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상상력의 보고, 신화
신화의 시작은 신과 창조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과 우주가 어떻게 창조됐는지에 대한고대인들의 상상력이다.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어떤 창조 인식을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까? 주요 창조신화(창세신화)에서 창의적 에너지를 찾아봤다.
김지선 중문학 박사, <붉은 누각의 꿈>·<귀신·요괴·이물의 비교문화론> 공동 저자, <신이경>·<열녀전> 역자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이집트 파피루스의 고문서에는 새로움을 발견해내야 하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아직 알려지지 않는 구절, 남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낯선 말, 선조들이 사용한 적이 없는 진부하지 않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의적 아이디어에 대한 갈망은 그 옛날 이집트 시대에도 있었으니, 창조의 고통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새로움을 얻기 위해 오히려 오래되고 낡은 신화를 들추어본다면, 의외의 지혜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창조의 위대함,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스의 창세신화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시원을 알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에 밤과 에레보스라는 두 자손이 탄생했고, 이로부터 생명의 근원인 에로스가 탄생했다. 에로스의 탄생과 함께 낮과 빛이 생성됐고, 아름답고 광활한 대지가 생겨나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낳았다. 대지인 가이아와 하늘 우라노스는 부부로 결합해 자손을 낳았다.
그런데 가이아가 낳은 자식들을 아버지인 우라노스가 미워해 땅속에 가두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자식들 중 크로노스가 반기를 들어 아버지에게 대항했고, 아버지의 성기를 잘라 죽였다.
아버지의 위치가 된 크로노스는 다시 두렵기 시작했다. 자기가 했던 것처럼 자식들이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낼 것이 두려워 아내인 레아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차례로 삼켜 먹어 버렸다. 처음에 레아는 저항을 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남편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여섯 번째 아이를 몰래 빼돌려 키웠다. 그가 바로 제우스다. 성인이 된 제우스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고, 결국 싸움에 승리해 올림푸스 최고의 신이 됐다.
아버지가 사랑으로 자식을 보살피고, 자식은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며 효를 다해야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매우 끔찍하게 다가온다. 왜 아버지는 자식을 미워해 땅속에 가두고, 심지어 삼켜 먹었을까? 왜 자식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싸워서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을까? 이 격렬한 싸움의 이야기는 상징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창조에 대한 서구인들의 인식이 담겨 있다.
그리스 창세신화에서 아버지는 구시대, 오래된 것, 낡은 것을 상징한다. 아들은 신시대, 새로운 것, 살아 움직이는 힘을 상징한다. 즉 늙은 아버지와 젊은 아들의 싸움은 오래된 질서, 구습(舊習), 변하지 않으려는 속성과 새로운 질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 밀고 나가고자 하는 힘의 대결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3대에 걸쳐 일어난 싸움에서 모두 젊은 아들이 승리했다는 데 있다. .">
오래되고 낡은 것은 청산의 대상일까
오래되고 낡은 것, 구습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청산의 대상이 된다. 늙은 아버지에 대한 젊은 아들의 승리는 늘 새로움을 향하고, 낡은 질서를 타파하며, 무한히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에 대한 긍정을 나타낸다. 18세기 계몽주의가 그랬고, 지금의 우리 역시 여전히 이성의 힘을 믿고 끊임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아가야 스스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창조’를 성스럽게 생각하고 숭배하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창조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발전을 위해서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창조밖에 없는가? 반대로 창의적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낙후되고 도태되는 존재인가?
이에 대해 인도의 창세신화는 전혀 다른 해답을 내놓는다. 기원후 3세기 사이에 힌두교에는 브라흐마, 비슈누, 쉬바라는 세 명의 신이 나타났다. 이들은 각각 우주의 창조, 유지, 파괴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창조자 브라흐마가 중요한 신으로 등장했지만, 6세기 이후 그에 대한 숭배가 점점 쇠퇴해졌다. 아마도 인도인들에게 창조는 한 번 이루어지고 나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됐던 듯하다. 창조 자체보다는 오히려 유지하고 파괴하는 행위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다.
반면 직선적 시간관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창조를 상징하는 브라흐마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모든 것은 창조로부터 시작되고, 질서가 유지됐다가 오래된 것은 허물어지고 파괴된다는 시간의 흐름으로 세 신의 관계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도 신화에서 세 신은 하나의 근원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창조는 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유일한 시작점도 아니다. 창조보다 때로 유지가 중요할 수 있고, 파괴가 전제되지 않으면 새로운 창조도 일어날 수 없다.
위 가운데 그림은 비슈누를 묘사한 그림이다. 바다 위에서 쉐샤라는 뱀에 누워 잠들었던 비슈누가 신비로운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면서 배꼽에 연꽃이 피어났고, 그 연꽃에서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나타난 장면을 그린 것이다.
브라흐마에서 비슈누로 이행되는 것이 아니라, 비슈누에서 브라흐마가 나타난다는 상상력은 창조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깨어주기에 충분하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창조는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 고착되고 견고하게 유지되는 과정에서, 혹은 철저한 파괴 행위를 통해 발견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더욱이 중국의 창세신화는 흔히 우리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창세신화에서 한참을 비껴 나가 있다. 우주는 창조주에 의해 성스럽고 거룩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과정 역시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역동적인 싸움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삼오역기(三五歷紀)>에 의하면, 태초의 우주는 거대한 알로 묘사되고 있다. 혼돈은 어둡고 암울하고 반드시 제거돼야만 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저 흔하디흔하고,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알처럼 상상됐다. 혼돈은 어떻게 예술의 신이 됐나
그 알 속에서 반고(盤古)라는 거인이 태어났고, 거인의 몸이 알을 깨고 나와 양기와 음기가 각각 하늘과 땅이 됐다. 그리고 반고의 몸은 날로 점점 커졌다. 몸이 계속 커지고 커지다가 어느 날 반고는 저절로 죽게 된다. 인간이 살다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듯, 반고는 그렇게 죽었고, 그의 몸은 우주 그 자체가 됐다. 반고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이 됐으며, 눈은 해와 달이 됐고, 피는 강이 됐다.
중국 신화에서 우주는 그렇듯 창조주의 위대한 작품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늙어 죽은 거인의 숨결과 목소리, 눈, 피 등이 재료가 돼 우주가 만들어졌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인간의 몸으로 우주의 창조 과정을 설명하는 상상력은 너무도 소박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또한 거기에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젊은 아들이 늙은 아버지를 죽이는 격렬한 싸움도 없다. 느슨하고 느리고 전혀 새롭지 않은 재료로 우주가 만들어지는 창조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동양 신화에는 정말로 창조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과 관련해 <산해경(山海經)> 속 제강(帝江)이라는 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강은 누런 자루 같은 몸에 불꽃처럼 붉으며, 발이 여섯 개, 날개가 네 개 달린 모습이다. 머리도 없고 자루 같은 몸만 있는 제강은 마치 동그란 알처럼 생겼다. 앞서 <삼오역기>에서 혼돈은 알로 상상됐다고 했다. 제강은 곧 혼돈이 인격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제강이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는 것은 이 신이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법을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제강은 예술을 관장하는 신인 셈이다. 그런데 머리도 없고 몸만 있는 신이 어떻게 춤과 노래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몸으로 어떻게 예술을 표현했을까? 혼돈이 인격화된 제강이 예술의 신이라는 사실에서 예술과 창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찾을 수 없을까?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면서 음악의 신이며 서구 문화에서 이성적인 것을 상징하는 존재다. 바흐의 음악이 우주 질서를 구현해내고자 했던 것처럼 아폴론적인 것은 균형과 조화, 질서, 통일성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제강은 아폴론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예술과 아름다움의 문제를 말한다.
질서와 통일성을 근거로 한 예술은 물론 아름답지만, 질서와 통일성은 때로 경직된 틀이 돼 우리를 억압할 수도 있다. 제강은 우리에게 혼돈은 악, 두려움,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진정 격식에서 벗어나 무질서한 세계에 들어섰을 때, 그 광활한 자유로움 속에서 진정한 창조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질서는 나쁘고 혼돈은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느 것도 우열의 개념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제강의 역설은 한쪽으로만 치우쳐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유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라고 충고하고 있다.
창조에 대한 인식 역시 그렇다. 오직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창조이고,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창조만이 살 길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에게 오래되고 낡은 신화의 이야기들은 자꾸 돌아보라고 말을 건다. 진부하고 전혀 새롭지 않은 것, 일상의 모든 것에서 창의적 에너지가 빛나고 있다고. box 창조신화란 무엇인가?
창조신화 즉, 창세신화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기원과 생성에 대해 이야기한 신화다. 세계 각국에서 전해지는 창세신화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모티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초적 존재가 죽어 분해되고 그 흩어진 몸이 재료가 돼 우주가 되는 신체화생(身體化生)의 우주발생론이다. 게르만 신화의 이미르, 바빌론 신화의 티아마트, 인도 신화의 푸루샤, 중국 신화의 반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모두 원초적 존재인 거인이 죽어서 그 몸이 우주가 됐다는 상상력을 공유하고 있다.
해체된 신체기관으로 우주를 형성하는 거인은 그 자체로 대우주와 소통 가능한 소우주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러 신화마다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모티브이지만, 이 거인의 죽음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개된다. 게르만 신화에서 바빌론 신화, 인도 신화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질료가 되는 원초적 존재는 주로 싸움에서 패배해 살해당하고, 싸움에서 승리한 새로운 질서의 승계자들은 그 시체로 새로운 우주를 구축한다.
반면 중국 신화의 반고는 어떤 의도적인 살해 행위 없이 태초의 혼돈을 깨뜨리고 나타난다. 이 원초적 존재를 위협하는 어떤 적대적인 세력도 존재하지 않고, 반고의 죽음에는 폭력성이 개입되지 않는다. 반고의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 찾아오는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반고가 죽어 만물로 변화하는 과정은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변화하는 과정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바라보는 인식이 투영돼 있다. 이는 갈등과 투쟁이 아니라 조화와 공존의 사유로 자연과 객관 세계를 바라보는 동양의 사유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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