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지음, 창비, 2017년 3월.
아몬드, 손원평 지음, 창비, 2017년 3월.
[한경 머니 기고 = 윤서윤 독서활동가] #사례 1. “엄마, 이거 언제 다 읽어?” “괜찮아. 우리 지수는 책 좋아하잖아!” 엄마는 다섯 살이 된 지수에게 1000만 원가량의 전집을 선물했다. 아이와는 세 살 때부터 도서관에 다니며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고 했다. 독서도 중요하지만 독후 활동이 더 중요하니 책을 읽은 후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물어보라는 조언을 했다. 그러자 “몰라”가 아니라 “재미있었어”,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힘들었을 것 같아”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번에 주문한 전집들을 완독하면 감정이 다양해질 거라며 좋아했다.

#사례 2. “대체 작가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어.” 친구와 주말마다 커피숍에서 만나 책을 읽는다. 둘은 각자 좋아하는 음료를 주문하고 2~3시간 동안 말없이 각자의 책을 읽는다. 읽고 난 후에는 와인 한 잔이나 떡볶이를 먹으며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이 시간에 친구는 나에게 “작가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어”라고 하며, ‘작가의 의도’가 대체 뭐길래 성인인 우리까지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했다. 나는 “글쎄, 작가의 의도가 중요한가”라며 “네가 느낀 감정은 뭔데”라고 물었다. 친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왜 이렇게 전개됐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했다.

#사례 3.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노동이에요.” 첫 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본방사수를 하면서 본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염미정의 대사다. 쿨한 척, 괜찮은 척 말을 아끼는 미정이 사내 클럽 가입을 강요하는 직원 앞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경기도 끝자락에서 서울의 도심까지 매일 출퇴근을 한다. 미정은 해방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구씨에게 “추앙하라”며 손을 내민다. 말이 없던 미정이도 불만을 털어놓을 수 있고, 좋은 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좋아했다고 기록해 둔 과거 일기장은 감정이 없어 보이는 지금의 미정과는 다른 사람인 듯하다. 그런 미정이 하루에 좋은 일이 전혀 없다고 할 때,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아,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라고 하면서 생기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은 내가 지금 잊고 있었던 감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감정을 느낀다는 건, 나의 안전이나 평안이 흔들린다는 신호다. 이 신호를 정확하게 파악할 때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그런데 ‘스트레스 받아’, ‘좋아’와 같이 포괄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다 보니 내 감정이 무엇인지 쉽게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 분노나 불안, 불쾌와 같은 감정은 더 잘 다뤄야 한다. 그래서였나 보다. 2017년에 출간된 <아몬드>의 선윤재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윤재는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가 다른 사람보다 작아 공포나 불안감을 잘 느끼지 못하는 열여섯의 아이다. 작가 손원평은 1970년에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 ‘알렉시티미아’라는 감정 표현 불능증에 상상력을 더해 윤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누군가가 폭행을 당하는 장면에 차분한 어투로 “골목에 누가 쓰러져 있어요”, “죽을지도 몰라요”(17쪽)라는 말을 되풀이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이다. 오히려 “네가 조금만 진지하게 말했더라면 늦지 않았을 것”(19쪽)이라며 윤재를 탓한다.

이런 윤재는 열여섯 생일에 끔찍한 일을 겪는다. 같이 살고 있었던 할머니와 엄마가 묻지마 살인을 당한 것. 한 명이 다치고 여섯 명이 죽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표정이 없는 윤재 앞에 나타난 건 곤이다. 곤이는 강해 보이고 싶어 하는 열여섯의 남자아이다. 세 살에 엄마의 손을 놓치고 중국인 노부부와 시설을 다니며 자랐다. 13년 만에 만난 아저씨가 아빠이고, 곤이는 윤이가 되지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게 윤재와 곤이는 친구가 되고, 미동도 없던 엄마가 깨어나는 순간 윤재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장면은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언어를 이해하는 건 상대의 표정이나 감정을 알아채는 것과 비슷한지도 몰랐다.”(188쪽)

타인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그 언어를 표현해본 경험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윤재의 엄마. 그녀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五慾)’을 A4용지에 프린트해 놓고 윤재에게 알려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상대방을 따라 하라는 가르침과 함께. 해가 지날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할 때가 많았지만, 윤재는 차분하고 평범한 아이가 돼 가고 있었다. 그러다 곤이를 만나면서 사람이 분노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배운다. 그렇기에 윤재의 변화가 더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어떨까. 오늘부터라도 감정일기를 쓰면서 감정의 실체를 살펴보고, 건강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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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서윤 독서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