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은 해외에서 상속·절세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았지만, 국내에서는 금융기관 중심 운영 탓에 활용이 제한적이었다. 최근 이를 보완할 제도로 자기신탁선언이 주목받으며, 초고령사회 자산관리·승계의 새로운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산관리 컨설팅]
비싼 신탁은 이제 그만… 자기신탁선언이 뜬다
신탁은 위탁자가 신임 관계에 기초해서 수탁자에게 특정한 재산을 맡기고 수탁자를 통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하게 하는 법률관계다. 예컨대, 자녀에게 건물을 승계할 경우, 종전에는 증여를 통해 생전에 곧바로 자녀에게 건물의 소유권을 이전하거나, 유증을 통해 상속이 개시되면 그때 자녀에게 소유권이 이전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비해 신탁은 일단 건물을 수탁자에게 이전한 다음, 그 건물을 어떤 식으로 자녀에게 이전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정해서 수탁자를 통해 이를 실현하는 방법이다.

신탁과 기존 자산 승계 방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승계 목적물의 소유권이 수탁자 명의로 이전된 상태에서 자산 승계가 진행된다는 데 있다. 이로 인해 신탁재산은 위탁자와 분리돼 독립성이 인정되고, 위탁자가 자산 승계 절차 중에 파산하더라도 위탁자의 채권자들은 신탁된 재산에 집행할 수 없어 자녀들은 안전하게 자산을 승계할 수 있다. 또한 위탁자의 의사를 존중해서 자산의 소유권뿐 아니라 소유권에서 파생한 권리나 소유권의 일부 지분도 승계의 대상으로 정할 수 있다.

미국, 비용 절감·절세 가능해 신탁 인기

예컨대, 자녀가 미성년자인 동안에는 건물에서 발생하는 차임 중 생활비, 학비 등 일정한 금액만 지급하고, 자녀가 성년이 돼 건물을 스스로 관리, 처분할 능력이 생기면 그때 건물의 소유권을 이전하도록 설계할 수 있다. 나아가, 위탁자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건물에서 발생하는 차임 중 나머지 금액을 위탁자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신탁을 이용하면, 자녀들에게 재산을 승계하는 것과 자신을 위해 자산을 관리하는 것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신탁은 보통법(common law)에 기반한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은 물론 금융, 자산관리의 허브로 불리는 싱가포르, 홍콩, 스위스 등에서 오래전부터 널리 활용돼 왔다. 위탁자로부터 재산을 분리해 독립성을 확보하고, 구체적인 관리, 승계 방법을 임의로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자산관리 툴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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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국에서는 상속법을 ‘wills & trusts’라고 부를 만큼 일반인들이 신탁에 익숙한데, 이는 신탁을 하면 경제적으로도 유리한 것이 중요한 이유로 평가된다. 예컨대, 미국은 상속이 발생하면 상당한 비용이 발생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상속집행 절차(probate)를 거쳐야 하는데, 신탁을 활용하면 이를 피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How to avoid probate>라는 책이 수백만 부 이상 판매되며 신탁을 통한 자산승계 방안이 널리 확산됐다. 미국에서는 신탁을 이용하면 다양한 절세 플랜도 가능하기 때문에 신탁을 활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유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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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신탁은 자산 승계 및 자산관리 방안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2025년 7월 말 기준 5대 은행 유언대용신탁 잔액이 3조8150억 원으로 2020년 말(약 8800억 원)에 비해 4배 이상 증가한 상태다. 나아가 주요 금융기관에서는 종전에 판매하던 유언대용신탁 상품과 달리 수익권의 구조를 단순화한 대신 최저가입금액과 수수료를 대폭 낮춘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잇달아 출시하며 시장을 확대하는 추세다.

우리나라에서 신탁 문턱이 높아진 이유

우리나라의 유언대용신탁은 이를 금융 상품으로 다루는 일본을 참고해 도입한 탓에 금융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금융위원회의 인가를 받은 금융기관만 수수료를 받는 수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법무법인 등 다른 기관에서 전문적으로 수수료를 받으며 신탁을 활용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산 승계 및 자산관리 목적의 신탁을 설정하는 경우 금융기관의 금융 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화됐고, 그에 따른 상당한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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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상속 집행 절차가 없어 신탁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절약되는 비용과 시간이 없고, 절세 혜택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금융기관을 수탁자로 하는 신탁이 일반적이다 보니, 평생 일군 재산을 내 명의가 아닌 은행 명의로 바꾼다는 점에 대해 거부감이 크고, 신탁을 설정했다는 이유로 신탁을 설정, 유지, 집행하는 데 별도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반 유언대용신탁은 진입장벽이 있어 고액자산가들이 아니면 접근 자체가 어렵고, 최근 출시되고 있는 간편형 유언대용신탁은 진입장벽은 낮아졌지만 사실상 유언과 동일한 정도의 의미만 있기 때문에 여전히 수수료 지급에 대한 거부감이 남는다. 게다가 수탁자가 금융기관이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법)에서 정하는 다양한 규제를 받기 때문에 수익권을 자유롭게 설계하는 데에도 지장이 따른다.

이처럼,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용되고 있는 금융기관이 수탁자가 되는 자산 승계 및 자산관리 도구로서의 신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되는 면이 많다. 이를 해결할 열쇠가 바로 자기신탁선언이다.

자기신탁선언은, 위탁자가 스스로 수탁자가 되는 신탁 선언 형식으로 신탁을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신탁법'은 2012년 '신탁법' 전면 개정을 통해 위탁자가 스스로 수탁자가 되는 자기신탁선언을 도입했다. 자기신탁선언은 우리에겐 낯선 제도이지만, 앞서 살펴본 미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자산관리 및 자산 승계 목적의 신탁 설정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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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탁자가 스스로 수탁자로

자기신탁선언은 위탁자 스스로 수탁자가 된다는 점에서 기존 신탁이 갖는 문제점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첫째, 위탁자 스스로 수탁자가 되기 때문에, 평생 일군 재산이 다른 사람 명의로 넘어간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해소된다. 둘째, 신탁재산을 금융기관에 맡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수료가 발생하지 않는다. 셋째, 수탁자가 금융기관이 아닌 위탁자 개인이기 때문에 자본시장법의 규제를 받지 않아 자유로운 설계가 가능하다. 요컨대, 앞서 우리나라 유언대용신탁이 활성화되는 것을 가로막던 장애요소 대부분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2025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해 고령인구의 자산관리 및 자산 승계 계획이 더욱 중요해졌다. 고령인구는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감퇴해 불리한 재산 거래를 하거나, 사기 등의 범죄에 노출될 위험도 상당히 높다. 따라서 신탁을 통해 자산을 관리하면 신탁재산이 위탁자와 불리돼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없으므로 안정적인 자산관리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신탁은 위탁자 스스로를 위한 분배와 자녀에 대한 재산 승계를 동시에 설계할 수 있기 때문에, 재산 이전 후 자녀의 변심에 대한 우려나 자녀에 대한 승계 후 노후자금에 대한 고민을 모두 해소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자산관리와 자산 승계 목적의 신탁은 상당한 보수를 지급할 수 있는 자산가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 금융 상품으로 발전돼 왔다. 하지만 신탁은 금융 상품이 아니라 법제도이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누릴 수 있도록 발전돼야 마땅하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자기신탁선언은 국민들이 높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신탁의 장점을 누릴 수 있게 하고, 고액자산가들은 충분한 수수료를 지급해 금융기관을 승계수탁자로 지정하고 고도의 전문화된 자산관리와 자산 승계 플랜을 마련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웅규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