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파이의 진정한 성공은 사람들이 더 이상 '디파이'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금융 소비자는 블록체인 기술을 의식하지 않고 디파이 위에서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가상자산 따라잡기]
지난 4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블록체인 포럼 2026에 참석한 참가자들. 사진=연합EPA
지난 4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블록체인 포럼 2026에 참석한 참가자들. 사진=연합EPA
미국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간 디지털자산 시장의 가장 큰 화두는 단연 제도권 금융기관의 진입이었다. 미국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승인으로 시작된 변화는 스테이블코인의 급성장으로 이어졌고, 최근에는 실물자산 토큰화(RWA)가 글로벌 금융 업계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블랙록, 프랭클린템플턴과 같은 전통 금융 회사들은 국채와 머니마켓펀드(MMF)를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모두 전통 금융이 블록체인을 활용하거나 웹3로 대변되는 디파이(DeFi·탈중앙금융)에 뛰어들기 시작했다는 공통된 흐름을 보여준다.
클라우드처럼…디파이가 금융의 운영체제가 된다
이젠 웹3가 제도권으로

최근에는 조금 다른 방향의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기관이 웹3로 들어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웹3가 제도권 금융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그 중심에는 디파이가 있다.

초기 디파이의 목표는 명확했다. 은행이나 중개자 없이 스마트컨트랙트만으로 대출 및 거래, 자산을 운용할 수 있는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디파이의 역할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기존 금융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금융이 활용하는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 산업의 발전 과정과도 닮아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기업들은 직접 서버를 구축하고 데이터센터를 운영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은 아마존웹서비스(AWS)나 애저(Azure)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한다. 서버를 직접 만드는 것이 경쟁력이 아니라, 이미 검증된 인프라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가 경쟁력이 된 것이다.

온체인 금융도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금융 회사는 고객과 브랜드, 규제를 담당하고, 실제 거래와 대출, 유동성 공급은 이미 검증된 온체인 프로토콜이 담당하는 구조다. 사용자는 이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디파이는 점차 금융의 인프라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로빈후드 마켓스의 웹사이트가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모습. 로빈후드는 암호화폐 사업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하기 위해 2024년 비트스탬프(Bitstamp Ltd.)를 약 2억 달러에 인수했다. 사진=연합AFP
로빈후드 마켓스의 웹사이트가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모습. 로빈후드는 암호화폐 사업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하기 위해 2024년 비트스탬프(Bitstamp Ltd.)를 약 2억 달러에 인수했다. 사진=연합AFP
최근 글로벌 금융 회사들과 핀테크 기업들의 행보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로빈후드는 최근 자체 블록체인인 로빈후드 체인(Robinhood Chain)을 공개하며 토큰화 주식과 온체인 금융을 하나의 생태계 안으로 통합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사용자는 여전히 익숙한 로빈후드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지만, 그 뒤에서는 퍼블릭 블록체인과 디파이 프로토콜이 거래와 대출, 유동성 공급을 처리하는 구조다. 미국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스 역시 베이스(Base) 체인을 중심으로 비슷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글로벌 결제 기업 스트라이프도 온체인 금융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클라우드처럼…디파이가 금융의 운영체제가 된다
실험에서 표준으로…유니스왑의 변신

대표적인 사례가 유니스왑(Uniswap)이다. 유니스왑은 중앙 거래소 없이도 누구나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자동화 거래 프로토콜이다. 출시 초기에는 암호화폐 투자자들의 실험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는 토큰화 자산 거래나 온체인 유동성 공급을 구현하려는 기업들이 가장 먼저 검토하는 인프라 가운데 하나가 됐다. 풍부한 유동성과 오랜 운영 경험은 후발주자가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경쟁력이 됐다.

대출 시장에서는 에이브(Aave)가 대표적이다. 에이브는 현재 약 136억 달러 규모의 자산이 예치(TVL)돼 있으며, 활성 대출 잔액도 100억 달러를 웃돈다. 토큰터미널에 따르면 2026년 상반기 프로토콜에 귀속되는 매출은 약 51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단순히 새로운 개념의 금융 실험을 넘어 실제 현금흐름을 만들어내는 금융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암호화폐뿐 아니라 RWA를 담보로 활용하는 시장도 확대하고 있으며, 기관투자자를 위한 규제 친화적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클라우드처럼…디파이가 금융의 운영체제가 된다
최근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모포(Morpho)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포는 일반 사용자를 직접 확보하는 것보다 금융 회사와 핀테크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는 대출 인프라를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최근 로빈후드의 온체인 예치 서비스인 로빈후드 언(Robinhood Earn)의 핵심 인프라로 채택된 것도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이다. 사용자는 로빈후드 앱을 이용하지만 실제 대출과 자산 운용은 디파이 프로토콜 위에서 이루어진다. 앞으로 금융소비자는 자신이 디파이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클라우드처럼…디파이가 금융의 운영체제가 된다

신뢰가 혁신을 이기는 디파이 시장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디파이 생태계 내부의 경쟁 구도까지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2021년만 해도 디파이 시장에는 수백 개의 거래소와 대출 프로토콜이 경쟁하며 새로운 기능과 높은 토큰 보상을 앞세웠다. 그러나 시장이 성숙하면서 기관은 더 이상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선택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 해킹 없이 운영됐고,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했으며, 실제 수익을 창출하는 소수의 프로토콜에 자금이 집중되고 있다.

이는 금융 인프라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금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신보다 신뢰다. 기관이 수십억 달러의 자산을 맡기는 플랫폼은 화려한 기능보다 오랫동안 검증된 보안성과 안정성이 우선이다. 여기에 풍부한 유동성은 다시 더 많은 유동성을 불러오는 네트워크 효과를 만든다. 최근에는 규제 친화성도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 디파이가 규제를 피해 성장하는 산업에서 규제를 수용하며 성장하는 산업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투자자의 관점에서도 디파이를 바라보는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토큰은 가치 평가가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뚜렷한 수익 모델 없이 토큰 가격 상승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디파이 프로젝트들은 점차 전통 금융 회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에이브는 분기마다 프로토콜 수익을 공개하고 있으며, 거래와 대출이 늘어날수록 현금흐름도 함께 증가한다. 유니스왑에서는 거래 수수료 일부를 토큰 경제와 연결하는 수수료 스위치(fee switch)가 다시 논의되고 있다. 토큰 보유자에게 경제적 가치를 환원하는 구조가 현실화된다면 토큰은 단순한 거버넌스 수단을 넘어 현금흐름을 가진 자산으로 평가받기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클라우드처럼…디파이가 금융의 운영체제가 된다
토큰도 매출과 현금흐름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토큰이 법적으로 주식과 동일한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은 이미 토큰을 단순한 유틸리티로만 평가하지 않는다. 프로토콜 매출, 총예치금(TVL), 활성 대출 규모, 거래량, 수수료, 바이백과 같은 지표를 통해 프로젝트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전통 주식 시장에서 매출과 영업이익, 자사주 매입을 분석하듯 디파이 역시 실적과 현금흐름 중심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하락장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차이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결국 살아남는 프로젝트는 화려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실제 돈을 버는 프로젝트일 가능성이 높다.
클라우드처럼…디파이가 금융의 운영체제가 된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스마트컨트랙트 보안, 자금세탁방지(AML), 투자자 보호, 국가별 규제는 여전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다. 최근 일부에서는 디파이에 대한 접근 자체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자체를 차단하는 접근이 아니라 어떤 영역은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고, 어떤 영역은 혁신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균형 잡힌 설계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기관이 언제 웹3를 사용할 것인가에 주목해 왔다. 그러나 이제 질문이 달라지고 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금융 회사가 블록체인을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블록체인 금융 인프라를 선택할 것인가다. 인터넷이 기존 산업을 대체하기보다는 대부분 산업의 기반이 됐듯, 디파이 역시 은행을 없애기보다 은행이 사용하는 금융 인프라가 돼 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디파이의 진정한 성공은 사람들이 더 이상 ‘디파이’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금융 소비자는 블록체인 기술을 의식하지 않고 디파이 위에서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게 될 것이고, 바로 그때 디파이는 비로소 금융의 운영체제가 돼 있을 것이다.

박태우 스페이스바 벤처스 대표 tw@spaceba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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