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증시를 주도한 변압기, 조선, 방산, 화장품·식품 섹터의 공통점은 해외 수요 급증에 힘입어 수출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증권가는 밖에서 통하는 경쟁력이 곧 펀더멘털이라며 수출 성장세가 뚜렷한 기업이 향후 주가 흐름을 이끌 것이라고 분석한다
[마켓 트렌드]
한동안 증권가가 불안 요인으로 꼽았던 미국과의 상호관세 협상이 지나갔지만 9월 증시는 불확실성이 여전하다. 안에선 배당소득 분리과세안을 비롯한 증시 활성화 정책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미국이 기준금리 인하에 실제로 나설지, 언제 얼마나 인하할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증권가에선 이 같은 시기엔 수출을 늘리고 있는 기업들을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밖에서 통하는 경쟁력’이 실적 기초체력(펀더멘털)으로 이어지는 까닭에서다.
수출이 주가 밀어올린 변압기 기업들
대체데이터 플랫폼 한경에이셀(Aicel)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8월 중순(잠정치 기준)까지 전년 대비 수출량이 가장 많이 늘어난 주요 품목은 중대형 변압기다. 지난해 1월부터 8월10일까지에 비해 수출 규모가 64.73% 늘었다. 같은 기간 1만kVA 이상 대형 변압기 수출은 44.98% 증가했다.
국내 변압기 기업들은 미국, 유럽, 중동 등에서 발주가 쏟아지면서 수출량이 늘고 있다. 주요국들은 인공지능(AI) 서비스, 전기차, 로봇 서비스 등이 확산하면서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전압을 바꿔주는 변압기는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공장, 가정 등 수요처까지 보낼 때 필수적인 장비다.
수출 데이터를 보면 국내 기업들의 수익성 추이도 알 수 있다. 올 들어 중대형·대형 변압기 수출량이 늘어나는 한편 소형 변압기 수출은 25.58% 급감했다. 기업들이 같은 공장에서 수익이 많이 남는 제품 생산·수출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다.
덕분에 주요 기업들 영업이익률은 뚜렷하게 상승세다. HD현대일렉트릭의 올 2분기 영업이익률은 23.1%로 분기 기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효성중공업은 10.8%로 전년 동기 대비 5.5%포인트 올랐다. 초고압변압기를 집중 생산하는 미국 법인의 이익률은 약 35%에 달한다. LS일렉트릭의 영업이익률 역시 꾸준히 오르고 있다.
증권가는 이들 기업의 주가 추가 상승 여력이 남았다고 보고 있다. 통상 전력인프라 장비의 리드타임(발주에서 인도까지 걸리는 기간)이 2~3년인 만큼 기존 수주 물량이 한동안 실적을 이끌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전력 수요 증가세는 단기 유행이 아니라 구조적인 추세라는 점도 이 같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면비디아’도 해외 매출 덕
조선사들도 비슷하다. 지난 7월 중순까지 전년 동기 대비 수출 규모가 29.42% 늘었다. 고부가가치 선박 위주 수주가 늘면서 수익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화오션은 올 2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0% 늘었고, 영업이익은 흑자 전환했다. 삼성중공업의 2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6.7% 급증했다. HD현대중공업, HD현대삼호, HD현대미포 등 HD현대 계열 조선 3사 실적도 시장 기대치를 웃도는 실적을 발표했다.
최근 주가가 크게 올라 ‘면비디아(라면+엔비디아)’ 별명을 얻은 삼양식품도 수출을 바탕으로 실적을 키우고 있다. 올 들어 지난 7월 중순까지 라면 수출은 23.44% 늘었다. 같은 기간 반도체 수출 성장세(14.15%)를 크게 웃돈다. 이 기간 삼양식품의 주가는 86%가량 올랐다.
삼양식품은 올 2분기 연결기준 매출이 5531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0%, 영업이익은 1201억 원으로 34% 늘었다. 북미, 중국, 유럽 등에서 불닭볶음면이 인기를 얻어 해외 매출이 33% 늘어난 게 주효했다. 2023년 64%대였던 삼양식품의 해외 매출 비중은 올 상반기 77.1%로 늘었다.
반면 같은 분야에서도 수출을 확 늘리지 못한 기업들은 주가도 비실비실하다. 삼양식품 주가가 뛰는 동안 농심 주가는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농심은 국내에선 대표 제품 신라면이 30년 이상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 시장 공략은 지난 4월 ‘신라면 툼바’가 미국 진출을 시작한 등 상대적으로 속도가 늦다. 농심의 2분기 매출은 8677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0.8%만 늘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8.1% 줄어든 402억 원이었다. 국내 시장은 경쟁이 워낙 치열해 마케팅 비용을 많이 쓰고, 매출원가가 올라도 쉽사리 가격을 올릴 수 없어서다.
성장 시장 비중 높아야 유리
특정 섹터 수출량이 확 늘어난다고 해서 그 섹터 내 기업들이 줄줄이 수혜를 보는 건 아니다. 수요가 명확히 늘어나는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지에 따라 주가 향배가 갈린다.
화장품 섹터가 대표적이다. 한경에이셀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8월 중순까지 화장품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06% 증가했다. 레이저장비 등 미용 의료기기 수출은 12.57% 늘었다.
하지만 모든 지역에서 수요가 늘어난 게 아니다. 지난 7월 수출 통계 확정치에 따르면 미국·캐나다, 유럽, 중동, 동남아, 일본향 수출은 각각 두 자릿수 연간 성장했다. 반면, 유일하게 중화권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12%가 뒷걸음질쳤다. 올 2분기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화장품 기업 실적과 주가가 휘청인 이유다.
증시 입성 2년 차인 에이피알이 최근 화장품 업계 ‘큰형님’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시가총액을 연이어 제친 것도 이때문이다. 올 들어 지난 8월 중순까지 에이피알 주가는 약 300% 뛰었고, 같은 기간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은 코스피 지수 상승률(약 34%)을 밑돌았다. 올 2분기 기준 에이피알의 매출에서 중화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8.5%에 그친다. 반면 LG생활건강은 매출의 45%, 아모레퍼시픽은 23%가 중화권에서 나온다. 올 2분기 LG생건은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이 8.8%, 영업이익은 65.4% 줄었다.
수출 통계를 통해 국내 증시의 전반적인 향배를 가늠할 수도 있다. 한국 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구조이다 보니 일평균 수출금액 등 수출 통계와 코스피 지수 간 상관계수가 높다는 게 증권가의 설명이다.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 항목의 수출 추이에 따라 증시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국내 기업 제품에 대한 해외 수요를 예상할 때는 구글, 네이버 등 주요 검색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검색 트렌드 기능도 유용하다. 세계 검색량 추이가 기업 제품에 대한 관심도를 빠르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올 들어 주가가 급등한 파마리서치의 주가 움직임은 이 기업 대표 브랜드인 ‘리쥬란’ 세계 검색 트렌드 그래프와 비슷하다”며 “검색 트렌드가 먼저 뜨고, 수출 동향으로 숫자가 입증되면 실적과 주가가 뒤이어 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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