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옵션 시행 3년. 상품 성과는 기대를 넘어섰지만 자금의 82.5%는 여전히 원리금보장형에 머물러 있다. 42개 사업자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제도의 병목은 상품 품질이 아니라 자금이 좋은 상품에 닿는 경로에 있었다.
[커버스토리]
2026년 6월 말, 제도 시행 세 해를 넘긴 데이터가 처음으로 이 세 단계를 모두 검증할 만큼 쌓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지막 단계는 통과했고 중간 단계가 막혀 있다.
성과부터 살펴보자. 2026년 2분기 1년 평균 수익률은 안정형 2.37%, 안정투자형 12.77%, 중립투자형 21.78%, 적극투자형 32.66%였다. 위험등급이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수익률이 계단식으로 높아진다.
지속적으로 부진한 상품도 예상보다 적다. 3년 수익률이 공시된 원리금비보장 상품 196개를 대상으로, 분기마다 같은 등급 안에서 하위 25%에 해당했는지를 열네 분기에 걸쳐 추적했다. 관측 분기의 60% 이상에서 하위 25%에 머문 상품을 ‘지속적 하위권’으로 분류했다.·
3개월 수익률 기준으로 7개(3.6%), 1년 수익률 기준으로 12개(6.1%)가 여기 해당했다. 두 기준 모두에서 걸린 상품은 6개, 전체의 3.1%다. 측정 구간을 바꾸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점에서 이 6개는 우연한 부진으로 보기 어렵다. 반대로 말하면 196개 중 190개는 구조적 부진 상품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금은 안정형에 있다
문제는 다음 단계다. 2026년 6월 말 디폴트옵션 적립금 55조8743억 원 중 안정형이 46조1028억 원, 82.5%를 차지한다. 나머지 세 등급을 다 합쳐도 9조7715억 원으로 안정형의 5분의 1에 못 미친다.
32.66%의 수익률을 낸 적극투자형에 들어 있는 자금은 2조110억 원, 전체의 3.6%다.
적립금 변화를 읽을 때는 자금이 실제로 들어오고 나간 것인지, 기존 자금의 평가액이 오르내린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전 분기 적립금에 이번 분기 3개월 수익률을 적용해 평가 효과를 구하고 실제 증감에서 차감해서 순유입액을 어림잡아 봤다.
그 결과 안정형에서 1조4891억 원이 빠져나갔다. 반면 안정투자형과 중립투자형의 적립금 증가는 거의 전부 평가이익이었다. 순유입은 각각 −19억 원, 75억 원으로 사실상 0이다. 실제 자금이 들어온 곳으로 추정이 되는 곳은 적극투자형뿐으로 867억 원이다.
안정형에서 나간 1조4891억원 가운데 디폴트옵션 안의 다른 등급으로 옮겨 간 것은 923억 원, 6%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디폴트옵션을 떠났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운용 상품을 지정하지 않을 때 자동으로 적용되는 제도다. 적립금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정하지 않은 자금이 늘었다는 뜻이고, 줄어든다는 것은 그 자금이 다른 형태로 옮겨 갔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디폴트옵션에서 자금이 빠져나갔다는 것이 가입자가 퇴직연금 계좌를 떠났다는 뜻은 아니다. 같은 사업자의 같은 계좌 안에서 디폴트옵션 상품을 팔고 가입자가 지정한 다른 상품으로 옮긴 경우가 여기에 포함된다. 다른 사업자로 계좌를 이전한 경우, 퇴직이나 중도인출로 적립금이 계좌를 떠난 경우도 섞여 있다. 어느 쪽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성과를 낸 상품들이 그 자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채널이 등급을 갈랐다
왜 안정형에 머무는가. 사업자별 데이터가 단서를 준다.
사업자별로 디폴트옵션 적립금을 가중치로 1년 수익률을 계산한 뒤 안정형 비중과 대조하면 상관계수가 −0.976으로 나온다. 안정형 비중이 낮을수록 계좌 전체 수익률이 높다는 관계가 42개 사업자에서 예외 없이 관철된다. 위험등급별 수익률이 2.37%에서 32.66%까지 벌어져 있으므로, 어느 등급에 자금이 있느냐가 결과를 사실상 결정한다. 계산을 꼭 해야 짐작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디폴트옵션의 위험등급은 사업자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입자가 지정한다. 같은 제도, 같은 네 등급을 두고도 증권사 고객은 위험등급을 높게 고르고 은행 고객은 안정형에 머문다.
첫 단계인 제도 유입에서도 같은 갈림이 보인다. 퇴직연금 총적립금 대비 디폴트옵션 적립금 비중은 은행 25.73%, 보험 10.43%, 증권 2.91%다. 증권업권은 121조 원을 운용하면서 디폴트옵션에는 3조5220억 원만 담았다. 스스로 상품을 고르는 고객이 많은 채널일수록 디폴트옵션이 발동할 여지가 작다.
정리하면 증권사는 디폴트옵션에 자금이 적게 들어오지만 들어온 자금은 위험자산에 배분되고, 은행은 자금이 많이 들어오지만 안정형에 머문다. 그리고 상위 10개 사업자가 디폴트옵션의 89.5%를 쥐고 있으며 그중 6곳이 은행이다. 시장 전체의 낮은 수익률은 개별 사업자의 문제가 아니라 이 구조에서 나온다.
은행권의 오래된 숙제가 여기서 겹친다. 은행·보험 퇴직연금 계좌에서는 상장지수펀드(ETF) 실시간 매매가 불가능하다. 고객 주문을 일정 시간 모아 증권사에 개설된 은행 명의 신탁 계좌를 거쳐 매매하는 구조여서, 애플리케이션 안에서 실시간 가격 조회조차 되지 않는다. 금융위원회는 ETF 위탁매매가 은행에 허용된 집합투자증권 투자중개업 범위에 들지 않는다고 해석해 왔다.
은행권은 이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규정하고 실시간 매매 허용을 요구해 왔고, 최근 전 업권 적용에 대한 논의도 나온다.
그러나 안정형 비중과 수익률의 상관계수 '−0.976'이 말하는 바를 생각하면 순서가 뒤바뀐 요구일 수 있다. 은행권의 낮은 수익률은 ETF를 팔지 못해서가 아니라 퇴직연금 가입자의 성향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매매 편의를 확보한다고 해서 안정형을 고른 가입자, 또는 그저 안정적인 걸 원하는 투자자가 적극투자형으로 옮겨 가지는 않는다. 물론, 안정형이 아닌 가입자가 증권으로 옮기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볼 수는 있다.
해외 데이터도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미국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에서 가입자가 직접 종목을 매매하는 브로커리지 윈도를 실제로 이용하는 비율은 전체 가입자의 0.3% 수준에 불과하다.
반면 타깃데이트펀드(TDF)는 401(k) 플랜의 85%가 제공하고 가입자 88%를 포괄하며 전체 자산의 38%를 차지한다. 다른 조사에서는 플랜의 96%가 TDF를 제공하고 가입자 83%가 이를 사용하며, TDF 투자자의 70%는 계좌 전액을 단일 TDF에 맡기고 있다. 관리형 계좌를 선택한 가입자의 약 80%는 그 선택지가 없었다면 스스로 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DC형 시장에서 직접 매매 경로는 통계적 변방이었고, 자산은 솔루션 상품으로 흘렀다. 은행 창구를 찾는 가입자는 스스로 종목을 고르려는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은행에 필요한 것은 매매 편의가 아니라, 한 번 맡기면 알아서 분산되고 재조정되는 상품과 그것을 권할 수 있는 접점이다. 대면 채널과 생애 자산관리 상담을 가진 은행이 오히려 유리한 영역이다.
퇴출이 아니라 경로가 문제다
3년의 데이터가 남긴 그림은 이렇다. 상품은 준비됐다. 적극투자형에서 가장 나쁜 상품도 1년 16.79%를 냈고, 3년 이상 관측된 196개 중 구조적 부진은 6개(3.1%)에 불과했다. 사업자들이 지난 3년간 만들어 놓은 라인업과 이들에게 상품을 제공하는 자산운용업은 제도가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자금의 82.5%는 그 상품에 닿지 않는다. 지금 정책 논의는 성과 미흡 상품을 걸러내는 데 초점이 있다. 필요한 일이지만, 3% 상품을 퇴출해도 82.5%는 여전히 안정형에 남는다. 제도의 병목은 상품의 품질이 아니라 자금이 좋은 상품에 닿는 경로에 있다.
12분기 동안 한 번도 줄지 않았던 안정형 적립금이 이번에 줄었다. 그 자금이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다음 분기에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지가 이 제도의 다음 3년을 가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좋은 상품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알려주고 이끄는 일이다.
영주 닐슨 한국퇴직연금데이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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