행 PB센터를 믿고 찾아오는 초고액자산가의 수가 은행권에서 가장 많다는 점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물론 오랜 시간에 걸쳐 PB 노하우를 축적한 것도 저희의 자랑이지만, 하나은행을 ‘PB 명가’로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 이유는 단순히 오래됐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해 왔다는 데 있습니다. 당장 어떤 상품을 판매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자산가들이 정말 어떤 것을 필요로 할지에 관심을 갖는 일종의 소명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PB 명가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하나은행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입 PB에게는 PB의 일상과 노하우를 공부할 수 있도록 노트를 전수해주고, 예비 PB들에게도 PB들이 받는 정보를 모두 공유해 선제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차별화된 PB 서비스를 꼽는다면.
“고객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니즈까지 해결해주는 역할을 PB가 해야 한다고 봐요. 많은 고객이 자신과 같은 관심사를 가진 비슷한 규모의 자산가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싶어 하는 니즈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은행은 PB센터를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구성해줍니다. 특히 자녀 만남 서비스를 통해 지난 20여 년 동안 1700명 정도의 맞선을 주선했는데요. 1대1 만남은 지금도 상시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1년에 한 번 좋은 호텔이나 하나은행 클럽원(Club1) PB센터에 10명씩 초청해 단체맞선 행사를 진행합니다. 이렇게 해서 성사된 커플이 60커플 정도인데요. 꼭 커플이 탄생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취미를 가진 자녀들이 함께 투자 공부를 하거나 친분을 쌓는 커뮤니티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은행 입장에서도 자산가의 자녀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라, 새로운 고객을 창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자산가의 종류도 다양한 것 같습니다. 하나은행은 고객을 어떻게 유형화해서 관리 중인가요.
“올해부터 고객의 니즈에 따라 그룹을 나눠 관리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점에는 고령화되는 트렌드에 발맞추는 차원에서 상속, 가업승계에 특화된 시니어 마스터가 10명 있습니다. 본점 외에도 주요 거점 현장에 상속, 승계에 관심이 큰 자산가를 위한 리빙 전문 PB를 배치했어요. 아무래도 뉴리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부를 시니어 계층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자산관리가 갈수록 중요해집니다. 또 병원이나 대학교 쪽 지점에도 PB를 배치했습니다. 아직 고액자산가들이 없더라도 미래 고객을 위해 ‘미리 가 있는다’는 전략이죠.”
‘디지털 자산관리’ 강화에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디지털 PB는 어떻게 운용하고 있나요.
“2022년 8월부터 디지털 채널을 선호하는 주거래 VIP 고객을 위해 비대면으로 자산관리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심화된 상담을 원하는 고객에게는 오프라인 채널의 PB와 직접 연결해드리고 있어요. 지금은 디지털 PB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흐름입니다. 현재 자산 10억~100억 원 이상 고객 중에서도 거래의 90% 이상을 비대면으로만 하는 분들이 있어요. 물론 이런 고객의 비중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요. 또 자산 5억 원 미만 고객은 절반 이상이 비대면으로 거래를 많이 하고 있거든요. 디지털 PB가 관리하는 자산 규모도 올 6월 말 기준으로 4100억 원에 달합니다.”
꼭 부자가 아니어도 자산관리 서비스를 대중적으로 받을 수 있는 흐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해 4월에는 인공지능(AI) 기반의 디지털 자산관리 플랫폼인 아이웰스(AI Wealth)도 만들었어요. 비대면으로 PB 수준의 자산관리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죠. 이를 통해 AI가 제안하는 포트폴리오에 실제로 고객들이 투자한 금액이 7600억 원가량 됩니다. 특히 비대면으로 혼자 상품에 가입할 때는 스스로 판단해 상품을 선택해야 하는데, 판단이 쉽지 않거든요. 아이웰스는 지수, 시장 흐름 등 모든 상황을 AI 알고리즘이 판단해 제안하고 6개월 단위로 리밸런싱을 해줍니다. 예·적금, 상장지수펀드(ETF)까지 포함한 포트폴리오를 짜주기 때문에 균형 잡힌 투자가 가능합니다.”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모든 직원의 PB화를 강조해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무슨 뜻인가요.
“고객이 은행에 귀한 시간을 내서 오시는 거잖아요. 직원이 자산관리에 대해 잘 모르면 고객의 뜻을 헤아릴 수 없을뿐더러 간단한 도움밖에 못 드립니다. 저희 내부 규정상 창구 직원은 PB라는 이름을 쓰지 않지만, 모든 직원이 PB 못지않은 자산관리 전문성을 기르고 고객에게 솔루션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해 오셨어요. ‘하나은행에 가면 다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요.”
PB에 대한 애정이 크신 것 같은데요. 본부장님에게 PB는 어떤 의미입니까.
“저는 예전부터 PB로 은퇴하는 게 목표였어요. PB를 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훗날 재채용 프로그램을 통해 PB로 현직에 남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저는 뼛속까지 PB인 사람이라, 지금도 명함에 ‘그랜드 마스터 PB’라고 적고 있어요. 물론 PB는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긴 합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고객의 자산이 왔다갔다 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직업 특성상 꼭 필요한 스트레스라고 생각합니다. PB를 하면서 느낀 가장 큰 장점은 제 삶이 너무나 풍요로워졌다는 거예요. 고객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들의 관심사를 알아야 되거든요. 자녀의 입시 문제부터 와인, 여행, 음악, 미술 등 모든 방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객에게 질문도 많이 합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철학이 있는지 묻고, 제 마음에도 새기죠. 어떻게 부를 이루었는지 묻는 과정에서 배우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면 마치 책 한 권 읽은 느낌이 들어요. 저는 우리가 태어나 사회에 나왔다면 어떤 작은 기여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고객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게 PB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고객이 잘되기를 바라거든요.”
PB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도 전문성과 진정성입니다. 제가 15년 전 예비 PB 행 내 공모 지원 신청서를 얼마 전 어렵게 발견했는데, 고객에게 작은 일도 정성을 다하는 것을 그 당시에도 중요하게 생각했더라고요. 은행의 입장보다는 고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인 거죠. ‘부모’가 없으면 ‘자식’이라는 역할이 사라지는 것처럼, ‘고객’이 없으면 ‘PB’라는 역할도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결국 핵심성과지표(KPI)보다는 고객의 존재가 우리의 본질이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의논하고 싶은 PB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후배 PB들에게 설문을 받아본 결과도 비슷하더라고요. 고객에게 어떤 PB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었더니, ‘진심’과 ‘진정성’을 말한 PB들이 가장 많았어요. 이런 이야기가 PB들 사이에 계속해서 나오는 게 너무 기쁘고 반가운 일이죠.”
그동안 만났던 고객 중 인상 깊었던 사례를 꼽는다면요.
“7000억 원대 자산가 한 분이 본인을 맡을 PB 면접을 보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PB 한 명당 10분씩 시간이 주어졌죠. 보통은 그런 자리에서 자신이 어떤 걸 해줄 수 있다고 강조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저는 PB센터에 그해 발령이 나서 왔다는 점을 어필했어요. ‘회장님, 저는 과거 다른 센터에서 6년, 8년씩 오래 근무했습니다. 제가 가장 어필을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이 센터로 발령난 지 얼마 안 됐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센터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하는 게 바람입니다. 혹시 어떤 자산관리를 원하세요?’라고 질문했죠. 결국 제가 뽑혔는데, 어떤 걸 원하는지 물은 PB는 제가 처음이었다는 게 발탁의 이유였어요. 다른 PB들이 해줄 수 있다고 강조한 것들은 이미 본인에게 다 있는 것들이었다는 거죠. 저는 항상 뭘 해주면 좋을지 고객에게 질문을 하거든요. 고객이 부탁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지 않는 것까지 헤아리며, 항상 고객에게 영감을 주는 PB가 되는 게 제 목표죠.”
시장의 변동성이 큰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PB들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요.
“시장이 불안할수록 PB가 ‘이런 시장 상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고객에게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시장이 하락하면 고객에게 연락을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PB를 하면서 시장이 나쁠 때일수록 고객에게 더 자주 연락했어요. 고객들은 그런 연락에 고마워합니다. 결국은 고객과의 소통이 중요한 거죠.”
대담=장승규 편집장
정리=정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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